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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령(金大領: 인식론∙역사 연구가/저자/칼럼니스트)
University of Maryland 역사학과 졸업 (B.A.)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 (M.A., Ph.D.)
.
[5.18 역사 관련 주요 저서]
『역사로서의 5.18 전4권』(비봉출판사, 2013)
−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비봉출판사, 2013)
−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비봉출판사, 2013)
−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의 비화들』(비봉출판사, 2013)
− 『5.18재판 법리의 모순』(비봉출판사, 2013)
『임을 위한 행진곡』 (2015)
『문재인의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Gwangju Uprising Overthrown by Moon Jae-in's 5.18, 아마존, 2018)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 아마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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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사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면 1980년의 시대 상황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1975년의 월남의 패망이 지금은 아주 먼 과거 사건이지만 1980년 봄에는 불과 5년 전 사건이었다. 월남 대통령은 월맹군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시민군에 항복하였다. 월맹군은 1973년의 파리강화조약 때문에 공개적으로 남침할 수 없었다. 만약에 월맹군의 남침 증거가 발견되면 미국은 월맹을 초토화시키는 폭격을 할 것이었다. 그래서 1975년 3월에 월남 중부 지방에서 시민군을 조직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게 한 후 먼저 다낭 일대를 점령하고, 수도 사이공을 향해 진격하게 하였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원래 계획대로 5∙18을 재조사한다면 조사 대상 중의 하나가 시민군들 중에 북한군이 섞여 있었는지의 여부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시민군들 중에 북한군이 없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국회의원이라도 북한군 개입 사실을 언급하다가는 의원직이 취소될 수 있는 곳이 한국이다. 1975년 봄에 (베트콩이 많이 섞여 있었던) 시민군들 중에 북베트남군이 없다는 좌익 언론의 주장이 우세하였다. 그래서 좌익 언론만 믿은 월남의 군인들은 시민군과의 전투를 거부하였다가 월남의 패망 후 시민군의 포로가 되어 처형당했다.

   1975년 3월 31일 월남 대통령, 즉 월남의 국군통수권자는 월맹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시민군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평화의 이름으로 항복을 정당화하였다. 월남은 세계 4대군사강대국 중 하나였고, 월남 시민군들 중 태반은 군화조차 지급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그럼에도 막강한 무기를 보유하였던 월남군이 총 한 방 쏴 보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그런데 만약 당시 월남 좌익 언론의 보도대로 정말로 시민군들 중에 북베트남군(혹은 월맹군)이 없었다면 어째서 월남 정부가 시민군에 항복한지 불과 2년 만에 월남이 월맹 공산정권에 완전 흡수되었는가?

   지금 문재인이 사노맹 선전 총책이었던 조국을 법무장관으로 임명하려 하고 있다. 사노맹은 1990년경의 남한 공산당 명칭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의 약자이다. 사노맹은 각종의 유인물과 책자, 월간지 "노동해방문학" 등을 통해 노동자 중심의 민중통일전선 형성→노동자 전위당 결성→무장봉기를 통한 혁명→민중공화국 수립→자본주의 철폐 및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세웠으며, 출판사 노동문학사를 설립, 1989년 4월~12월까지 15만여 부의 책자를 발간했다.

   아마 대다수의 신세대 독자들은 조국이 1990년대 초에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을 선동했다는 것이 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신세대 독자들은 백태웅과 조국 등 한 무리의 20대 청년들이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을 일으키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지금 문제 삼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백태웅과 조국과 박노해 등 사노맹 핵심 간부들도 그렇게 생각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그들의 이론에서는 무장봉기를 통한 사회주의혁명이 쉽게 성공하게 되어 있었다. 최근 문재인이 조국을 법무장관으로 지명한 후 김진태 의원이 조국이 사노맹 출신임을 들먹이자 조국이 20 대 청년의 뜨거운 가슴이 있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조국에게 그때 뜨거운 가슴이 있었든 없었든 사노맹에는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 이론이 있었다. 지난 여름에 조국이 반일을 선동하였을 때 괜히 그의 입에서 죽창을 들자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사노맹이 한 일이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 준비였다. 

   조국이 20대에 뜨거운 심장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심장은 중남미의 공산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를 뜨겁게 숭배하는 심장이었다.  지금 문재인 정권이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역사적 뿌리가 있다. 한국의 운동권은 공산당 계열이었으며, 그래서 체 게바라의 책들은 운동권의 필독서였고,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월맹의 호지명과 더불어 한국 운동권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체 게바라가 인솔한 혁명군이 바로 시민군이었다. 공산당 혁명이론에서는 공산당이 시민군을 조직하여 정부군과 싸우면 민중은 시민군 편을 들게 되어 있다. 그 한 예가 1950년대 후반의 쿠바 혁명이다. 1950년대의 쿠바는 미국의 도움으로 잘 사는 나라였으며, 미국 정부가 쿠바 정부를 지원하고 있었다. 카스트로의 군대는 반정부 시위대로 구성된 소수의 시민군 병력이었다. 그러나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하면 더 잘 살게 해주겠다는 말로 선동하며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자 카스트로가 최악의 독재자로 군림할 것을 전혀 내다보지 못한 쿠바 국민들이 시민군을 지지하였으며, 미국도 민간인 희생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기에 쿠바 정부를 지켜줄 수 없었으며,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은 완성되었다.

