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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령(金大領: 인식론∙역사 연구가/저자/칼럼니스트)
University of Maryland 역사학과 졸업 (B.A.)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 (M.A., Ph.D.)
.
[5.18 역사 관련 주요 저서]
『역사로서의 5.18 전4권』(비봉출판사, 2013)
−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비봉출판사, 2013)
−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비봉출판사, 2013)
−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의 비화들』(비봉출판사, 2013)
− 『5.18재판 법리의 모순』(비봉출판사, 2013)
『임을 위한 행진곡』 (2015)
『문재인의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Gwangju Uprising Overthrown by Moon Jae-in's 5.18, 아마존, 2018)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 아마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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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은 광주사태가 끝난 지 8년 후인 노태우 정부 시절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광주사태’가 광주사태의 공식 명칭이었다. 지금은 5∙18과 광주민주화운동, 즉 광주사태는 한국에서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5∙18이 광주사태를 상징하는 숫자가 될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만약 광주사태가 1980년 5월 18일 발생하였다는 주장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한승헌, 이해찬, 한화갑, 민병두, 유기홍, 김대중, 김홍업 등 광주사태 발생 사흘 전에 서울에서 국가 전복을 시도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주동하였던 자들이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고 보상금을 받을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가짜 5.18 유공자 이해찬


   광주사태를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5∙18이 광주사태의 상징적 숫자가 되게 하는 것에는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진행된 김대중의 내란을 감추는 효과가 있다. 한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세력이 조국이 연루된 1980년대 후반의 사노맹 사건 때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미 1970년대 초부터 굵직한 시국사건은 그 배후 및 주동자들이 사회주의 혁명 세력이었다. 광주사태에는 제2의 민청학련 사건 성격이 아주 강하게 있다.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중 여러 명이 2년 후인 1976년경부터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에 흡수되었고, 1979년에는 민청협으로 명칭을 바꾼 민청학련이 <남민전> 세력과 결탁하여 부마사태를 일으켰고, 부마사태의 한 결과로서 10.26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그 틈을 타서 김대중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시도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부터 줄곧 계속되었다. 민청학련 사건 등 1970년대의 시국사건 관련자들이 최규하 대통령의 1980년 삼일절 사면 복권 조치로 복학하자마자 김대중의 사조직에 흡수되어 전국규모의 민중봉기를 기획한 것이 광주에서만 발발한 사건이 바로 광주사태였다. 


   문재인의 애창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황석영이 광주 친구 박형선의 요청으로 그의 여동생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바친 노래였고, 함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공모하였던 박형선의 매부 윤한봉 등 여러 명은 광주사태 당시에는 아무런 역할을 한 것이 없었지만 광주사태 발생 6년 전인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들이었다는 것 덕택에 5∙18 유공자로 인정받고 보상을 받았다. 조국의 사노맹의 사회주의 모델은 소비에트 사회주의이고, 소비에트는 프랑스어 꼬뮌(Commune)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단어이다. 사노맹 등 남한 꼬뮌주의의 원조 김남주는 1976년부터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전사로서 ‘꼬뮌주의 지하 혁명활동가 그룹’ 원조였다는 것 외에는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5∙18 묘지 구묘역에 안장되었다.

   민청학련 사건 때 검찰관의 유인태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 제371~ 372면에 보면 의도적으로 유혈사태를 유발시키려는 민중봉기 음모가 1980년의 광주사태 때 처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보다 6년 전인 1974년 봄에 그런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가 막 시도되기 직전 발각되었다.

문: 피의자는 현 정부를 어떠한 방법으로 타도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가요? 

답: 학생 데모를 선도로 하여 민중봉기를 일으켜 현정권을 타도함에 있어 우선 유신체제와 정부의 시책을 비민주적인 독재정권으로 단정하고 자원파동에 따른 국내경제에 곤란 등을 전부 현정부에 실책으로 선전하여 “민주회복” “민생고 해결” 매판자본 배격 등의 명분을 내세워 학생과 일반대중을 선동하여서 반정부적 세력을 규합하여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봉기, 시위를 전개하고 이를 저지하는 대항세력인 경찰들에게 준비된 화염병, 돌멩이, 각목 등으로 대항함으로써 유혈사태를 유발시키면 폭도화된 시위군중으로 하여금 파출소, 경찰서 등을 위시한 중앙청 청와대 등의 주요한 정부기관을 강점하여 정부를 타도시킨 다음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학생과 사회일부 불순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지도부를 결성하여 노동자 농민을 위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므로 결국 폭력혁명 수단의 방법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위에 인용된 1974년의 유인태의 진술을 보면 그 해의 민청학련의 폭력혁명 음모가 6년 후의 광주사태 전개과정과도 흡사하고, 광주사태 발생 사흘 전에 <사노맹>의 원류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약칭, 전민노련)이 서울에서 시도하였던 폭력혁명과도 너무도 유사하다. 폭도화된 시위군중으로 하여금 파출소, 경찰서 등을 위시한 중앙청 청와대 등의 주요한 정부기관을 강점하여 정부를 타도시키려 했던 것은 광주사태와 흡사하고,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학생과 사회일부 불순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지도부를 결성하여 노동자 농민을 위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저”하였던 것은 김대중의 내란음모에서 폭력 역할을 담당했던 <전민노련>이 시도했던 것과 흡사하다. 

