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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은 산재해 있던 7개 임정 중 하나인 상해임정 헌법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공포일은 9월 11일





문재인 정권이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며 4월 11일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준비해왔다. 그러나 정작 그 기념일자가 오류이다. 4월 11일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 제정일이다. 그 헌법과 정부 수립을 공포한 날은 1919년 4월 13일이었다. 그래서 임시정부 수립일을 국가기념일로 잡은 1990년부터 작년까지 4월 13일을 임시정부 기념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동안 논란이 있었다. 




■ '대한민국4년역서'…공식 정부수립 공포 언급 없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 2018년 3월 26일 열린 임시정부 수립 제99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는 임정 수립일이 4월 11일임을 알려주는 사료가 추가로 공개됐다고 한다. 1922년 임정이 만든 달력 《대한민국4년역서》에서 4월 11일이 '헌법발포일'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일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해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인준 등이 헌법 발포일인 4월 11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제안을 제출한 사실이 알려졌다. 여기에 광복 이후 국내로 돌아온 임정 요원들이 1946년 4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입헌기념식'에 참석하고 찍은 기념사진을 통해서도 임정 수립일이 4월 11일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1919년 4월 11일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을 제정했다는 것을 말해줄 뿐 공식적으로 정부 수립을 공포했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 대한민국의 제헌절인 7월 17일을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을 하자는 얘기와 같다. 근대국가 수립에 있어서 헌법 제정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므로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에 7개의 임시정부가 잇따라 나타났으나, 종이정부가 아닌 실체가 있는 것은 3개였다. 서울의 ‘대조선공화국’, 즉 세칭 ‘한성임시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에서 수립한 세칭 ‘노령(露領)정부’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것이었다. 


한성정부는 1919년 3월 중순부터 서울에서 비밀리에 추진하여, 4월 2일 인천에서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어 구체화한 뒤,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공표한 것이다. 한성정부는 국내의 서울에서 수립되었다는 점, 3.1운동과의 연계성이 깊다는 점,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수립되었다는 점, 정부조직과 각료구성이 어느 것보다 짜임새가 뛰어나고 해외지도자를 총망라한 대표자로 조각되었다는 점 등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미국의 UP통신을 통해 세계에 보도됨으로써 국제적 선포효과도 컸기 때문에 국내외에 가장 강력한 임시정부로 부각되었고 임시정부의 통합에 있어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다. 




임시정부에 부임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jpg

▲ 1920년 12월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 임정 대통령을 환영하는 모임에 참석한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화환을 두른 사람이 이승만이고 그 왼쪽은 이동휘 국무총리. 오른쪽은 안창호 노동국 총판이다. (2005년 1월 26일자 조선일보 지면)




■ 이승만, 임시정부 통합 작업 실시…9월 11일 새 헌법 공포


이승만 박사는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 노령정부에서 국무총리,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최고위직인 국무총리 등 세 정부 모두에서 최고 지도자로 추대될 정도로 이미 다른 인사와 비교되기 어려운 카리스마의 지도자로 부상해 있었다. 1919년 9월 6일 상해에서 발족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삼권분립의 대통령중심제로 수립되었다. 그리고 통합정부의 헌법은 상해정부의 헌법을 개정하는 형식으로 제정되었다. 


임시정부들의 통합의 전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 개의 임시정부들 수립 초에는 지리적 여건과 일제 때문에 곳곳에서 수립될 수밖에 없었지만, 3.1운동도 종막에 이르러 재정리하여 일원화돼야 하는 필연성은 각 임시정부의 당면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의회를 갖고 있던 상해와 블라디보스톡에서 통합을 추진하게 되었다. 


4월 중순 무렵에 한성정부 수립 선포와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직위에 따라 집정관총재사무소를 설치하고 활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상해, 노령의 두 정부가 아니라 3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다.


노령과 상해의 두 의회와 각처에서 발표한 행정부의 일원화 문제, 정부 소재지 문제 등이 난제였는데, 의회문제는 노령에 파견된 대표의 임석 하에 국민회의에서 의원 5분의 4가 상해 의정원에 편입한다는 조건으로 국민회의가 해산 결의하니, 상해의 임시의정원으로 단일화되었다. 그 후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⓵ 상해와 노령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절 해소하고 오직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인 것을 인정함이다.


⓶ 정부의 위치는 아직 상해에 둘 것이니 각지에 연락이 비교적 편리한 까닭이다.


⓷ 상해에서 설립한 정부의 제도와 인선을 작소한 후에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제도와 그 인선을 채용하여 상해에서 정부 수립 이래에 실시한 행정은 그대로 유효를 인정할 것이다.


⓸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 할 것이니 독립선언 이후에 각지를 원만히 대표하여 설립된 정부의 역사적 사실을 살피기 위함이다.


⓹ 현재 정부 각원은 일제히 퇴직하고 한성정부가 택선한 각원들이 정부를 인계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합의는 7월 초 전후의 일이었는데, 그에 따라 상해에서는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열린 제6차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임시 헌법개정안과 임시정부개조안을 상정하여 9월 6일에 모두 통과 확정했다.


그리하여 한성정부의 행정부를 정통화하고 합의사항도 있고 또 한성정부에는 의회가 없으니 상해의 임시 의정원이 새 헌법에 의한 입법부가 되어 임시의정원법도 개정하였다. 이제 정부는 하나가 되어 9월 11일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업무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국무총리 이동휘가 9월 18일 노령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여 이동녕, 이시영, 그리고 4월부터 상해에서 활약하고 있던 안창호와 더불어 11월 3일 내각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 신헌법 전문(前文), 임시정부 수립일 9·11인 이유 언급


국내의 전민족이 일으킨 3.1운동은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정리되면서 7개의 임시정부 수립이 공표되더니 결국 일원화되었다. 이것은 신헌법 전문(前文)에서 3.1운동을 다시 확인하고 “…민족의 항구 여일한 자유 발전을 위하야 조직된 대한민국의 인민을 대표한 임시의정원은 민의를 체(體: 체현)하야 원년 4월 11일에 발포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기본삼아 본 헌법을 제정하야…”라고 표현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상해 임시정부측에서 보면 헌법의 개정인데 위의 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 헌법을 제정”한다고 한 점은 통합의 성격 및 신헌법의 중요성과 아울러 임시정부의 개조 통합이 독립운동에 있어 그만큼 중요했던 당시의 사정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아진다.


이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당시에 정통성을 인정받았음은 물론 대한민국 헌법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는다는 그 임시정부인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그 통합 정부의 헌법이 공포된 9월 11일이어야 한다.



유광호 자유민주연구학회 회장 ⓒ 정상윤 기자.▲ 유광호 자유민주연구학회 회장 ⓒ 정상윤 기자. 역사를 제대로 기억로 기억하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역사왜곡인가? 이 무리수의 뒤에도 한국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 건국의 대표자 이승만 대통령을 어떻게든 지워보려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것일까?





유광호 자유민주연구학회 회장·사회학 박사


원문보기: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9/04/11/20190411000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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