   오늘날의 중국군도 그 출발은 모택동의 소수의 시민군이었다. 시민군을 인민군이라고 불렀는데, 첫 출발은 소수의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인민군의 선동선전술이 먹혀 중국 인민들, 특히 농민들의 지지를 받자 장개석 총통의 국부군의 어이없게 무너지고, 모택동이 중국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도 그 출발은 레닌이 인솔하는 소수의 학생들과 청년들이었다. 처음에는 극소수의 무장봉기가 제정 러시아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것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1970년대의 세계는 지금의 세계와 전혀 달랐다. 그때는 지구촌 곳곳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던 때였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광주무장봉기와 사노맹 사건을 살펴보아야 한다. 

   혹 어떤 독자들은 필자가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 호칭하지 않고 광주무장봉기라고 호칭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항의는 조국에게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조국이 한창 사노맹 활동을 하였을 때 백태웅 등 조국 일당은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 호칭하지 않고 광주무장봉기라고 호칭하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현 하와이대 교수인 백태웅은 조국의 서울대 법대 1년 선배였으며, 사노맹 총책이었으며 조국을 사노맹 후계자로 양성하였다.1) 백태웅은 사노맹 사건과 관련하여 지금도 조국을 비호하는 글을 종종 언론에 기고하고 있다. 사노맹이 무장봉기로서의 제2의 광주사태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광주사태에 대한 이론은 사노맹 세포 학습에서 아주 중요하였다. 그러한 때에 백태웅은 사노맹 월간지에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이란 제목의 논문을 기고하였으며, 백태웅의 논문 이론을 선전하는 것이 조국의 역할이었다. 이 논문 큰 제목 ‘Ⅱ. 광주에서 벌어진 '무장봉기'의 전모’ 이하 중간제목 ‘3. 항쟁인가 무장봉기인가?’에서 백태웅은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호칭하지 않고 광주무장봉기라고 호칭하는 사노맹의 입장을 이렇게 피력한다:

3. 항쟁인가 무장봉기인가? 

   광주의 80년 5월은 '민중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과연 우리가 광주를 '민중항쟁'이라고 부르는 것에 머물러도 좋은가? 
    반동부르주아지들은 광주무장봉기의 이름을 '사태'라고 불러왔다. 그들은 일체의 민주화 요구의 의의를 부정했다. 오로지 폭도들의 난동이라는 시각을 강요해왔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주의적인 보수야당과의 절충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민주화운동'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합의를 도출해 냈다. 
  ' 광주민주화운동'이라? 이 말에는 민중이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를 아예 언급조차 하기 싫어하는 부르주아계급의 위선이 숨어 있다. 그들은 '무장'의 문제에 대한 태도는 아주 빼버림으로써 광주봉기의 혁명적 의의를 삭제해 버렸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비열한 의도에 쐐기를 박기 위하여 '민중항쟁'이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광주의 민중은 분명히 '항쟁'하였다. 그러나 과연 광주의 노동자와 혁명적 쁘띠부르주아지의 무장부대는 계엄군의 만행에 못이겨 들고 일어난 단순한 '저항부대', '정당방위대'였는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대로 욱하는 심정으로 무장을 한 '선량한' 폭도였는가? 
   광범위한 민중이 처음 시위에 찬가하게 된 계기는 분명 단순한 분노와 생명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무장이었다. 그러나 계엄군의 발포를 받으면서 광주민중은 이미 파쇼권력과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을 확인하였다. 민중의 군대하고 선전해 오던 국군이 민중의 가슴에 총탄을 쑤셔박고, 민중의 정부와 관리라는 자들이 민중을 저주하여 죽음의 구렁텅이로 나날이 몰아넣는 것을 본 순간부터 민중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민중은 혁명군대가 되고 혁명적 봉기부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봉기를 '민중항쟁'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이 표현은 민중이 무엇을 위해 투쟁했고 무엇을 귀하여 죽음을 달게 안아 들였는지를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무장을 통하여 권력을 탈취하고자 하는 시도, 낡은 권력을 깨뜨리고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고자 하는 광주민중의 영웅적 투쟁의지를 살려야 한다. 
'광주민중항쟁'이라는 표현을 굳이 고집한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측면을 정면으로 옹호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무장봉기'하는 규정은 광주민중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명칭이다. 광주 민중은 민주주의를 위한 '압력'을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도'하기 위해서 총을 들었다. 그것은 '시민항쟁'의 차원을 넘어서서 '반란'이요 '혁명'이며, '주권탈취'의 한판 싸움이었다. 
   광주의 민중은 '비굴한 타협'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총공격'의 신명나는 한판을 벌였다. 그것은 '실패한 무장봉기'였다. 만약 광주지역의 승리가 전남 전체지역의 승리로 그리고 나아가 전국적 승리로 되었다면 위대한 민족민주혁명의 성취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처절하게 참혹한 실패를 정확하게 배우고 새로운 혁명의 첫걸음을 열기 위해서도 우리는 광주를 '무장봉기의 도시', 권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민중이 직접 소유한 소중한 경험을 가진 '혁명의 도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광주의 명칭을 회복할 것은 강력히 제안한다! 명칭을 회복할 때에만 광주봉기의 의의와 한계를  노동자 계급의 관점에서 철저히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명칭을 회복해야만 모든 영역에서의 기회주의적 관점과 철저히 투쟁할 수 있다. 명칭을 회복해야만 광주문제에 대한 적당한 타협선을 찾는 자유주의자들의 잘못된 시각과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그날의 투쟁을 '광주민중무장봉기'하고 부르자! 칼날처럼 곤두선 그날의 구호처럼 우리의 문제의식도 예리하게 같아서, 총을 든 것을 '무장'이라 하고, 적을 향하여 투쟁에 떨쳐 나선 것을 '봉기'라고 부르자!   (백태웅) 2)



