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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령(金大領: 인식론∙역사 연구가/저자/칼럼니스트)
University of Maryland 역사학과 졸업 (B.A.)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 (M.A., Ph.D.)
.
[5.18 역사 관련 주요 저서]
『역사로서의 5.18 전4권』(비봉출판사, 2013)
−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비봉출판사, 2013)
−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비봉출판사, 2013)
−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의 비화들』(비봉출판사, 2013)
− 『5.18재판 법리의 모순』(비봉출판사, 2013)
『임을 위한 행진곡』 (2015)
『문재인의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Gwangju Uprising Overthrown by Moon Jae-in's 5.18, 아마존, 2018)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 아마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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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제 대기자는 광주사태에 대한 그의 주장 때문에 종종 애국 국민들에게 그가 이른바 ‘보수우파’의 지도자급 인물의 표상인지에 대한 아리송한 느낌을 준다. 조 기자는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사파와 간첩이 민주화 운동했다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은 어불성설이다. 광주사태 주동자들 주에 자유민주주의 사상가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그들은 모두 자유민주주의 체제 타도를 목적으로 삼은 코뮌주의 혁명가 그룹이었으며, 코뮌주의가 바로 공산주의였으며, 한국의 코뮌주의자들이 남한 주사파의 원조들이었으며, 그들이 말한 민주는 ‘사회민주’와 ‘민족민주’ 뿐이었으며, 민족민주혁명 그룹이 ‘사회민주’를 말하였을 때는 유럽식 사회주의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단어에 사회주의혁명 의지를 담고 있었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광주사태 주동자들 중에는 자유민주주의 지지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셔야 할 조갑제 기자가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한다.  무엇보다도 조 기자는 탈북자들 및 탈북군인들의 5∙18 증언 및 새로 밝혀진 사실들로 광주사태의 진실의 규명될 모처럼의 기회가 올 때마다 나서서 광주사태 때 북한의 개입은 없었다는 허튼 주장으로 진실 규명의 판을 뒤엎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을 전면 부정하는 조갑제 기자의 논리에는 흑백논리의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만약에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이 전면 부정된다면 북한의 심리전을 통한 개입까지 부정되기 때문이다. 광주일원은 광주사태 당시 북한방송이 선명하게 청취되는 유일한 지역이었으며, 평양방송은 5월 18일부터 광주인민봉기 실황중계 방송을 하였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5월 22일에 처음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그 누구도, 심지어 조갑제 기자도 광주사태가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5월 18일에 광주사태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대기하고 있다가 그날 저녁부터 광주인민봉기 실황방송을 하였던 것이다.

    간첩들 및 그 동조자들이 광주에서 MBC방송국과 KBS방송국에 방화하고, 기독교방송국을 점령하고, 전일방송국 방화를 시도한 후에 점령한 이유는 광주 일원에서 북한 방송 주파를 차단하는 모든 주파를 없애고 광주에서 북한 방송이 선명하게 청취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조갑제 기자는 5월 23일에 광주에 도착하였으면서도 무장난동자들이 북한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셨는가? 무장난동자들은 북한이 광주인민봉기 실황방송을 통해 내리는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했었다. 그런데도 이것이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이 아닌가?

    조갑제 기자는 그때는 간첩 침투가 불가능했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간첩이 침투하지 않은 해가 한번도 없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에만 간첩 침투가 중단되었다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는가? 조갑제 기자는 10∙26 대통령 시해사건 직후 계엄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간첩 침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간첩이 일본에서 조총련 신분증을 만들면 남한은 일본인 신분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활짝 열린 문이었다. 1974년 광복절에 조총련계 일본인 신분으로 입국한 문세광은 내국인은 비표 없이는 접근 못하는 광복절 기념식장을 뚫고 들어가는 우대를 받지 않았던가. 

    조갑제 기자는 광주사태 때 해안으로 간첩선이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면 5월 21일에 이미 목포와 완도와 진도를 무장공비들이 완전 점령하였고, 해남군 일대가 괴무장단체의 무법지대화 되어 있었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실 것인가?  

