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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령(金大領: 인식론∙역사 연구가/저자/칼럼니스트)
University of Maryland 역사학과 졸업 (B.A.)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 (M.A., Ph.D.)
.
[5.18 역사 관련 주요 저서]
『역사로서의 5.18 전4권』(비봉출판사, 2013)
−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비봉출판사, 2013)
−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비봉출판사, 2013)
−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의 비화들』(비봉출판사, 2013)
− 『5.18재판 법리의 모순』(비봉출판사, 2013)
『임을 위한 행진곡』 (2015)
『문재인의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Gwangju Uprising Overthrown by Moon Jae-in's 5.18, 아마존, 2018)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 아마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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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대남공작기관인 한민전이 광주인민봉기 10주년을 맞이하여 남한 사노맹을 대상으로 5∙18 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악성 유언비어로 세뇌시킬 목적으로—제작한 광주사태 화보 『아! 광주여! 』를 홍보 문건 ‘책을 내면서’에는 김일성의 5∙18 교시가 이렇게 인용되어 있다: 

    『...광주인민봉기는 100여년전에 파리콥뮨이 있는 다음 세계에서 처음으로 되는 큰 규모의 대중적 봉기입니다. 몇십만명의 광주시민들은 현대적 무장을 갖춘 괴뢰군과 싸우면서 광주시를 장악하고 10일 동안이나 지켜냈습니다. 광주인민봉기는 미제의 부추김을 받은 남조선군사 파쇼분자들의 탄압책동으로 말미암아 진압되었지만 광주인민들의 투쟁정신은 살아있습니다.』

아! 광주여! 김일성 교시


    김일성이 파리코뮌을 북한식 표기로 파리콥뮨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한 단어로 김일성은 광주무장폭동의 핵심을 짚은 것이다. 광주코뮌이 제2의 파리코뮌이라는 사실은 광주사태 주동자들만 아는 비밀이었는데, 김일성이 그 사실을 꿰뜷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파리코뮌을 언급함으로 시작된 김일성의 5∙18  교시는 사실 조국의 석사논문과도 관계가 된다. 

    1989년에 작성된 사노맹 조국의 서울법대 석사논문 제목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형법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이다. 왜 조국이 소비에트 형법을 주제로 하는 논문을 썼는가? 그 이유는 사노맹의 목적이 소비에트 형법을 남한에서 부활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어 소비에트(сове́т)는 프랑스어 코뮌(commune)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단어이다. 그래서 소비에트와 코뮌은 같은 단어이다. 공산주의자라는 의미의 영어의 코뮈니스트(communist)도 그 어근은 프랑스어 코뮌(commune)이다. 요컨대, 제2의 파리코뮌으로서의 광주코뮌에 광주소비에트, 광주공산당 등의 의미가 있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김일성은 광주사태 주동자들 한 명 한 명의 신상 및 사상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일성의 5∙18 이론이 “광주인민봉기는 100여년 전에 파리콥뮨이 있는 다음 세계에서 처음으로 되는 큰 규모의 대중적 봉기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한 것이다. 조국의 석사논문 제2장 ‘전시 공산주의 단계(1917~1921)’첫 단락은 아래와 같다:

    10월 혁명에 의해 짜르체제의 낡은 국가기구(경찰기구, 관료기구, 군사기구, 재판기구)는 폐지되고, 대신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기구가 만들어졌다. 혁명 초기에 부르조아 임시정부의 성(省)은 폐지되었다. 소비에트권력은 인민위원부를 창설했다. 임시정부의 입김이 닿은 것은 새롭게 교체되고, 지방에서도 시의회, 지방자치제의 참사회 등 구세력의 기관은 해산되었다. 전국 어디서나 전권을 가진 유일한 기관은 노동자∙병사 농민대표∙소비에트로 구성되었다. 옛 재판소와 경찰에 대신하여 소비에트 인민재판소, 노동자 민경(民警)이 조직되었다 (조국 1989, 7).

조국 논문 7쪽


    레닌이 파리코뮌을 모방하여 러시아에서 일으킨 무장봉기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을 ‘10월 혁명’이라고 부른다. 러시아 10월 혁명을 모방하여 남한에서 무장봉기로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키려던 사노맹의 혁명의 목표가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존 사법제도를 폐지하고 인민재판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민재판소를 설치하려는 사노맹의 이상이 비록 잠시나마 한 지방도시에서 실현된 사건이 광주사태였다. 

    지만원 박사가 지난 2019년 10월 10일에 또 다시 1억1400만원을 광주단체 단체장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지박사가 박남선 등 5∙18유공자들 및 5∙18유공자들에게 살해되어 5∙18 유공자가 된 김인태씨 처 심복례 할머니에게 지불한 배상금이 총 2억 2천 3백만원으로 불어났다.

