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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15 인천 상륙작전 이후 서울로 향해 유엔군과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날이다. 


서울 수복.jpg


9.28 서울 수복


9월 15일에 실시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국군과 UN군은 인천 진입에 성공했고 곧바로 주둔 중이던 북한군을 소탕해 나갔다. 그 결과 인천은 상륙 다음날인 16일 아침에 완전히 해방되었으며, 인천 해방 과정에서 북한군의 반격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천에서 유엔군이 입은 손실은 전사 21명에 실종 1명, 부상 174명에 불과했다. 비전투 사상자를 포함해도 부상자가 188명으로 늘어날 뿐이었다.


이후 미 해병 1사단을 주축으로 한 상륙부대는 인천 수복에 성공하자마자 바로 역할을 분담한다.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는 경인가도의 북쪽, 1연대는 남쪽을 통해 서울로 진격하며 7연대는 예비병력으로 당분간 인천 수비에 전념한다는 것이었다. 5연대와 1연대는 다음 날인 9월 17일 오전 내륙으로의 진군을 시작했으며, 다음 날인 18일까지 산발적인 전투를 치르며 영등포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뒀다. 북한군은 인천 방면의 증원을 위해 T-34/85 전차와 병력을 보냈으나, 이 증원 병력이 부평 근방의 경인가도에서 오히려 미리 매복한 미 해병대에게 궤멸 당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시점에 와서야 북한의 김일성은 인천이 주공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경인가도에 지뢰를 엄청나게 부설하는 한편, 낙동강 전선을 향해 김천까지 남하했다가 급히 진격방향을 바꿔서 다시 올라온 북한군 9사단 87연대가 필사적으로 영등포를 방어하게 했다. 영등포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서울로 동원할 수 있는 북한군의 2선급 부대는 모두 동원하며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는 듯 했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중국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전선의 주요 정예부대는 극히 일부만 빼내서 서울로 올렸기 때문에 병력에서나 장비에서나 상륙군에 대항하기가 어려웠다.



영등포 시가전


경인가도 남쪽으로 향했던 미 해병대 1사단 1연대는 한강을 건너기 전 영등포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게되는데 이 때가 9월 20일이었다.[5] 영등포 점령에 나선 미 해병대는 포병대와 항공기의 맹폭을 하루 내내 지원받았으나, 북한군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다음 날인 9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영등포 서북측(현재의 당산동 방면)과 서남측(현재의 문래동 방면)을 향해 각각 호킨즈 대대와 사타 대대가 공격을 진행하였으나 별로 진전이 없었다. 호킨즈 대대는 안양천을 건너지도 못했으며, 사타 대대는 영등포 남쪽 고지에서 받는 포격으로 인해 안양천을 건너는 데만 8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시가 중심부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1선 독려를 돌고 있던 호킨즈 중령이 영등포 적진지를 상세히 정찰해 보았더니 시가 중앙부(현재의 영등포 로터리)에 북한군이 거의 배치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됐다. 호킨즈 중령은 예비의 에이블중대로 하여금 그 틈을 찌르게 하였다. 에이블중대는 돌격태세를 갖추어 쏜살같이 영등포 중앙부를 향해 약 600미터 정도 진입하여 중앙 십자로(현재의 영등포구청 사거리)에 다다른다. 이 과정에서 중대는 한 발의 총격도 입지 않았고 정찰한 결과대로 시내에는 한 사람의 북한 병사는 물론 민간인도 없었다. 에이블 중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중대의 좌우후방에서는 격심한 총포성이 나고 있는 반면 영등포 중심부는 죽음의 거리처럼 조용하여 오히려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고 한다.


좌우후방의 총포성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음에도 호킨즈 대대장은 에이블 중대에 "개의치 말고 계속 진격하라"고 명령하였고, 중대장은 잠시 북한군의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였으나, 명령이 있기에 동쪽으로 계속 밀고 나갔다. 중대는 서울 방면에서 구보로 증원해 온 수십 명의 북한 병사를 매복하여 기다렸다가 궤멸해버린 후 정오 경에는 영등포 시가의 동쪽 끝에 진출한다. 그곳에는 경부국도가 동서로 뻗어있었으며, 중대는 이 도로 제방에 진지를 구축했다. 남쪽으로는 영등포 시가 중심부, 북쪽으로는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이 곳에서 진지공사를 하면서 병사들은 북한군의 공격이 있을까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으나 북한군은 시가지 양단의 전투에 몰두하여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등잔밑이 너무 어두웠다.


