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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100주년 특별기획 2

▶ 워싱턴의 한국 독립운동 사적지들


구미위원부.jpg

마지막 주미외교위원부 건물. 1층은 사무실, 2층은 이승만 박사의 살림집으로 사용되었다.




워싱턴에도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적지(史跡地)가 있을까?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워싱턴 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들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워싱턴은 20세기 초반 세계의 리더로 막 떠오른 미국의 수도인 만큼 한국의 독립외교의 무대였다. 이승만을 비롯한 여러 선각자들은 워싱턴에서 외교를 통해 대한 독립의 열정을 불살랐다. 독립기념관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 뜻 깊은 사적지들을 찾아본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워싱턴회의, 한인자유대회 개최지, 한족연합 사무소, 한미협회 등 



▲ 임시정부의 주미대사관, 구미 외교위원부 


1919년 8월, 갓 발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 D.C.에 구미외교위원부(구미외교위원회)를 설치했다. 구미외교위원부는 1948년 9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폐지될 때까지 상해 임시정부의 미국 주재 대사관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으로는 한인 유학생, 동포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 독립공채 판매, 한국의 독립 승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초대 위원장은 김규식 박사였으며 1919년 9월 구미외교위원부로 이름이 바뀌면서 이승만 박사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현순ㆍ서재필 등이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5년부터 명맥만 유지하다 1939년 이승만의 외교활동의 재개로 부활하였다. 해방 후 이 박사가 귀국하자 임병직이 위원장에 선출됐다.

구미위원부는 설립 이후 네 차례 이전을 했다. 첫 사무실은 D.C.의 1333 H St, NW에 위치해 있었으며 1931년부터 34년까지는 1310 Park Rd, NW에 있었다. 


39년부터 44년까지는 1766 Hobart St, 해방 전해인 44년부터는 4700 16th St에 있었다. 200평의 대지에 건평 60평의 2층 규모였던 마지막 구미위원부 건물은 아래층을 사무실로, 2층은 이승만 박사의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1기 위원부가 있던 건물은 현재 그대로 있으며 ‘Peoples Life Insurance’ 빌딩으로 바뀌었다. 2기 건물(위 사진)은 개인주택으로, 3기는 가정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마지막 구미위원부 사무실 겸 사저는 워싱턴 제7일 안식일교회(Washington Seventh Day Baptist Church)로 사용되고 있다.  


 


▲ 한국 친우회


한국 독립을 후원하기 위한 미국인들의 단체가 있었다. 1919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박사와 톰킨스 목사의 주도로 설립된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다. 이 단체는 미 전역에 21개 지부를 조직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에도 지부를 두었다. 한국의 독립문제를 미국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워싱턴의 한국친우회는 1919년 10월 1일 설립되었다. 회장은 보일(G. L. Boyle)이고 서재필을 비롯한 3명의 실행위원과 3명의 위원을 두었다. 워싱턴 한국친우회는 미국의 주요 지도자와 단체를 대상으로 친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이 단체 사무실은 현재 ‘우드워드(Woodward) 빌딩’이라는 이름의 주상복합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주소 733 Woodward Bldg 15th St. NW, Washington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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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주미대사관, 구미 외교위원부 (왼쪽), 현순의 임시정부 주미공사관




▲ 현순의 임시정부 주미공사관


현순은 1903년 하와이로 이민한 감리교 목사였다. 1911년 귀국해 선교활동을 하다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도미한 그는 이승만에 의해 구미위원부 새 위원장에 임명됐다. 