    당시 계엄이 선포되어 있었기에 간첩 침투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조갑제 기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5월 18일 이전의 계엄은 물계엄이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만약에 지금 홍콩에 홍콩판 문재인이 있고, 홍콩판 문재인이 인솔하는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그 버스로 경찰 병력을 전속력으로 덮고 지나감으로써 압사하거나 치명적인 중상을 입게 하는 차량 테러 사건이 발생한다면 세계적으로 굉장히 큰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광주사태 발생 사흘 전에 군부는 문재인의 인솔을 받은 경희대 폭력시위대가 경찰을 대상으로 차량 테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정도로 물계엄이었다. 백주 대낮에 서울 도심지 한복판에서 이런 가공할 차량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어도 군부는 아직 병력조차 동원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해안 등으로 간첩들이 침투하는 것을 100 프로 완벽하게 저지할 수 있었다고 조갑제가 단정하여 말할 수 있는가?

    간첩 남파 전문가는 북한에 있었던 것이지 조갑제 기자 본인이 간첩 남파 전문가는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가 김일성이 놓칠 수 없는 남침 기회였는데, 해상경계가 강화되었다고 해서 북한 당국이 간첩 남파를 포기하려 하였겠는가?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가능성을 부정하는 조갑제 기자의 주장을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10∙26 대통령 시해사건 직후 최규하 권한대행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김일성이 “남한에서 계엄이 선포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간첩을 침투시키는 것이 더 어렵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대남공작원 남파를 완전포기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계엄은 전국 계엄도 아닌 지역 계엄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서거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사북사태가 발생하고, 김대중의 사조직들이 민중봉기로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였고, 남한 정부가 경찰 공권력으로 가두시위를 저지할 수 없었을 만큼 남한 사회가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었던 때에 단지 물렁물렁한 물계엄이 선포되어 있었다고 해서 김일성이 적화통일 야욕을 완전 포기했다고 조갑제가 장담할 수 있는가?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방부 정보국 5∙18 문건은 조 기자의 주장과 아주 상반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5∙18 진상규명을 시도하고 있지만 그 의도는 순수한 것이 아니다. 현 문재인 정부를 비롯한 5∙18 세력은 승자이며, 그 승리의 비결은 전두환 관련 악성 유언비어 프로파간다였다. 그러나 만약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무장폭동 진압에 관여되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면 유언비어는 유언비어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초조감을 느낀 문재인이 발포명령자를 찾아내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5월 21일 몸으로 도청을 사수하던 군인들 총은 실탄이 지급되지 않은 빈총이었는데 어떻게 발포 명령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전두환을 살인마로 매도한 악성 유언비어는 북한 대남공작기관이 지어내어 평양방송과 삐라로 퍼뜨린 것이었다. 그 북한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부역을 한 자들은 모두 5∙18 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그 많은 5∙18 유공자들 중 단 한 명도 도대체 전두환이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여되어 있었다는 것인지 그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군 기록물을 전부 뒤져보아도 전두환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니까 문재인 정부와 언론은 미국무부-CIA 5∙18 문건에서 전두환 관련 증거를 찾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막상 비밀해제된 미국무부-CIA 5∙18 문건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김대중의 내란음모 및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들만 있을 뿐이었다.

미국방부 정보국 5.18 문건


    광주사태 당시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 미국방부 정보국) 등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평양 주석궁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9일 평양 주석궁에서 김일성과 오진우 무력부장이 나눈 남침 계획 밀담에 관한 위의 보고서 제목이 “광주사태에 관한 북한의 의도 및 인식”(An Intention/Perception in Connection with Kwangju Incident)이다. 이 제목이 좀 놀랍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광주사태라는 명칭이 5월 22일에 처음 생겼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아무도 광주사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광주 금남로와 산수동 일대 주민들만이 20일 밤부터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막연히 감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5월 19일에 이미 광주사태를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침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5월 18일 당일에는 광주에서의 시위 규모도 작았고, 경찰 병력 40 여명이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된 것을 제외한다면 언론의 관심을 끌만한 것도 없었고, 시위대에 불리한 이런 사실마저 언론에 보도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위의 미국방부 정보국 문건은 남한에서는 아직 신문에조차 보도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한 반응이 북한에서는 아주 신속하여 19일 아침에 군 수뇌부가 긴급 소집되어 평양 주석궁에서 비밀회담이 개최되었던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Summay: On 19 May 80, Amidst the student demonstrations and subsequent riot in Kangju, KS, a secret meeting was held at the KN Presedential Mansion between KN President ((Kim)) Il-Song (6855/2480/2052) and KN Minister of People's Armed Forces ((30)) Chin-U (0702/2182/1342) and other KN leaders (nor further 
     요약: 1980년 5월 19일에 남한 광주에서 학생데모가 일어나 폭동으로 확산되는 사이에 북한 주석궁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오진우 무력부장 및 기타 북한 수뇌부가 회동하여 비밀 회담을 하였다. (성명 