   첨언하면, <전민노련>의 공식명칭은 ‘민주’라는 단어가 들어간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었지만 <전민노련>의 ‘민주’는 ‘자유민주’에 반대하는 ‘사회민주’였다. 광주사태 주동자들 역시 ‘사회민주’ 혹은 북한식 ‘민족민주’라는 의미로만 ‘민주’라는 단어를 사용했었다. 

   무려 5만명이 동원되었다는 1980년 5월 15일 서울 도심지에서의 대규모시위에는 ‘서울역 회군’이란 명칭이 붙어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서울역 회군’이란 한국 역사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연상시키는 용어이다. 고려 말기 1388년(우왕 14) 음력 5월, 요동 정벌차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 이성계가 개경(開京)으로 회군 (回軍)한 사건이다. ‘위화도 회군’의 결과 고려왕조가 붕괴되고, 이성계가 새로 건국된 나라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큰 사건이었다. 사실 ‘서울역 회군’은 ‘위화도 회군’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원하지 않아 자의로 회군했던 것에 비해 <전민노련>과 <민청협> 등 5월 15일의 대규모 시위 주동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의 청와대 정벌을 원했다. 그러나 청와대를 점령하고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에 뜻밖에도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시위대 해산을 공고하여서 무산되었기에, 이를 ‘서울역 회군’이라 명명한 것이다.

   겉으로 학생시위로 포장된 5월 15일 시위에는 이처럼 <전민노련> 등 불순세력이 개입하여 차량 테러를 지원하였다. 그 날의 폭력시위대에 의한 차량 테러의 한 예가 바로 문재인이 인솔하던 경희대 시위대가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과속으로 몰며 뒤에서 덮쳐 사망케 한 사건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전민노련> 중앙위원장이었던 이태복이 훗날 김영삼 대통령 정부 시절에 브래들리 마틴 기자에게 한 증언에 따르면 윤상원은 5월 18일에 우발적으로 광주사태를 주동하였던 것이 아니라, 이미 사흘 빠른 5월 15일에 서울에서 먼저 정부청사와 방송국을 점거할 준비를 착착 진행해 놓고 있었다. 역시 광주 출신인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그 계획에 협조하지 않고 그 날 저녁에 서울역광장에서 시위대 해산공고를 하였기에 무산되었음을 전화로 윤상원에게 알려주자 그는 왜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쳤느냐며 몹시 분개했다.

   이처럼 ‘서울역 회군’과 광주사태 사이에는 광주운동권 윤상원이란 연결고리가 있다.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 기자가 1993년에 이태복으로부터 이 중요한 증언을 듣고 메모해 두었다가 7년 후에 “동지들의 눈에 비친 윤상원”(Yun Sang Won: The Knowledge in Those Eyes)이란 제목의 기고문에서 이 일화를 기록하였을 때에는 영어로 간단하게 썼지만, 그 줄거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데모대는 향후 행동방침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차를 보였다. 
이태복의 그룹은 방송국 등 서울 중심부의 핵심 거점 점거를 바랬다. 그러나 다수파는 5월 16일에는 데모를 중지하고 정부의 반응을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윤상원은 이 말을 듣고 서울에서의 패배를 격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이태복이 전해준 말이다.
이태복과 윤상원의 조직은 광주사태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주요 사건들에 깊이 이처럼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Martin 2000, 98; 블레들리 마틴 1997, 149).
(The demonstrators differed on what to do next. Lee Tae Bok's group wanted to occupy key points in the central area such as broadcasting offices. ¬The majority, however, decided to call off the demonstrations on May 16 and wait to see the government’s response. “Mr. Yun, when he heard of this, vehemently criticized the defeat in Seoul,” Lee Tak Bok told me.
Lee and Yun’s organization thus was deeply involved in key events leading up to the Kwangju incident itself (Martin 2000, 98).1

   광주운동권 윤상원의 조직 <전민노련>이 서울에 있었다. 마틴 기자의 기사에서 “광주사태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주요 사건들”이란 이른바 ‘서울역 집회’ 등 광주사태 발생 이전에 발생한 사건들을 지칭하며, 또 그 사건들이 광주사태와 인과관계가 있었다는 말이다. 광주사태는 홀로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광주사태로 치닫는 주요 사건들이 있었다. 