오후 늦게 북한군 소부대가 정찰적 공격을 해왔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했으며, 이때 진지 남쪽 300미터 정도에 있었던 북한군 탄약고를 폭파해버렸다. 저녁 무렵에는 5량의 T-34 전차가 시가 중앙 쪽에서 나타나 진지에 공격을 가했으나, 이 때 나머지 보병들은 개인호에 엄폐하고 바주카병들만 응전하여 2량을 완파, 2량을 반파시켜 격퇴한다.


밤부터는 북한군의 야습이 개시된다. 총 4차례에 걸친 야습이 있었으나 그 때마다 중대는 화력을 집중하여 격퇴했으며 특히 4회째에는 진지 앞 10미터 정도까지 유인한 뒤 일제사격을 가하여 북한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북한군이 민간인 가옥 뒤에 숨어 5회째의 야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웹 하사가 몰래 접근하여 훈시 중인 지휘관을 저격한다. 5차 야습은 함성을 지르는 것만으로 끝났다. 날이 밝고 보니 북한군은 퇴각하였으며 제방 진지 앞에는 275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1연대는 그것으로 영등포 점령을 완료하였다.


한편 미 육군 7사단 32연대는 영등포의 남쪽, 현재의 관악구/구로구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했다.



서벽(西壁)전투


한편 경인국도의 북쪽을 담당한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는 한국 해병대 1연대와 함께 내륙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들은 9월 18일 김포비행장을 확보하였고, 이후 행주나루를 거쳐 9월 20일에는 북한군이 농성하던 행주산성을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한다.


이들이 모래내(홍제천 일대)에 진출한 것은 9월 21일 저녁. 이 때만 해도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다음 날이면 서울을 탈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무악재 산계. 높이 296미터의 안산[6]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금화산(105m)[7], 노고산(105m)[8], 와우산(105m)[9] 일대로 이어지는 이 산계는 지금은 건물이 밀집하여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60~100m 정도의 산맥과 계곡이 구파발부터 한남동에 이르기까지 한강과 수직으로 수없이 연이어 있는 지형이기 때문에 북한군의 자연요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미군은 금화산, 노고산, 와우산을 각각 105북고지, 105중고지, 105남고지라고 불렀다. 이 구간의 지형의 험준함과 무자비함은 오늘날에도 서울 버스 740 강북 구간 시승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


일제 시대 당시 일본군은 이 곳에 군사연습용의 각종 토치카, 교통호, 개인호 등을 구축하여 군사 훈련을 진행했었고,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인민군은 서울시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서울 주위의 산들과 시가지 안에 진지구축을 개시했다.


이 때 무악산 일대를 방어한 북한군 부대는 독립 25여단과 독립 78연대였다. 제25여단은 낙동강전투에 파견되기 위해 훈련을 받던 중 급거에 서울 방어명령을 받고 배치된 부대로, 총원은 약2500명이었으며 보병 2개대대, 중기관총 4개대대, 공병 1개대대, 76mm 포 1개대대, 120mm 박격포 1개대대를 기간으로 한 특이한 편제였고 방어 전문 부대였다.


9월 22일 아침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 해병 제1연대가 서울 서벽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으며, 제1대대가 105남고지를, 제3대대가 안산에서 105북고지까지를 맡고 한국 해병 제1,2 대대가 연희104고지를 맡았다. 여기에 인천의 항모에서 출격한 F4U 콜세어가 공중지원을 하여 일대에서는 혈투가 벌어졌다. 그 날 미 해병 제3대대는 가까스로 안산 산정을 점령하였으나 금화산에는 접근하지 못하였고, 한국 해병대는 연희산을 탈취하는데 실패했다. 미 해병 제1대대는 오후 5시 30분에 와우산 고지를 탈취하지만, 다음날 낮 북한군의 결사적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고 만다. 한국 해병대는 이틀 후인 24일에 결국 연희104고지와 능선일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전쟁 후반의 고지전의 예고편격인 이 전투는 25일 미군 지원부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 남쪽 압박에 참여하며 끝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 육군 7사단 32연대는 앞서 구로,관악 일대를 평정한 후 사평리(현재의 서초구 잠원동 일대)까지 진출하였다가,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하라는 알몬드 소장의 명령에 따라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함께 25일 새벽 서빙고 나루를 건너 오후에는 남산과 장충단 일대를 점령하였다. 철옹성같은 서벽에 비해 남벽의 수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영등포를 점령한 미 해병 제1연대도 25일 아침 밤섬을 거쳐 서강나루에 상륙하였다. 병력의 증원과 그에 따른 북한군의 수비 분산에 따라 고지들이 하나씩 점령되었다.


