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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해방공간의 불꽃 격돌…‘승부사’ 이승만은 하지를 어떻게 눌렀나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에 오랜만에 진실을 기초로한 글을 보았습니다.

"역사을 바라보는 것은 이런것이다"라는 느낌으로 박보규기자의 글을 옮깁니다]


하지 중장, 남한 통치자로 상륙

‘골칫거리 이승만’ 퇴출시켜야

신탁통치 구도에 좌우합작 지원


이승만 귀환, 하지 구상에 맞서기

군정의 소련과 합의 집착을 깨다

자유·반탁·반공으로 김구와 결속


2020년, 해방공간 갈등 재연되다

“미국 하수인 이승만”은 치사한 비방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광복 75돌 잊혀진 인물 ‘하지 미군정 사령관’을 찾아서 해방공간이 열렸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다. 정치 무대가 펼쳐졌다. 3년 뒤 다시 새 세상이다.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현대사의 상징적 순간들이다. 최후 승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그는 여운형·김규식의 중간파를 제압했다. 박헌영의 남로당도 눌렀다. 그와 김구의 관계는 협력과 견제다.



이승만의 최고 적수는 누구였나.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John Reed Hodge)다. 둘 사이는 갈등과 반목이다. 이승만의 성취는 하지를 압도한 덕분이다. 그것은 흥미로운 리더십 승부다. 8·15 전야다. 일본의 항복은 빨랐다.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위력이다, 9일 소련(현 러시아)군의 만주 공략, 이어 북한 진입. 미군은 서둘렀다. 남북분계선(38선)이 그어졌다. 하지 중장의 24군단은 오키나와에 있었다. “그 위치는 한반도로 빨리 이동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그가 남한 점령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차상철 『이승만과 하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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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26일 서울운동장(2007년 헐림)에서 열린 ‘하지 중장(가운데) 귀국 송별 시민대회’. 이승만 대통령(오른쪽)이 선창에 따라 두 손 들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왼쪽은 사회자 명제세(초대 심계원장). [사진 국사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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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회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운데 뒷모습)가 선물한 ‘일본도’(청산리 전투 전리품)를 하지 사령관이 들고 있다. 앉아서 지켜보는 이 대통령과 신익희 국회의장(오른쪽). 

왼편 마이크 앞은 이묘묵 통역관. [사진 국사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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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9월 8일 미 군함 카톡틴에 탑승, 인천항 상륙을 앞둔 24군단장 하지(가운데). [중앙포토]




야전 장군에서 ‘낯선 나라 낯선 임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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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 남아 있는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건물





그 무렵 이승만은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었다. 그는 구미(歐美)위원부(임시정부 대사관 역할)를 이끌었다. 그의 외교 독립운동 현장이다. 마지막 사무실(건평 60평, 2층)이 남아 있다(지금은 교회건물, 4700 16th St). 거기서 그는 일본 패망 뉴스를 들었다. 나는 그곳을 찾아갔다. 아무런 표식이 없다. 함께 간 교민 김진도씨는 개탄했다. “해외 항일 유적지인데 방치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는 잊혀졌다. 묘소만이 기억의 통로다. 나는 워싱턴 근처 알링턴 국립묘지(버지니아주)로 갔다. 하지의 묘소(Section 34, 157-A)는 평범했다. 알링턴의 40만 개 묘소 중 하나다. 묘비명은 간결하다. 대장(1952년 승진), 생존·사망연도(1893~1963), 1·2차대전 참전과 한국 근무만 표시했다. 그의 지위는 남한 주둔군사령관이다. ‘총독’ 같은 절대강자다. 그는 일본군을 무찌른 ‘태평양의 패튼 장군’이다. 삶의 여정은 독특하다. 비문은 그런 기록·평판을 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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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 묘지의 하지 비석. 뒤는 박보균 대기자





하지의 삶은 입지전적이다. 고향은 미국 중부 일리노이주 골콘다(Golconda). 작은 시골 마을이다. 그는 남일리노이사범대를 나왔다. 장교후보교육(OCS)생으로 임관(1917년)했다. 2차대전 때 과달카날·뉴기니 전투에서 승리했다. 역사학자 매트레이(James Matray)는 그를 추적했다. “하지는 무뚝뚝하며 직설적이다. 그는 행정·정치 경험이 빈약했다. 그는 한국 역사·문화에 대해 무지했다.”(『미국의 한국점령정책』) 하지는 전형적인 야전군인이다. 그의 새 임무는 낯선 곳의 낯선 일이다. 그것은 미군정의 어설픔과 혼란, 낭비를 예고한다.



24군단의 한국 상륙 직전이다. 미군 폭격기는 포고 전단을 뿌렸다. “미군에 대한 반란행위, 경거망동은 엄히 피함으로써···.” 문구는 고압적이다. 북한 주둔 소련 25군의 포고문은 현란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 역사학자 신복룡 박사는 “미군 포고문은 실망과 반발을 샀다. 