    광주사태 사진들 속의 인물들 숫자보다 5∙18 유공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그러면 광주사태 사진들 속의 인물들이 5∙18 유공자들 중 누구인지가 밝혀져야 역사기록으로서의 사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두 장의 광주사태 사진이 명예훼손 재판의 발단이 되었는데, 아래 우측 사진이 그 중 첫번째 사진이다. 
심복례씨와 인민군 장성 리을설


    재판에서 이긴 쪽 편에서는 사진 한 장 당 1억원의 가치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재판에서 이긴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이제는 명확한 사진 설명이 있어야 한다.

    만약 무장난동 장면 속의 인물들이 남한의 5∙18 유공자들이 아니라면 북한의 5∙18 유공자들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다. 상단 우측 사진에서 무장괴한들은 무장공비들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논란의 초점은 제62광수로 표시된 할머니의 정체였다. 거칠고 난폭한 무장공비들 틈바구니는 할머니가 끼어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무장공비들 선두의 할머니의 정체에 대한 의문에 대한 천주교 광주대교구 신부들과 광주단체들의 반응은 이 할머니는 상단 좌측 사진의 심복례 할머니라는 것이며, 심복례 씨 명예가 훼손되었다며 재판을 걸었다. 광주지방법원 재판장 김상연 등은 마치 판결은 광주단체가 승소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듯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키를 비교해 보아도 광수 할머니와 심복례 씨 키 차이가 20cm가 넘으므로 도저히 동일인물일 수가 없고, 더욱이 해남 거주 심복례씨는 광주사태 기간 중에 광주에 온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광주단체들이 재판에 이겼을 때 탄로나는 것은 광주코뮌의 인민재판이다. 광주코뮌을 광주해방구라고 불렀다. 이때 해방구는 6.25전쟁 때 빨치산들이 대한민국 통치를 거부하는 의미로 설치하였던 해방구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윤한봉과 윤상원 등 광주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윗선이 류락진과 김세원과 박현채 등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광주사태는 가깝게는 1927년 12월 11일에 중국 남쪽지방 광주(廣州)에서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이 일으킨 광주사태를 모방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일으킨 광주사태를 광주봉기라고 칭하기도 한다. 중국공산당은 공산주의 혁명기지였던 광주에서 봉기를 일으킨 후 광주코뮌을 설치하였는데, 코뮌을 쉬운 말로 해방구라고 하였다.

시민군에 납치된 심복례씨 남편 김인태


    위의 사진은 5월 24일에 M16 유탄발사기를 왼손에 든 괴한이 심복례씨의 남편 김인태씨 납치조를 인솔하여 김인태씨를 도청 안으로 끌고오는 장면이다. 박남선이 이 괴한이 자기라는 주장으로 재판에서 승소하였다. 김인태씨는 납치된 후 조사받던 중 사망하였기에 가해자는 M16 유탄발사기로 무장한 괴한이다. 그런데 박남선이 이 괴한이 자기라고 하였을 때 그 말은 즉 심복례씨 남편 사망사건 가해자는 자신임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박남선이 심복례 할머니와 공동 원고로서 지만원 박사에게 소송을 걸었을 때 이 재판의 성격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기꾼들은 무장시민들이 5월 21일 도청에서 공수부대를 몰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도청 안이 아닌 도청광장에 있었으며, 전남도지사와 전남도경이 도청 기밀서류를 안전한 곳에 수송할 때까지 도청을 사수해 달라고 요청하였기에 몇끼를 굶으면서 그때까지 사수해 주었을 뿐이었다. 공수부대는 원래 철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여기서 사기꾼들이 숨기는 사실은 무장괴한들이 전남도청 직원들의 출근 금지령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5월 21일 저녁에 무장괴한들이 전남도청을 점령한 이후에는 도청은 도청 직원 출입 금지지역이 되었으며, 도청공무원 신분으로 도청 안에 들어왔다가는 언제 무장난동자들에게 처형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무릇 군부대 내에서도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영내에서 실탄이 장진된 총으로 무장한 무장괴한들이 우글거렸으니 그 살벌한 분위기가 어떠 하였겠는가! 도청 정문에는 무장난동자들이 보초를 서며 출입자 검문을 하였다. 그런데 무장폭도들은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지만 전남도청 공무원들은 단 한번 부지사가 수습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 외에는 일체 입장이 금지되었다. 그 결과 전라남도의 모든 행정이 마비되고, 모든 민원봉사가 중지되었다.

