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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룡이 세상에 태어났을때 부친 이경선옹은 양반계급으로 박학다식 하였다고 한다 거기에다 훤출 한 키와 인물에 관대하고 씀씀이가 비교적 헤펐던 그는 승룡이 태어나기 오래전에 가사를 탕진 했다 하지만 왕손과 양반으로서의 풍모를 유지하려 애 쓴 덕에 이웃들은 경선옹을 “샌님은 끝까지 양반 이시다”라고 평했다고 전해진다

계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가깝게는 자신 집안 계보와 조선 명문가들의 계보 를 탐색하는 일에 시간을 소진하고 있었던 이경선옹은 이씨 가문의 가계를 조그마한 책자로 역어 승룡으로 하여금 지니고 다니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승룡은 아버지가 정성들여 엮어준 책들을 평생동안 지녔다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 이경선옹은 틈만나면 승룡에게 고시 고전 설화 예전들을 암송토록 하고 한줄이라도 잊었으면 엄하게 꾸중하고 다시 가르치기를 반복했다

김해김씨 어머니도 당시로서는 드믈게 한문을 깨우친 여성으로 근근히 승룡을 가르쳐 왔는데 후일 이승만이 한시에 상당한 취미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에게 배운 덕이 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바람엔 손이 없으되 모든 나무들을 뒤 흔든다 달 에겐 발이 없으되 하늘을 건너 여행한다”  어머니 에게서 배운 그런 시들은 항상 이승만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가 시흥의 원천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승룡이 7살 되던 유년시절 나라에서는 임금의 아버지 대원군때부터 강력하게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것은 서양인들이 수작을 벌인 천주악(천주교)과 아편전쟁 탓일 것이다 때문에 외국에서 는 일절 문을 닫아버린 조선을 은자의 왕국라고 불렀는데 외국인들은 함부로 들어올수도 없었고 내국인들 마져도 몇몇 관리 가 1년에 몇번 청나라를 다녀오는 것 외에는 거의 없었고 사회생활 역시 유교 예법에 묶여 그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시절은 함부로 변화나 개화를 말 한다 는것은 상상 조차 못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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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경 이승만이 연사로 참가한 종로통 만민공동회(왼쪽사진) 1903년 한성감옥에서 28세 이승만과 ′복당동지′들. 왼쪽 중죄수 복장 이승만. 앞줄 오른쪽부터 김정식, 이상재, 유성준, 홍재기, 강원달. 뒷줄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했던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 아들). 자료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1904년 한성감옥에서 찍은 이승만(왼쪽에서 세 번째)과 그의 아들 태산(이승만 앞)의 사진.



그런 환경속에서 자라기 시작한 어린 승룡은 사대부들이 항상 가계보를 암송하고 중요시 하면서도 가족을 부양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 한다는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양반의 자손이기 때문에 존경 받고 놀고 먹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깨달은 시점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 지기 시작 하였다 당시에는 그만큼 높은 벼슬아치부터 빈한한 소작인에 이르기 까지 전조선 사회에 깊은 시름과 병이 고루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대 대부분의 젊은 사대부들은 거의가 조상 상찬 하는데 힘을 기우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각 가정이나 국가 사림살이는 무질서 하고 무능력에 빠질수 밖에 없었다 어린 승룡은 그와 같은 사회에 만연한 허례허식들이 퇴보적인 것임을 스스로 느끼고 깨닫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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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배재학당과 학생들, 1885년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맡았던 서재필(徐載弼·1864∼1951) 헐버트 주시경과 이승만이 주필로 발행한 학생신문 협성회보 1898년 4월 2일 제14호까지는 주간으로 발행하다 큰 호응을 얻자 4월 9일부터는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국내 최초의 일간이 됐다. 매일신문보다 2년 앞선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격일 로 주3회 발행했다 또한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 주 연사로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토론회를 전개하여 큰 호응을 었었다. 배재 학당 시절 이승 만 (오른쪽) 과 부친 이경선옹 친구 김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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