이미지 데뷔전에서 소련에 패했다”고 했다. 그의 첫인상은 엄숙하다. 짧은 머리에 선글라스, 파이프 담뱃대는 무뚝뚝함을 더했다.

 

그해 10월 16일 일흔의 망명객 우남 이승만 박사가 돌아왔다. 33년 만의 귀환이다. 국무부 방해로 귀국이 늦어졌다. 하지가 이승만을 소개했다.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닥터 리’(이승만 박사)와 ‘제너럴’(하지 장군)의 첫 만남이다. 그런 우호는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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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주역들인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하지(45년 11월 24일, 김구 귀국 다음 날). [중앙포토]



파란의 시작이다. 45년 12월 말 모스크바3상회의. 미·소·영국 외상(外相·외무장관)의 만남이다. 거기서 ‘4대 강국의 한반도 5년 신탁(信託)통치(trusteeship)’가 결정됐다. 이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다. 신탁통치는 2차대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식민지 해체 방식이다. 그 정책은 오만한 자비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한국인의 자치 능력은 부족하다. 신탁통치로 국가 운영 능력을 배양시켜 준다(존 빈센트 국무부 극동국장).”

 

한국인의 반응은 분노다. 백범 김구(임시정부 주석)는 결연했다. “탁치 분쇄는 새로운 독립운동이다.” 이승만(독립촉성회 의장)의 말은 실감난다. “미국인들이 필리핀을 신탁통치로 독립시켰다고 자랑하는데 우리는 4000년 역사다.” 인민공화국의 좌익은 찬탁으로 돌변했다. 박헌영이 앞장섰다. 그것은 평양의 소련군 지시다. 좌우 이념과 인물·세력 대치는 험악해졌다. 이승만과 김구의 결속은 단단해졌다. 둘의 공통점은 자유·반공·반탁·기독교 신자다.

 

1946년 3월 덕수궁. 미군과 소련군의 1차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반탁 인사의 배제 문제로 결렬됐다. 하지의 군정청은 타개책을 마련했다. 그것은 좌우 중간파의 합작이다. 그 세력이 주도권(입법의원 설치)을 잡도록 밀어주었다. 대상은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 인민당 당수. 그것으로 우익반탁(이승만·김구) 세력을 압박·위축시키려 했다.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의 회고다. “미군정은 당시로는 거금인 600만원을 지원해 주었다.”(심지연 『송남헌 회고록』)



신탁통치는 오만한 자비다

 

워싱턴(국무부) 해법은 소련과의 협력이다. 그 속에서 신탁통치→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이다. 하지의 군인정신은 명령 이행이다. 그는 ‘한국 알기’에 열중했다. 벼락공부로 한국의 정치문화는 알기 힘들다. 왕조사, 자립통치 경험, 주자학적 명분은 그에게 낯설었다. 해방공간은 미국식 정치 실험장이다. 정당·사회단체가 넘쳤다(당원 3명으로 정당 설립). 이승만은 그런 오판과 혼선을 깨려 했다. 그것은 국무부·군정에 맞선 정치 결투다.

 

북한의 소련 군정은 치밀했다. 평양 정치판의 평정은 신속했다.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그것은 사실상 단독정부 등장이다. ‘임시’ 간판은 위장이다. 소련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그는 북한 정국의 연출가였다. “북조선 공산당 결성, 신탁통치 찬성, 임시 인민위원회, 48년 남북 연석회의 등 모든 정치 과정 뒤에 소련 군정의 정치사령관 레베데프가 있었다.”(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46년 3월 처칠(전 영국총리)의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이 있었다. 그것은 소련 스탈린의 위성국 팽창 야욕을 고발한다. 이승만은 북한의 불온한 흐름을 간파했다. 46년 6월 그의 ‘단독정부론’이 나왔다. “북한에 사실상 정부가 선 만큼 남한도 자유정부 문제를 생각해야(정읍선언).”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의 지론은 이렇다. “단정론은 불가피한 현실적 대응이었다. 좌파진영은 그것을 이승만의 분단 책임론으로 교묘하게 왜곡했다.”