    무장괴한들이 도청 공무원들을 내쫓고 도청에 해방구를 설치한 이유는, 즉 도청을 광주코뮌 본부로 이용한 이유는 도청 안에 인민재판소를 설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5월 21일 저녁 이후로는 전남도경에 이어 광주법원도 업무가 정지가 되거나 마비되고, 도청 안에 조사실 공간을 차지한 조사부가 광주의 유일한 사법기관이었다. 판사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재판을 진행하는 것은 문명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광주코뮌 조사실에서는 조사부 부장이 M16 소총으로 무장한 채로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상황실장과 조사부 부장 등 광주코뮌 주요 간부들에게 지급된 M16 소총은 광주코뮌에서는 계급과 신분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조사부 부장이 소지한 M16은 그가 즉결 처형권을 가진 인민재판관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조사부가 민주화운동하는 부서였는가? 아니다. 예로부터 한 지역에 빨치산이 해방구를 설치하면 그 지역 공권력이 뒤집히고 군인과 경찰이 일차 처형 대상이었다. 해방구에서는 과거 반공 국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군인과 경찰은 즉결 처형되거나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왜 무장괴한들이 전남도청을 점령하기도 전에 전경 포함 6천명의 경찰이 모두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심지어 여자옷을 입고—도망갔는가? 그 이유는 살기 위해서였다. 사기꾼들이 훗날 시민군이라고 부른 무장난동자들은 실제로는 시민군이 아니었다. 그때는 시민군이란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경찰 사냥을 주업무로 하는 기동순찰대가 있었을 뿐이었다. 

    기동순찰대는 군대 조직이 아니라, 치안대였으므로 시민군이란 명칭은 오류이다. 그런데 기동순찰대의 치안 업무라는 것이 경찰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을 납치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하는 사기꾼들은 어째서 그때 경찰은 시민군과 같은 편이 아닌 광주코뮌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것인지를 설명해 보라. 광주코뮌에서 종종 경찰이 간첩으로 호칭되었던 이유는 경찰이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시민군이라 불리게 된 기동순찰대의 주임무가 간첩 색출 및 체포였는데, 그 간첩은 북괴의 남파간첩이 아니라 광주 경찰공무원을 지칭하였다. 그런데 시민들 눈에는 무장괴한들로만 보였던 기동순찰대원 다수가 중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16세 청소년들이었고, 광주의 새 지배자였던 무장괴한들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민간인들, 즉 이발을 단정하게 한 시민들을 민간인 복장의 경찰관으로 의심하여 납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복례씨의 남편 김인태씨의 경우는 해남 농민 신분이었음에도 단정한 두발 때문에 사복 경찰로 오해받아 납치되어 인민재판을 받다가 참변을 당한  경우이다. 그런데 시민들이 공수부대원이란 누명을 쓰고 납치되어 인민재판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박남선은 5월 22일 순찰대가 조직된 첫날부터 그런 일화가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소대장님! 이놈들을 어디서 잡았소?”
“예, 무등산 증심사에서 잡았습니다.”
시민군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뒤 두 공수대원에게 수갑을 채워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자리에 앉히려는데, 이들을 잡아왔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황실 안팎이 소란스러워졌다.
“트럭 뒤에 매달고 다니면서 돌로 쳐 죽여야 해!” 
“분수대 앞으로 끌어내 공개적으로 총살시킵시다!” (박남선 1988, 356).

    이렇게 누명을 쓰고 납치되어 인민재판을 받게 된 시민들은 순찰대를 자처하는 무장난동자들의 엉터리 독심술에 굴복하여 시키는대로 허위자백을 하여야 했다. 불과 하루전까지만 하여도 민원봉사를 하던 전남도청이 이렇게 불과 하루만에 살벌한 인민재판 장소가  된 것을 지금 사기꾼들은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박남선이 스스로를 시민군 대장이라고 호칭하기 시작한 때는 광주사태가 끝난지 8년이 지나서부터였고, 실제로는 상황실장이었는데 윤상원으로부터 상황실장으로 임명받은 날도 광주사태 막판이었던 5월 25일 밤이었다. 박남선 본인의 광주사태 수기에서는 그는 이미 5월 22일부터 인민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광주사태 당시의 무장괴한들이 오늘날 시민군이라고 불리는 5∙18 유공자들이다. 그런데 박남선은 5월 26일에 자기에게 동료 시민군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었음을 그의 저서 『오월그날: 시민군 상황실장 광주상황보고서』 60쪽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무장병력을 장악한 뒤 내가 가장 크게 우려했던 사항은 다중이 무장을 하고 있을 때는 사고가 잘 일어나지 않으나 한 두 사람이 총기를 휴대하고 시내를 배회할 경우 사고의 위험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동타격대에 총기를 휴대하고 시내를 배회 중인 사람이 있으면 총기를 회수하고 블응하면 도청으로 데려오거나 만일에 반항하거나 도주를 할 때는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박남선 2014, 60).