미국방부 정보국 5.18 문건


    위 문건은 5월 19일의 북한 수뇌부 동향에 대한 미국방부 정보국 보고서의 이어지는 페이지, 즉 두번째 페이지인바 그 핵심은 이 첫 두 문장이다:

identified). Exactly what was discussed at the secret meeting is not known. However, the meeting was presumed to have covered the course of future KN actions in connection with the riot in KS. The KN leaders allegedly decided “not to refrain from invading KS, if the Kwangju riot developed into a nationwide popular revolt.”
    미상). 그 비밀회담에서 정확히 무엇을 논의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회담에서 남한에서의 폭동과 관련하여 북한이 취할 행동이 다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북한 수뇌부는 "광주폭동이 전국적인 민중반란으로 확산되면 즉각 남침하기로" 결정하였다.1

    사실 서경원의 전남 가톨릭농민회가 광주에서 무장폭동을 일으키기로 예정된 시간은 5월 19일 오후 2시였다. 그전까지는 가톨릭농민회 간부들과 극소수의 광주사태 주동자들 외에는 그 날 오후 광주에서 폭동이 예정되어 있었음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날 오전에 이미 김일성은 오후에 가톨릭농민회가 학생 시위대로 위장하고 무장폭동을 일으킬 것임을 미리 알고 "광주폭동이 전국적인 민중반란으로 확산되면 즉각 남침한다”는 명령을 오진우 무력부장 및 인민군 최고수뇌부에 하달하였다. 


    위의 김일성의 명령에서 ‘전국적인 민중반란’은 5월 20일에 김대중이 일으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전민봉기’를 의미한다. 북한군 남침 타임라인이 김대중의 조직들이 예정대로 5월 20일에 전민봉기를 일으켜 내전 상태를 야기해 주면 사회주의 혁명군 지원 명분으로 즉각 남침한다는 것이었다. 5월 19일 그 시간부로 인민군 전군에 전투명령이 떨어졌던바, 북한군 전군 각 부대에 출동 대기를 지시한 명령서에는 김대중의 조직들이 조만간 일으킬 ‘전민봉기’가 “조만간 남조선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영웅적인 남조선 인민들의 대규모의 혁명적 항쟁”으로 다음과같이 풀어 설명되어 있었다:

남조선의 혁명적인 인민들과 애국적인 청년들에 의해서 탄광과 광산 및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반정부투쟁은 우리의 공화국인민들과 그들의 통일열기가 얼마나 뜨겁고 최고의 시기에 도달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바야흐로 위대한 통일국면은 우리의 눈앞에 현실적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남조선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영웅적인 남조선 인민들의 대규모의 혁명적 항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투명령을 하달한다. 

1. 인민군무력부 산하 각 군단, 사여단 전투부대들은 만단의 전투 동원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준전시 상태에 돌입할 것.

2. 교도지도국 산한 각 저격 및 경보병 여단들은 남조선의 후방을 신속히 장악하고 배후를 교란하여 제 2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작전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

3. 공군부대 산한 전투비행단들은 적진에 구축되어 있는 중요 군사시설물에 대한 선제타격과 함께 공중작전권을 장악하고 지상군의 작전이 원만히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의 전투준비태세에 임할 것.

4. 해군부대 산하 전투함대들은 선제타격으로 해상공격권을 장악하여 신속한 기동력으로 해상육전부대들의 남한침투를 보장하며 육·해·공군 전반 무력이 입체작전으로 단시일에 남조선을 공략할 수 있도록 비상전투태세에 돌입할 것.