   마틴이 ‘서울에서의 패배’(the defeat in Seoul)라고 표현한 사건은 ‘서울역 회군’을 지칭한다. 윤상원과 이태복의 목표는 대중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구 청와대 위치는 서울역에서 가까웠다. 최규하 대통령 중동 순방을 틈타 청와대를 점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데모대가 해산한 것은 윤상원과 이태복에게는 사회주의 혁명 좌절을 의미한 것이었고, 이태복의 전언으로 그 사건을 전해 들은 마틴은 그 상황을 ‘the defeat in Seoul’이란 말로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1996년 월간『사회평론』김진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태복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심재철이 해산을 결정하였을 때 이태복은 격렬히 반대했다: “우리는 서울역 철군을 반대하다가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했어요. 만약 회군하지 않고 중앙청이라도 점거를 했더라면 군사정권으로 가기는 간단치 않았을 거예요” (김진아 1996, 80).

   위에 인용된 이태복의 증언에서 서울역 철군을 반대했던 <전민노련> 노동자들이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지원하는 간첩들이 시위대에 많이 섞여 차량 테러 등 폭력시위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 중에 학생이 아닌 불순세력이 끼어 있어 보인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전민노련> 자체가 학생 단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자 단체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결성된 <전민노련>이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순방을 기회삼아 청와대와 정부청사를 점령하려는 어마어마한 음모를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마사태의 한 배후였던 윤상원과 이태복이 원래 계획했던 광주사태는 서울, 부산, 마산, 광주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전국 규모의 사태였다. 두 사람의 사회주의 혁명가 윤상원과 이태복이 전국 규모의 민중봉기를 주도하기로 한 사전 합의가 있었음을 이태복은 마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광주가 아닌—부산, 마산, 그리고 서울 등지에서 열렬한 대중적 저항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우리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대중적 저항이 전개되면 최후까지 투쟁하여 80년대를 이끌어갈 운동역량을 키우자고 다짐했습니다 (블레들리 마틴 1997, 149). We expected that Pusan, Masan, and Seoul would be the hot spots for popular resistance—not Kwangju. We agreed that when the coup happened and massive resistance developed, we would fight to the end so the movement could grow up through the 1980’s (Martin 2000, 98).

   위의 이태복의 말을 영어에 능통한 미주 한민통(조총련 산하단체) 요원이 마틴에게 영어로 통역하여 주었을 때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뉘앙스가 있다. 이태복의 말 중에서 ‘운동역량’이라는 용어는 주로 북한의 대남공작 용어로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면 이태복은 누구한테서 이런 용어를 듣고 자기 입에 담게 되었는가?

   윤상원과 더불어 부마사태를 일으키는 공작을 하였던 이태복이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사태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했을 때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이 말은 부마사태보다 훨씬 더 큰 사태가 부산과 마산과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하려는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문재인이 노무현 정부 민정수석이었을 때 처음 시작된 부산저축은행 대형금융비리 사건은 부산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박형선 등 광주의 사회주의 혁명가 그룹(광주일고 출신들로 구성된 노사모 간부들)이 일으켰다. 부마사태도 그 배후에 광주의 사회주의 혁명가 그룹이 있었다. 부마사태는 YH 여공 김경숙 양이 마산 신민당 당사 창문에서 뛰어내린 자살 사건이 그 도화선이었는데, YH 노조위원장 김경숙이 경상도 부산이나 마산 여성이 아니라 전라도 광주 여성이었다. 광주사태에는 이처럼 5월 18일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여러 역사적 뿌리들이 있었을 때 광주사태가 5∙18이란 숫자로 상징되고 대표되는 것이 과연 충분히 합리적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註釋:

  1) 본 아티클에 약식으로 표시된 출처의 자세한 출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 (Google Play) 혹은 임을 위한 행진곡 (Google 도서) 422쪽 이하 참고문헌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2) 이태복 등 당시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했던 자들을 운동권이 과격파 혹은 매파로 분류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이태복 등 전민노련 소속 노동자들을 학생 신분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학생 운동권 분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는가? 더구나 전민노련은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청와대와 정부청사를 점거하려 하였던 것이므로 온건파 대 과격파 식 분류 대상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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