현순은 1921년 3월 한국의 공식 외교대표부로 ‘공사관’ 설립을 추진했으며 4월 14일 정식으로 공사관을 설립하고 이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공관’으로 명명하였다. 하지만 공사관 설립 후 미국 정부에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하였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공사관 설립을 둘러싸고 현순은 서재필ㆍ정한경과 마찰을 빚었다. 당시 상해에 있던 이승만은 그를 구미위원부 위원장직에서 해임하여 사태를 일단락 시켰다. 현재 미 항공 관세사협회(National Air Traffic Controllers Association) 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소 1325 Massachusetts Ave. NW, Washington DC




▲ 워싱턴회의 개최지


1921년 11월12일부터 이듬해 2월6일까지 백악관 인근에서 ‘워싱턴 회의’가 열렸다. 이는 하딩 미 대통령 주도로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 9개국이 동아태 지역의 이해관계를 해결하고자 했던 회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회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단장 이승만, 부단장 서재필, 서기 정한경, 법률고문 프레드 돌프(Fred A. Dolph)로 한국대표단을 구성했다. 그러나 회의 참가는 할 수 없었고 미 언론에 한국의 식민지 문제를 알리며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회의장은 백악관 서쪽 17가에 위치한 ‘Daughter of the American Revolution(DAR)’ 건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주소 1775 D St. NW, Washington DC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를 발족시켰다. 재미한인 단체들의 역량을 집중하고 확대시켜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단체는 주로 모금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과 미주에서의 외교 및 국방 공작활동에 대한 후원에 주력하였다.


하와이와 LA에 각각 사무실을 두었지만 독자적인 선전외교활동을 위해 1944년 6월 10일 워싱턴에 사무소를 설립했다. 김원용 위원장, 전경무 선전부장 등이 미 정계를 상대로 해외 한인들의 전쟁 참가 시도를 비롯해 각종 국제회의의 참가와 언론 활동, 그리고 집회 개최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호소하려 했다. 워싱턴 사무소 건물은 헐려서 없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주소 1719 K St NW, Washington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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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회의 개최지(왼쪽), 재미한족연합위원회.




▲ 한미협회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인들도 움직였다. 친분이 있던 미국인들은 1942년 1월 16일 워싱턴 DC에서 ‘한미협회’를 설립했다. 한국의 독립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단체다. 이 협회는 회보 및 통신문을 발행하고 언론 보도자료의 배포, 대중강연 등을 통해 목적을 이루려 했다. 

1943년 당시 한미협회는 이사와 위원으로 36명이 참여했고 이승만과 중국인 2명을 제외하고 모두 미국인들로 구성됐다. 사무실로 이용한 콜로라도 빌딩은 법률고문 스테거스의 소유로 현재는 아메리카 은행(Bank of America)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주소 888 17th St NW, Washington DC



▲ 한인자유대회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1일까지 사흘간 워싱턴에는 미주에서 100여명의 한인들과 워싱턴 지역의 저명 미국인들이 모였다. 


3·1운동 23주년을 기념해 주미외교위원부와 재미한족연합회, 한미협회가 주최한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였다. 


한국의 독립문제를 미국사회에 호소하기 위한 이 대회에서 이승만 박사는 개최사를, 존 카피 연방 하원의원, 아메리칸 대학 더글라스 총장 등이 연사로 등장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군사적 지원을 촉구했다.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 건 등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한 5개항의 결의문도 채택했다.

이 역사적 회의의 현장은 라파예트 호텔 미러룸(Mirror Room)이다. 그러나 1971년 호텔은 헐렸고 미국노동조합총연맹(AFL-CIO) 본부 건물이 돼 있다. 주소 815 16th St. NW, Washington DC




▲ 한국 사정회 


1943년 11월 김용중이 한국사정사(Korean Affairs Institute)를 설립했다. 이 단체에서는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라는 반(半) 월간 영자지를 발간해 미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한국의 사정을 소개하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김용중은 1917년 도미해 LA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하버드, 콜럼비아, 조지 워싱턴, 남가주대학 등에서 공부를 했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겸 선전과장을 지냈으며 해방 후 나라가 분단되자 ‘중립화 통일론’을 제창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주소 733 15th St NW, Washington DC 




미주한국일보<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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