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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던 9.15 인천 상륙 작전. 



incheon landing.jpg



인천 녹색해안 기념비.jpg




인천 상륙 작전(仁川上陸作戰, Battle of Incheon)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시작된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는 7만 5천여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고, 대한민국의 서울 탈환으로 이어져 한국 전쟁 전반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1]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었다.



배경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이 발발한지 4일 지난 뒤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조선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구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 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의 일부 인사들이 작전 성공률이 5000대 1이라고 주장하며 격심하게 반대하였으나,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난점이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인천 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8월 28일 미국 합동 참모 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사실 인천 상륙 작전은 정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일단 조수간만의 차가 엄청나고, 또한 인천항을 지배하는 감제 고지인 월미도를 사전에 점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에서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해 태평양에서 '섬 건너뛰기 전술'로 큰 효과를 보았던 맥아더는 이번 상륙작전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이어 세계 전사에 남을 만한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incheon sealwall belmond.jpg



사전 작전


상륙 작전은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서 상륙 작전 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 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 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9월 4일 상륙 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5일에는 영덕군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다. 장사 상륙 작전에서 생존한 학도병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장사 상륙 작전이 9월 14일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으나, 해군 기록에는 9월 15일에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고 적혀있다.[2]


이와 동시에 맥아더는 군산에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으며, 이 정보에 속아넘어간 인민군들은 군산의 방어를 강화하면서 다른 지역의 경계가 허술해졌다.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인천을 조심하라"고 전문을 보내 서해안 방어 사령부를 신설하고 제18사단과 해군과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준비를 했으나 결국 막을 수 없었다.



상륙 작전의 진행 과정


작전의 제 1단계는 상륙 본대의 상륙 개시 직전에 수행하는 사전 정보 수집, 교란 작전, 각종 준비 작전 및 선견침투 작전이었다. 정보 수집 작전엔 해군 정보요원들의 X-ray 작전, 교란 작전엔 위에도 언급된 학도병들의 장사 상륙 작전, 준비 작전과 선견 작전엔 미 해군 UDT의 수중 장애물 제거 작전과, KLO 부대원 및 한/미의 해군/육군 장교들로 구성된 특별작전팀이 수행한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이 대표적이다.


드디어 9월 15일, 본 작전 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이 영흥도 근처에 집결하여, 본격적인 상륙이 시작되었다.


작전의 제 2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해병대의 제5연대 예하 제3대대 상륙단이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 106명이 포로로 잡혔고, 네이팜탄 투하 및 기총소사로 민간인의 피해가 컸다.


제 3단계에는 미 해병대 제1사단의 제1연대전투단과 제5연대전투단이 각각 인천 남동부의 블루 비치(Blue Beach)와 인천항의 레드 비치(Red Beach)에 상륙하여 적 경비병력을 격퇴시키고 해안지역을 장악하였다.


제 4단계는 미 해병대 1사단의 나머지 병력과 미 육군 제7보병사단, 그리고 국군의 해병대 제1연대와 육군 제17연대의 상륙 및 연합군의 내륙 진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에서 급조 편성한 인천의 허술한 북한 경비 병력은 거세게 밀려오는 연합군의 파상 공세에 대항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곧바로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연합군은 조선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하여 대항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쉽게 성공하였다.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 상륙 이후 UN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밖에 안 걸렸으니, 적의 배후를 기습한 이 작전의 성과는 매우 컸다.


월미도의 비극


1950년 9월 10일 미 해병대 소속 항공기(리차드 루블(Richard W. Ruble) 제독의 해병대 항공단 제15 항모 전단 항공기.)들에 의한 폭격으로 인해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이 집단 희생되었다. 오전 6시 미 해병대 소속 콜셰르 폭격기 8대가 항공모함 시실리호에서 이륙했다. 같은 시각, 같은 기종의 폭격기 6대도 항공모함 바딩 스트레이트에서 이륙했다. 모두 14대로 이루어진 폭격기 편대는 이날 마을이 있는 '월미도 동쪽 지역의 집중 폭격 또는 전소' 임무를 맡았다. 집중 폭격(Saturation Bombming)이란 '적이 있는 일정 지역을 목표로 설정하여 집중적이고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것'을 말한다. 집중 폭격 대상지역으로 선정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인명, 건물 등은 적 또는 적 시설물로 간주되어 공격 목표가 된다.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월미도 내에 움직이는 모든 인명은 적 또는 적 게릴라로 간주되는 공격 대상이었고, 마을의 초가집과 창고는 적 병력이나 무기가 은닉된 시설이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이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전 7시, 폭격기 편대는 월미도를 한번 정찰한 후 4대씩 짝을 지어 북쪽으로 갔다가 영종도 상공에서 다시 남쪽으로 빙 돌아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월미도 위에서 급강하해 마을 위를 지날 때 각자 네이팜탄 두 개씩을 떨어뜨렸다. 첫 네이팜탄은 마을 한가운데의 초가집에 떨어졌다. 이내 거대한 화염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연기가 너무 자욱했기 때문에 폭격기들은 섬 주위를 선회하며 연기기가 걷히기를 기다렸다가 시야가 확보되면 다시 저공비행 상태에서 불타지 않은 건물들에 로켓포와 기관총을 쏘았다. 건물들이란 마을의 집과 창고 따위였다. 이러한 패턴의 폭격이 12시 전후까지 3차례 실시되었다.[3]


마을 주민들은 9월 10일 7시 첫 폭격이 시작되자 곧바로 마을을 빠져나와 인천으로 연결되는 다리쪽 갯벌로 피신했다. 그러나 폭격기들이 피신해 있거나 다리를 통해 인천으로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주민들은 몸에 진흙을 바르고 죽은 척 엎드려 있으면서 추가 공격을 모면했다. 그러다가 폭격이 뜸해진 틈을 타 갯벌을 걸어서 인천으로 대피했다.


폭격은 인천상륙작전의 사전 작전으로 실시되었다. 목적은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 진지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마을까지 폭격한 이유는 그곳에 적 병령과 무기가 은닉되어 있다가, 아군이 상륙했을 때 기습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작전상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민간인 거주 지역임을 미군이 알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군이 월미도에 주둔했기 때문이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월미도를 손바닥 보듯이 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날 폭격으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가 10명이다.


결과


결국 미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에 성공하였고, 양쪽 (낙동강 방어선, 인천)에서 공격받게된 인민군은 크게 패하고 또 패해 결국 38선을 단 15일 만에 내주게 된다. (인천 상륙 작전은 UN군과 한국군의 1차 대공세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의 승리는 38도선 남쪽을 침범한 북한군을 몰아내는 것으로 한정된 최초의 유엔 결의를 벗어나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미국은 기존의 계획을 수정하여 38선 이북 지역에서 북한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으로 방침을 정한다. 10월 1일 한국군에 의해 최초로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이 이루어지고, 이후 맥아더는 각 예하 부대에 가능한 한 북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중국은 이미 UN군이 38선 이북으로 넘어올 경우 참전하겠다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를 중국의 위협 전술이라 치부했다. 그 결과 중공군의 대대적인 참전이 이루어졌고, 유엔군은 다시 후퇴하게 된다.


인천 상륙 작전을 소재로 한 작품

영화

인천상륙작전 (1965)

오, 인천 (1982)

인천상륙작전 (2016)


incheon macarthur.jpg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인천의 명물로 상륙작전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다. 


자료 제공: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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