백태웅이 논문 형식으로 기고한 기고문 중 위의 인용문 요지는 셋째 단락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라? 이 말에는 민중이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를 아예 언급조차 하기 싫어하는 부르주아계급의 위선이 숨어 있다. 그들은 '무장'의 문제에 대한 태도는 아주 빼버림으로써 광주봉기의 혁명적 의의를 삭제해 버렸다. 

사노맹의 전신이 전민노련이요, 1980년 5월 전민노련은 서울에서 청와대와 중앙청과 방송국을 점령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킬 음모(일명 김대중 내란음모)를 추진하고 있었다. 제2의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이 사노맹의 목표였으므로 백태웅은 무장봉기의 사실을 감추는 명칭 ‘광주민주화운동’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광주무장봉기 당시에도 민주화운동이란 단어나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음을 사노맹 총책 백태웅은 잘 인지하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註釋:


1) 백태웅은 2000년에 미국 노틀담 법대 인권센터에서 미군에 학살 누명을 씌우는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은 후 하와이대 교수가 되었다. 백태웅의 논문 제목은 "동맹군의 전쟁 범죄: 노근리 양민학살"이었다. 백태웅이 미군에 양민 학살 누명을 씌운 노근리 사건의 진실은 이것이다. 1950년 7월에 대한민국 임시수도 대구를 점령할 전략적 요충지라 북한군이 흰색 한복을 입고 한복 속에 총을 감추고 침투하고 있었다. 백태웅이 사실을 왜곡하는 제목과 달리 그때는 아직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지기 몇 년 전이었다. 6.25전쟁 초기에는 아직 주한미군이 없었고, 일본에서 아직 본국으로 귀국을 안한 일본 미군정 행정병들이 갑자기 한밤중에 비상 소집되어 한국 전쟁 최전선으로 파병되어 임시수도를 몸으로 방어하고 있었던 때였다. 9월에 미국 본토 병력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미군 병력은 주일미군(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미군정 행정병들)이었다. 노근리 전투는 한국의 임시수도를 결사적으로 사수하던 미군들이 한복 입은 피난민으로 위장하고 소매 속에 총을 감춘 북한군 총탄에 희생된 사건이었다. 미군에 양민학살 누명을 씌우는 사노맹측 반미 주장에 대한 보다 상세한 반박은 김대령의 2003년 역사 에세이 "노근리 미군은 양민 학살범인가 자유의 용사인가?" 참고.

2) 백태웅과 조국 등 사노맹이 쓰던 용어에서 '민족민주혁명'이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혁명을 의미한다. 공산당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침투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중간 단계가 '민족민주혁명'이었으며, 민족민주혁명은 반미 혁명과 사실상 동의어였다. 공산주의혁명 전략 용어인 '민족민주혁명'을 영어로 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이라고 하며, 이들에게 반미와 자주는 동의어였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타도와 반미는 이들에게 동의어로 쓰였다. 반미 국가가 되어 북한처럼 소련과 중공 등 공산진영에 편입되는 것을  '민족민주혁명'이라고 하였다. 한국 운동권이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민족민주혁명'이란 의미로, 즉 자유민주주의를 타도하자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백태웅과 박노해는 1989년 2월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할 노동자당을 결성키로 하고 민족민주혁명론(NDR) 추종자들을 모은 뒤, 같은 해 11월 서울대에서 열린 전노협 주최 건국노동자대회에서 사노맹 결성을 공개 선언했다. 그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지금 사노맹 선전선동책 조국이 대한민국 청와대 민정수석을 역임한데 이어 법무장관으로 지명된 것이 얼마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위협적인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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