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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직계유족 상해시절 사진





안중근의 직계유족 상해시절 사진.jpg




오른쪽부터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손자 웅호, 아들 준생, 손녀 연호와 선호, 안준생의 부인 정옥녀.


큰아들 분도는 12세 때 이국(異國)에서 세상을 떠났고, 김 여사는 이후 자녀들과 함께 상해로 옮겨 살다가 광복 후 귀국합니다.


안 의사의 둘째아들 준생은 1953년 무렵 세상을 떠났다. 준생은 부인 정옥녀 여사와 슬하에 1남2녀.


아들 웅호(雄浩·1932년생)씨, 딸 선호(善浩)·연호(蓮浩)씨입니다. 정옥녀 여사는 남편이 타계한 뒤 아들과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납니다. 안 의사의 유일한 손자인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의학박사가 되었고, 현재 샌프란시스코 인근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안중근의 직계후손은 미국에, 동생 정근의 직계는 남한과 미국에, 공근의 직계는 북한과 파나마에 흩어져 있다. 남과 북, 해외로 흩어진 그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안중근의 유해 발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 장남 분도는 日帝 밀정에 의해 독살당해


⊙ 차남 준생은 日帝의 연출에 의해 1939년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잘못 사죄


⊙ 동생 정근·공근은 독립운동 투신, 공근은 2차 대전 중 충칭(重慶)에서 의문死


⊙ 조카딸 안미생은 金九의 며느리 돼, 金九 암살 전 미국으로 건너가 소식 끊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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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안중근은 일찍이 16세의 나이로 아버지 安泰勳(안태훈)과 같이 동학군에 맞서고 난 이후, 중요한 家事(가사)와 國事(국사)를 아버지와 더불어 도모했다. 즉 그는 안태훈의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동지적 후계자와 비슷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난 이후 안중근 가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다. 여사는 의거 후 뤼순(旅順)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했으며, 안중근은 어머니가 보낸 한복을 입고 순국했다. <대한매일신보>(1910년 1월 29일)에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라는 기사를 실을 정도로 조마리아 여사에 대한 존경의 평판은 안중근의 순국 이전부터 있어 왔다.


광복 직후 기자가 안중근의 조카딸 安美生(안미생)에게 “(안중근이) 어디서 그처럼 끓어오르는 애국심과 놀라운 희생 정신을 받으셨을까요?”라고 묻자, 그녀는 즉각 “우리 할머니가 조마리아신데 女中君子(여중군자)라는 평을 들었던 분으로서 그 사상이 퍽 훌륭하셨답니다. 그 교육의 영향이 크리라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조마리아에 대한 이런 평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 진영에 두루 알려진 것이었다.


안중근의 의거와 순국 이후 가문과 독립운동가들이 북만주, 연해주, 상하이(上海)를 전전할 때, 조마리아는 독립운동 진영의 상징적 어머니였으며, 안중근 가문이 독립운동의 전선에 계속 나서게 하는 정신적 지주였다.


1927년 7월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가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나자, <조선일보> <중외일보>(1927년 7월 19일) 등 국내의 신문들도 그 소식을 전하며 애도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조마리아 여사의 묘를 찾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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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유일한 여동생 안성녀]


2005년 <국제신문> 취재진은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 교회묘지에 있는 한 묘지를 특종 발굴 보도했다.


“안누시아성여지묘”란 이름 이외에 출생과 사망연도도 기록되지 않은, 마치 白碑(백비) 같은 비석은 금방이라도 시멘트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갈 듯 훼손된 상태였고, 봉분도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한 듯 곳곳이 파인 채 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 10월 17일 필자가 찾아갔을 때 묘지는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었지만, 2평이나 될까 좁은 묘지에는 절을 올릴 공간마저 없었다.


이 비의 주인공은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여동생 安姓女(안성녀, 누시아)다. 그녀의 묘가 국내에 있는 것은 시댁 權(권)씨 후손 극소수만 알고 있을 뿐 안중근 가문의 유족 대부분이나 국가보훈처에서도 알지 못했다.


<국제신문>이 발굴한 안 여사의 외아들 權憲(권헌·1980년 사망)의 제적등본과 안 여사 후손들의 편지와 증언 등을 기초로 안성녀의 일생을 대강이나마 추적할 수 있다.


안성녀에 대해 가장 많은 증언을 남긴 사람은 여성 항일애국지사로 동지들과 함께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한 바 있는 며느리 吳恒善(오항선·1910~ 2006) 여사다.


그녀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소속 독립군 兪昌德(유창덕)과 결혼했으나, 남편 유창덕이 일본군에게 사살되고 난 이후 1935년 안성녀의 아들 권헌과 재혼했다. 오항선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으며, 2006년 사망했다.


그간 안중근 가문에 밝은 이들이나 인근 유족들에게도 안중근 의사에게 定根(정근)·恭根(공근)의 두 남동생 아래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며느리 오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안 여사는 1954년 4월 8일 향년 74세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것을 역산하면 안 여사의 출생연도는 1881년이 되는데, 이것은 “안 의사보다 두 살 어리다”는 평소 안 여사의 발언과도 일치한다. 즉 안성녀는 그간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안중근 의사의 바로 다음, 즉 정근·공근의 누님인 것이다.


안성녀는 부친 안태훈이 사망하는 1905년 이전 청계동 시절에 결혼했다. 남편은 權承福(권승복)인데, 안 여사가 “같은 고을(황해도 신천)에서 진사 집안끼리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가 시집갔다”고 말했다고 한다. 1910년 오빠 안중근이 순국하고 난 뒤, 안성녀 집안은 어머니 조마리아와 동생 정근·공근 등 친정 일가와 같이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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