광복 당시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기념사진 1945

by 종이비행기 posted Apr 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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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당시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기념사진 1945





광복 당시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기념사진 1945.jpg



중국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광복을 맞이한 김구 선생(맨 앞줄 좌에서 5번째)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이 환국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945년 11월 5일 귀국길에 오른 임정 요인들은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조국에 돌아왔지만, 그들의 환국을 기록한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945년 8월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광복군이 국내 진입 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으로 보면, 7은 우리의 애국적 선열들의 피와 땀일 것이오. 그러나 불행히도 최후의 3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우리의 해방은 백과사전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될 기괴한 내용을 포함하고 말았습니다.” 백범의 말마따나 자력으로 싸워서 얻지 못한 광복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귀국해서 정권을 국민에게 봉환한다.”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다음 날 환국을 결정했다. “한국 점령 과정에서 미군과 협조를 원하며,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재편성에 미군을 지원하고자 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자들이 한국문제에 발언권을 갖게 되길 바란다.”

8월 14일 외무부장 조소앙은 주중 미국대사를 통해 임정이 귀국해 실질적 정부 역할을 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밝혔다. 그러나 10월 17일 미 국무부·육군성·해군성 3성조정위원회(SWNCC)는 맥아더에게 “개인 자격의 귀국이라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지침을 주었다.

“이에 본인은 본인 및 동료들이 어떠한 공적 위치로서가 아닌 완전한 개인의 자격으로서 귀국을 허락받은 것임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음을 귀하에게 확신시키고자 합니다. 한국에 들어가면 우리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정부로서 혹은 민간 및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는 기구로서 활동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꺼이 진술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한국인에게 유리하게 될 질서를 수립하는 데 있어 미군정과 협력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11월 19일 김구는 중국전구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에게 ‘개인 자격의 귀국’을 다짐하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미군정은 다음 날 귀국길에 오른 29명의 국무위원 모두가 탈 수 없는 15인승 C-47 경비행기 한 대를 상하이로 보냈다.

11월 23일 김구 주석을 비롯한 제1진이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그러나 그들과 태극기를 함께 흔들 환영인파는 비행장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 이 땅의 사람들은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광복은 축복이 아니라 분단과 동족상잔의 재앙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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