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동중인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과 가족들이 중국 낙양(洛陽)에서

China, 1945

.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해체일시 1946년 6월.jpg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해체일시 1946년 6월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광복군의 조직을 찬성했지만, 한편으로 임시정부와 분열 상태에 있는 김원봉(金元鳳)계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이미 합동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의 성립전례를 가지고 우선적으로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발족일을 전후하여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 선전 전단 등이 배포되었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하였다.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취임했다.


광복군은 3개의 지대(支隊)로 편성되었다. 제1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 공진원(公震遠),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가 취임했다. 또 1941년 1월에는 제5지대가 편성되어 나월환(羅月煥)이 통솔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對日宣戰)을 정식으로 포고했다. 이를 계기로 분열상태에 있던 공산진영과 협업하는 작업이 추진되어 1942년 7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던 광복군은 1944년 8월에 임시정부로 이관되어 임시정부 통수부(統帥府)가 통할하기 시작했다. 광복 직전에는 한미합동작전으로 국내 정진대(挺進隊)를 편성하여 진격하려다가 출동 시기가 임박해 일제가 항복하면서 실현하지 못했으며, 해방 후 일부는 귀국했다.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의 창군과정에서도 주역이 되지 못하고 만주사관학교나 일본사관학교 출신들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1. 민족자긍의 단군기원(단기)을 다시 찾자

  2. 해방공간의 불꽃 격돌…‘승부사’ 이승만은 하지를 어떻게 눌렀나

  3. 1942년 1월 이승만박사 영어연설(by voice)

  4. 1947년 이승만 귀국 현장에 나온 김구… 원본 다큐 첫 공개

  5. [독도이야기] 對日 평화조약 발효 앞두고 '실효적 지배' 결단 내리다

  6. 박헌영의 최후

  7. 일 「위안부 급모」 광고 발견, 44년 매일신보서

  8. 일진회[ 一進會 ] Seoul, 1908

  9. 한반도의 운명은 30분만에 결정됐다

  10. 1943년 10월 5일,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야전연습 후, 북야영에서 촬영한 대원들 1 China, 1943

  11. 1945년 무렵의 제88정찰여단 대원들 China, 1945

  12. 안중근의 직계유족 상해시절 사진

  13. 한인국방경위대(맹호군)의 LA 스프링가 시가행진

  14.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광복군 창설 기념식이 끝난 뒤 오찬장에서 축사하는 김구 주석

  15. 중경에서 재건된 대한애국부인회 , 충칭[重慶] China, 1943

  16. 워싱턴,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협찬회. USA, 1944

  17.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해체일시 1946년 6월

  18. 1940년대 초 소련 제88정찰여단시절의 김일성과 중국인간부 시세영 China, 1940's

  19. 광복군 OSS특수부대의 창설과 배경

  20. 광복 당시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기념사진 1945

  21.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과 미국 OSS 대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 China, 194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Next
/ 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