 

좌우합작은 흔들렸다. 중도파는 군정의 전폭적 후원에도 주춤댔다. 권력은 쟁취하는 거다. 이승만은 원조 정치9단이다. 그 노련함은 50년대 권력의 독주를 낳기도 했다. 정치는 용기와 기회 포착이다. 몽양(여운형)과 우사(김규식)는 결단의 리더십을 분출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이상과 열망은 좌절했다. 반면에 “이승만은 위기일수록 승부사적 면모를 보였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이승만은 46년 12월 워싱턴에 간다. 그것은 하지에 대한 경멸적 도전이다. 그 무렵 둘의 다툼에 불꽃이 인다. “이승만=제너럴, 입법의원 설치는 민족분열만 초래하니 취소하시오. 하지=나는 닥터 리의 집권을 허용할 의사가 전혀 없다.” 이승만은 군정의 ‘기피인물’이다. 그 의미는 정국 퇴출. 하지는 남한의 감독·통제관이다. 그해 말 그는 제임스 번스 국무장관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를 이끌려는 골칫거리(nuisance)다.”(『미외교문서 FRUS』)

  

‘원조 정치9단’의 대담한 도전

 

워싱턴에서 이승만의 직거래 돌파는 대담했다. “미군정은 공산당을 두둔한다. 남한에 과도정부 수립 뒤 남북한 자유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 국무부는 그것을 묵살했다. 담당자는 친(親)소련파 빈센트 국장. 하지는 ‘비합리적 장광설(tirade)’이라고 응수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 2차 회의가 열렸다. 미 군정청은 이승만을 가택연금했다. 그의 반탁·반소 신념 때문이다. 그곳은 돈암장이다. 집주인(광산업자 장진섭)은 불안했다. 방을 빼달라고 했다. 8월 말 이승만은 마포장으로 옮겼다. 돈암장은 남아 있다(등록문화재). 미·소공동위는 다시 표류했다. 좌익은 이승만을 ‘독선·아집’이라고 비난했다. 좌익 내부의 분열도 심각했다. 박헌영은 집요하게 여운형을 견제했다.

 

미국의 기류가 변한다. 트루먼 대통령의 독트린(소련 봉쇄)이 나왔다. 국무부의 장관·극동국장이 교체됐다. 미국은 한국에서 ‘명예로운 철수’를 모색했다. 전쟁부(육군부)가 앞장섰다. 그해 8월 소련은 미·소공동위 참석을 거부한다. 거대한 전환점이다. 9월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다. 두 달 뒤 유엔 결의다. “유엔 감시 아래 자유선거로 통일정부를 세운다.” 이승만은 “가장 큰 장애물이 걷혔다”고 했다. 그것은 하지와의 결전에서 승리다.  

 

문재인 정권에서 이승만의 서사는 고난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하수인”이란 프레임이 작동한다. 그것은 치사한 비방이다. 진실은 반대다. 그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성취는 저항의 결실이다.

 

하지는 왜 패배했나. “미국이 제안·추진했던 한반도 신탁통치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워싱턴의 일관성 없는 정책의 희생자다.”(차상철 『해방전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 귀국한 하지의 회한이다. “내가 민간인이라면 1년에 100만 달러를 준다 해도 이 직책(군정 사령관)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에게 ‘청산리 전투 전리품’ 일본 단도 선물…“정부수립=항일독립의 완결 의미 공유”


1948년 8월 26일 서울운동장(옛 동대문구장, 2007년 헐림). ‘남한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 송별 시민대회’가 열렸다. 정부 수립 11일 후다. 이승만 대통령의 말은 격찬이다. “오늘날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하지 중장의 공로다.” 둘 사이의 불화가 씻기는 듯했다. 이범석 국무총리의 선물은 인상적이다. 일본도 한 자루다. 명품 단도인 ‘호쇼사다무네(保昌貞宗)’(13세기 제작). 이범석은 청산리 전투(1920년) 영웅이다. 거기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때 노획한 전리품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항일 독립의 완결이다. 하지에게 준 선물은 그 역사적 의미의 공유다(역사학자 신복룡 박사).”

 


하지의 답사다. “한국민들이 정부 수립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한 것에 만족하고 미군 장병들이 그것을 원조하는 데 성공한 것에 만족한다.” 다음 날 27일 하지는 한국을 떠났다. 그의 남한 3년은 독신생활이다. 이묘묵(하지 통역관)씨의 이야기다. “하지 장군은 본국에 부인과 따님 한 분이 계셨는데 일에 지장이 될까 봐 데려오지 않았다(한성일보, 48년 8월 25일).”

 


하지의 귀국 1년10개월 뒤다.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제 그는 한국 사정에 정통하다. 태평양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그(5군단장)를 부르지 않았다. 이승만과 하지의 과거 대립 때문이다. 하지는 3군사령관·지상군 사령관(대장 진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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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지 장례식



53년 6월 예편. 1963년 11월 그는 워싱턴의 월터리드 군병원에서 숨졌다(70세). 장례식은 알링턴 국립묘지(버지니아주)에서 열렸다(사진·중앙포토). 여섯 마리 말의 운구 마차가 4성 장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김정렬 주미대사(원 표시·전 국무총리)가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 후 하지는 역사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워싱턴·버지니아(미국)=글·사진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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