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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운명은 30분만에 결정됐다 1.jpg

 

얄타: 8일간의 외교전쟁


세르히 플로히 지음|허승철 옮김|역사비평사

756쪽|4만5000원 




2차 대전 막바지인 1945년 2월 초 러시아의 흑해 휴양지 얄타에 미·영·소 수뇌가 모여들었다. 안전을 우려해 해외로 나가기를 꺼리는 스탈린 때문에 루스벨트와 처칠은 기꺼이 얄타를 회담 장소로 정하는 데 동의했다. 여행길은 모두에게 고달팠다. 이미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루스벨트는 독감에 시달리며 대양을 건넜고, 영국의 처칠 역시 갑작스러운 고열로 고생했으며, 스탈린은 기차로 사흘 밤낮을 달려 얄타에 도착했다.


하버드대 교수인 저자는 옛소련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후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정착한 역사학자다. 얄타회담은 공식 기록이 없다. 저자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와 각국 대표단의 기록을 바탕으로 세밀화를 그리듯 8일간의 회담을 치밀하게 복원한다. 회담에 동행했던 루스벨트의 딸 애나 베티거, 처칠의 딸 사라 올리버의 서신 등은 마치 회담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생생함을 준다.


그해 2월 4일부터 11일까지 8일 동안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은 각각 다른 희망과 계산으로 2차 대전 이후에 대해 논의했다. 세계평화기구인 국제연합 설립, 유럽 국경선 문제, 전쟁 배상금, 소련의 대일전 참전 등이 주제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운명도 얄타에서 논의됐다.


얄타회담 다섯째날인 2월 8일 오후 3시 30분, 스탈린은 극동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루스벨트를 만났다. 스탈린은 루스벨트가 소련의 대일전 참전 의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대가로 소련이 무엇을 원하느냐였다. 스탈린은 대일전 참전의 대가로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영토와 중국을 희생시키는 전략적 양보를 얻어냈다.





한반도의 운명은 30분만에 결정됐다 2.jpg

1945년 2월 9일 찍은 얄타회담의 대표적인 기념사진. 아랫줄 왼쪽부터 회담의 ‘3거두’인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은 갑작스러운 고열로 고생했고, 루스벨트는 독감에 시달리며 대양을 건넜고, 스탈린은 기차로 사흘 밤낮 달려 얄타에 도착했다. /역사비평사



루스벨트는 아시아에서 미국 주도의 새 질서를 만드는 데 스탈린이 협조해주기를 바랐다. 첫 의제는 한국이었다. 앞서 테헤란 회담에서 이미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가 논의됐다. 스탈린은 한국이 미국의 보호령이 되는 것인지, 한국에 군이 주둔할 것인지 물었다. 루스벨트는 둘 다 아니라고 답했다. 스탈린은 루스벨트가 제안한 신탁통치 기간 20∼30년에 대해선 짧을수록 더 좋다고 했다. 이날 회동은 30분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2010년 이 책을 출간한 후 한국 독자들에게서 얄타회담이 한국 분단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관련 문헌들을 다시 조사해봤고, 38선을 경계로 한 한반도 분단은 얄타회담에서 논의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얄타에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정확하게 입장을 정리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한반도 분할이 초래됐다고 썼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에 대해 한 번 더 언급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20세기 초 일본의 한국 점령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면서, "한국은 스스로를 지키기에는 너무 약했고, 어떠한 법이나 협정도 이 나라가 좀 더 강력한 이웃 국가에 의해 병합되는 상황을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루스벨트·처칠·스탈린 세 지도자는 얄타에서 각각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국제기구와 민주적 가치의 확산에 중점을 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구현을 추구했다. 반면 스탈린은 권력 이익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루스벨트는 유럽 너머를 봤다. 세계평화기구 창설, 유럽과 태평양에서 승리, 영국에 대한 미국 우위 확보를 꿈꿨다. 반면 처칠은 지중해 통제권과 동유럽의 독립을 통해 영국 안보를 지키고 소련이 유럽 대륙 전체를 석권하는 사태를 막으려고 했다.


이 회담에서 영·미가 한편인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하는 구도였고, 스탈린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에서 얻어낸 양보의 대부분은 루스벨트와 처칠이 공동전선을 형성했을 때 가능했다.


저자가 얄타회담의 현장을 치밀하게 그려가면서 보여주려는 큰 줄기는 '대가'다. 그는 얄타 이후 "유럽의 절반이 새로운 전체주의에 복속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세계는 곧이어 냉전에 휘말려 들어갔다"고 쓴다. 이 협상에서 가장 준비가 잘됐던 지도자인 스탈린은 동맹국 정부에 스파이를 침투시키는 등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의 게임을 진행했다.


저자는 책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어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어느 평화도 단막극이 아니다. 거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으며, 영웅이 있고 악당이 있다. 그리고 대가가 따른다. 얄타가 보여주듯이 민주국가 지도자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독재체제 및 전체주의 정권과 동맹을 맺는 데 따르는 대가가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11/20200411000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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