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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一進會 ] Seoul, 1908


일진회[ 一進會 ] Seoul, 1908.jpg



사진 1908년 12월 이용구의 집에서 촬영한 일진회 자경단 원호대 주구들, 일본인과 섞여있다.


1909년 12월 4일,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는 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황제와 총리대신, 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했다. 일본 정계에서 강제합병이 결정된 것은 그해 4월이었지만, '합방'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아(我) 황제의 만세 존숭(尊崇)하는 기초를 확고히 하며, 아(我) 인민의 일등(一等) 대우하는 복리를 향유하여 정치와 사회를 익익(益益) 발전하기로 주창하여 일대 정치기관을 성립할지면 우리 대한의 보호 열등에 재(在)한 수치(羞恥)를 해탈(解脫)하고 동등 정치에 재(在)한 권리를 획득하는 법률상 정합방(政合邦)이라….'('일진회 합방성명서', 1909.12.4.)


일진회는 1904년 12월 송병준이 이끄는 독립협회 계열의 유신회와 이용구가 이끄는 동학 계열의 진보회가 일본의 힘을 빌려 양반 중심의 내각을 타도하기 위해 결성한 정치단체였다. 회원 수가 12만여명에 달하는 최대의 정치단체(1908년 12월 이용구 집에서 기념촬영한 일진회 원호대 일동)였다.


일본 군부의 비호를 받던 일진회는 통감부의 지원을 받던 이완용 내각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전개했다. 민중의 권익을 대변하는 '민당(民黨)'을 표방한 일진회는 '양반 내각' '문벌 내각'을 상대로 한 권력 투쟁에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하자, 일본에 외교권을 영구히 양도하더라도 내각과 의회를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계략에서 '합방'을 청원한 것이었다.


일진회[ 一進會 ] 대표적인 친일매국단체


일제 시대 일본의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 단체. 러 · 일 전쟁 때 윤시병, 유학주 등이 만든 단체. 을사조약 체결 전에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주어야 복을 누릴 것이라고 주장함. 정미의병 때 봉기한 의병들은 일진 회원들을 죽이고 사무실을 파괴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후 해체되었다.


러일전쟁 전에 민영환의 사랑채 에서 무의도식하던 송병준은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이 되어 (舊)독립협회의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등이 1904년 8월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가 일본의 고문(顧問)정치로 대한제국의 강력한 친일적 민의(民意)를 강화하기 위해 8월 20일 일진회(一進會)로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하였다 .


이들은 4대강령 을 내세워 단발(斷髮)과 양복 차림으로 부일(附日)의 결심을 나타내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 동학당(東學黨)의 배반자 친일세력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가 같은 해 12월 26일에 통합하므로서 서울 지방에서만 기승을 떨던 친일세력이 전국 13개 도시에 널리 확대되어 13도 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 송병준(宋秉畯)이 취임했다가 1905년 11월에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洪肯燮)을 선출하여 일본인 고문 모치츠키 류타로(望龍太郞)와 함께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했다.


1905 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10일 전부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김으로 국가 독립를 유지하고 복(福)을 누릴 수 있다"라고 선언 한 후, 국채보상운동을 방해, 훼방하고, 1907년 5월 2일에 정부 탄핵 문제를 제출하여 정부를 맹공격하며 1907년 7월 18일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분노한 의병들은 일진회를 토살(討殺)시키고.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를 습격, 파괴하였다.






일진회.jpg




일진회[一進會] 1904∼1910 Korea


photographer Unidentified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암살하자 친일조직인 일진회는 순종에게 한일합방 안을 올리는 등 더욱 매국에 앞장섰다. 이 단체는 이용구(李容九)와 송병준이 일본군의 지원으로 막대한 자금을 받고 조직한 조선말기의 대표적 친일단체이다.


이들은 1905년 을사조약을 지지하고, 일본에 외교권을 넘길 것을 주장하며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는 등 망국적 행위를 일삼았다.


1904년 일본이 고문정치만으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친일적 민의(民意)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이던 송병준(宋秉畯)과 구(舊)독립협회의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 등이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8월 20일 일진회로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① 왕실의 존중, ②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③ 시정(施政)의 개선, ④ 군정(軍政) ·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단발(斷髮)과 양복차림으로써 부일(附日)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하게 서둘렀다.


처음에는 서울 지역만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에는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였으나 지방세력으로서 동학당(東學黨)의 친일세력인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와 같은 해 12월 26일에 합동하여 13도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評議員長)에 송병준이 각각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洪肯燮)을 선출하여 일본인 고문 모치츠키 류타로[望月龍太郞]와 함께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송병준 ·이용구 등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진회는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된 후 9월 26일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끝내고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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