25일 오후에 접어들며 북한군의 서벽 방어선은 거의 허물어졌다. 이 때 북한군의 패주를 결정적으로 만든 것이 M4 셔먼 전차의 개량형 전차들. 화염방사전차들이 북한군의 토치카들을 생지옥으로 만들었고, 불도저 전차는 아예 참호를 생매장시켰다. 이는 미군이 태평양 전쟁의 전훈을 십분 활용한 것. 25일 저녁 무렵에 한미 해병대는 마포 전차종점과 용산역을 거쳐 삼각지 근처에 당도한다. 



서울 시가전


9월 26일 아침, 남산을 점령한 미 육군 32연대는 계속해서 흥인지문, 낙산 일대를 점령해 나갔고 한국 육군 17연대는 훨씬 더 동쪽으로 가서 용마산 고지 일대의 북한군 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서울 시가지 안의 탈환 작전은 미 해병 1사단이 담당했는데, 제1연대는 삼각지에서 서울역-서울특별시청 방면, 한국 해병 제1,2연대는 서울역에서 갈려 남대문시장-한국은행-소공동 방면으로, 미 제5연대는 금화산을 넘어 서대문형무소-독립문-서대문네거리-광화문-세종대로 방면으로 진격하기로 한다.본격 3호선 레이스 제7연대는 사직동 뒷산을 넘어 경복궁과 중앙청 방향으로 직행한다. 미 해병들은 위에서 말한 줄기 격인 도로만 따라 선(線)의 전진을 한 것이 아니라, 가지에 해당하는 대로 주변의 골목을 다 소탕하고 주요한 거점은 점령하는 면[面]적인 점령을 해가면서 부채살 같은 형태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때의 시가전은 바리케이드전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와 같이 북한군은 서울시민을 동원하여 주요 도로 요충지에 2-300미터의 간격으로 전진 방해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흙을 담은 가마니를 주로하고 돌과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 올려 만든 이 바리케이드 주변에는 적의 지뢰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길 양쪽의 2,3층짜리 건물을 토치카로 해서 박격포와 기관총, 저격수를 깔아두었으니 접근이 매우 곤란했다. 


이에 대응하여 미 해병대가 고안해 낸 방법은, 먼저 전차와 보병이 바리케이드 주변의 저격수와 기관총을 무력화시키면 공병들이 뛰어 들어 지뢰를 제거하고 그 후에 전차가 바리케이드를 깔아뭉개서 진격로를 여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바리케이드 하나를 돌파하는데 평균 1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천천히 한미 연합군은 서울을 점령해 나가서, 26일 밤에는 서울 시가지의 절반을 점령했고 그 다음날인 27일 새벽 3시, 중앙청을 탈환하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데 성공했다.[10] 27일 밤 서울 일대의 인민군이 전부 후퇴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막을 내린다. 이 기간 전체를 통틀어 유엔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500여 명과 부상 2,000여 명. 그 대가로 북한군 1만 5천여 명을 사살하고 포로 6천여 명을 획득했다.


서울 탈환 이틀 뒤 손원일 소장은 국군 최선임자로서 공식 포고문을 발표했고, 포고문은 백지에 붓으로 쓰여져 서울 시내 곳곳에 붙었다.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일 당시의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전투에 참여한 한국 해병대에는 훈련소가 있는 제주도 출신 장병[11]들이 많았다. 이들은 처음 서울 시내에 와서 시가지나 노면전차 등을 매우 신기해하며 구경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유엔군에선 '전투 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매우 용맹한 군인들'이라고 오해(?)했다고 한다.


결과


UN군과 국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한 후 13일만에, 서울이 함락된지 3개월만에 서울 수복에 성공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서 국군은 38도선을 넘어서 통일을 목표로 북진을 하게 된다.


자료 제공: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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