5. 노동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원들을 비롯한 영웅적인 전체 조선 인민들은 조국통일의 대사변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예비전쟁연습에 성실히 참가하며 공화국을 내부적으로 파괴하려는 간첩 및 암해분자들의 준동에 경각성을 높이고 자기의 일터를 철옹성같이 지킬 것.2  


    이렇듯 “광주폭동이 전국적인 민중반란으로 확산되면 즉각 남침 한다”는 김일성의 명령이 북한군 지휘부를 통해 각급 부대에 하달되었을 때는 “조만간 남조선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영웅적인 남조선 인민들의 대규모의 혁명적 항쟁을 지원한다”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북한이 원래 계획한 광주사태는 광주 일원, 즉 광주와 해남과 목포 등 전라남도 서남부 지역 13개 시군과 서울과 부산과 마산에서 동시에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광주의 민간인들로부터 군 무기를 회수하는 것을 5월 27일 이후로 미룰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다급한 안보위기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간인이 군 무기고를 습격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기꾼들이 지금껏 흔히 하는 거짓말이 5월 21일 3시 이후에 자기 방어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는 군인들 총은 실탄이 없는 빈 총이라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9시경에 무장괴한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서울 방면으로 장성을 향해 돌격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날 밤에 난동자들이 광주역 점령을 시도한 이유도 무장괴한들을 신속히 서울로 수송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만약에 광주무장봉기가 서울로 확산되는 것을 정부가 막지 못했더라면 김일성은 유격전을 전면전으로 전환하고 북한군 전군에 남침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5월 21일 아침에 무장괴한들이 광주를 출발하여 서울 방면으로 쳐들어가려 했던 사실을 황석영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날 오전, 처음에는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전주, 서울 방면의 진출을 시도했던 시위대들은 광주~장성 사이의 사남터널 부근에 대기중이던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되자 그 쪽 방향을 포기하고 주로 전남 도내 각 시, 군으로 등불처럼 번져나갔다 (황석영 1985, 211).


넘어넘어_211 서울.jpg


    민간인들이 총기 무장하고 타 지역으로 쳐들어가면 무장공비들처럼 보여 주민들을 공포에 질리게 한다. 더욱이 민간인이 총기 무장하고 군용차량 타고 타 도시로 쳐들어가는 것은 명백한 무장반란 행위이므로 광주시민들 스스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김일성의 지령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서울과 다른 도시로 쳐들어간 괴무장단체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자들이었음을 한 탈북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들의 작전지역은 서울이었고 김대중의 지휘로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시위에 합류하여 배후 교란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남조선의 수도인 서울 중심에서 국가교란사태를 조종하여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번질 수 있는 뇌관으로 되게 하는 것이 그들이 북한으로부터 받은 임무의 기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 러시아 벌목공 2009, 298).

    조갑제 기자는 탈북자들의 증언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그러면 납북 여배우 최은희의 5∙18 증언도 믿으실 수 없으신가? 5월 21일 아침에 무장괴한들 차량이 광주를 출발하여 서울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각에 그 뉴스를 최은희도 북한에서 청취하였다.



    김사복은 조총련 요원이었으며, 힌츠페터(Hintzpeter)가 찍은 영상은 조총련 조직을 통해 가장 먼저 평양방송으로 즉시 배달되어 광주인민봉기 실황방송용으로 활용되었다. 힌츠페터가 촬영하여 평양방송에 배달되고, 평양방송이 편집방송한 아래 영상을 보면 북한군 전군이 전투명령을 비상 대기하고 있는 동안 북한 전국에서는 광주인민봉기 지지 군중대회가 개최되었음을, 그리고 광주 일원에서도 간첩들이 어떻게 반정부 폭동 선동 연설을 하였는지를 볼 수 있다.   



    어째서 북한에서는 광주사태 직후부터 해마다 5월 18일이 가장 큰 국가기념일인가? 김일성 교시가 수록된 『보라빛 호수』 168쪽만 일견하여도 그 이유에 대한 감이 잡힐 것이다.

김일성의 5.18 증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註釋:

  1)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방부 정보국의 5.18 문서 및 이 문서가 탈북자들의 5.18 증언을 어떻게 잘 입증해 주는 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 및 내용은 
탈북자들의 5.18 증언을 입증하는 미국 CIA 비밀해제 문건 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2) 탈북군인들의 5.18 증언 및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추가 증거들에 대해서는 "역사로서의 5.18 (제2권) :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340-355 페이지에서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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