    박남선은 같은 날 자기가 상무대 계엄분소 김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앞으로 잡히는 포로는 사살해 버리겠으니 내 말을 명심하시오, 알았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증언한다 (박남선 2014, 167). 무릇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 중에도 포로는 사살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광주코뮌 상황실장에게는 동료 시민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 포로도 사살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박남선은 1954년 9월 전남 화순군에서 출생하여 1969년 5월 광주 숭일중학교 2년을 중퇴하였다. 1973년 12월에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절도죄, 1979년 8월에서는 협박죄의 전과가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광주 최고의 통치기구였던 광주코뮌에서 수사권, 재판권, 지휘권 등의 권력이 순식간에 박남선에게 집중될 수 있었는가? 광주코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설치된 것이었으며, 이런 사회주의혁명 패러다임에서는 노동계 출신 박남선이 높은 권력 서열 적임자였던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시민군대장의 의미를 왜곡하였다. 박남선이 자기를 시민군대장이라고 할 때는 광주코뮌에서 자신의 서열이 높았다는 것을 그런 명칭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박남선 본인도 5월 21일에 무장난동자들이 언제 어떻게 도청을 점령하였는지를 보지도 알지도 못했다. 다만 그의 유일한 전투는 5월 27일 새벽 4시경에 김길자씨의 아들 문재학 군(당시 16세) 등 청소년들을 정문 바깥 분수대 쪽에 배치해 놓고 자기편 방향을 향해 총기난사한 것뿐이며, 그가 내린 유일한 전투 명령은 문재학 등 자기 편 청소년 무장단체가 배치되어 있는 곳을 향해 집중사격하라고 지시한 것뿐이다.1 그 외의 그의 주 역할은 인민재판관의 역할이었다. 

    박남선은 상황실 부실장이었을 때부터 인민재판관 행세를 하였다. 그러나 원래는 조사부가 인민재판 담당부서였다. 그러면 법원 기능이 정지되고, 광주에서 유일하게 법정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조사부 부장 신만식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는 자신은 건달세계 대장이었음을 증언한다:

    이렇게 시작한 서울 생활의 대부분을 나는 건달 세계에서 보냈다. 내가 일했던 곳은 남산 밑에 있는 '한진고속'을 무대로 인근 사창가의 기둥서방이나 소매치기 등이 70-80여 명 정도 있었다. 체격도 좋은 나는 건달 생활 1년 만에 두각을 나타내 '한철석'이라는 가명까지 쓰면서 행동대장을 했다. 이후로는 종로까지 진출해 뉴서울관광호텔 부근에서 구두도 닦으며 종로 부근의 건달들과도 어울렸다. [중략] 이런 생활을 3년 정도 하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중략] 회사에 다니면서도 밤이면 광주시내로 나가 시내를 배회하는 여러 사람을 나의 조직으로 꾸려 내가 대장을 했다. 처음에는 제일다방을 중심으로 한 제일파를 조직하고, 이후에는 조직이 커지자 시내의 큰 조직인 OB파의 새끼조직으로까지 부상했다. 언젠가는 OB를 완전히 잡을 생각이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한철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화물차를 사서 양동 주위에서 사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양동의 건달 세계에도 몸담게 되었다 (신만식 1989).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된 이래 광주의 유일한 사법기관이었던 기관장 신만식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건달세계 대장을 요즘말로 하면 조폭두목이다. 조사부에서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취조와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사복 경관이라는 오해를 받고 끌려와 변호사도 변호권도 없는 인민재판을 받는 시민들의 공포감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런 재판 분위기 일화를 신만식은 이렇게 증언한다:

5월 27일 새벽이 되었다. 나는 그때도 시민들의 신고로 잡혀온 여러 사람을 조사하고 있었다. 대충 30명 가량이 잡혀와 있었다. 도청 함락 직전에는 간첩혐의로 잡혀온 박인숙과 배00 부부를 조사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들이 간첩혐의로 잡혀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 어디서 살아?"
"화순 못 미처 1유판리에 삽니다."
"그럼 000 알아?"
내가 아는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이름을 댔더니 여자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내 발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분을 잘 압니다." (신만식 1989).

    당시 23세의 신만식이 어른들을 상대로 반말로 취조하였다. 어른들은 다행히 신만식의 지인의 이름을 알고 사복경찰관 누명을 벗을 희망이 보이면 엎드려서 신만식의 발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광주코뮌 재판 풍경이었다. 신만식의 기분 여하에 따라, 말 한마디에 따라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했다. 조사받는 시민을 살려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었던 막강한 권한을 가진 박남선의 학력은 중학교 2년 중퇴였고, 신만식은 중학교 1학년 중퇴였다. 그런데 어떻게 광주코뮌의 사법권력이 갑자기 이 두 인물에게 집중되었는가? 그 단서가 앞에서 인용하였던 조국의 논문 문장에 있다:

    10월 혁명에 의해 짜르체제의 낡은 국가기구(경찰기구, 관료기구, 군사기구, 재판기구)는 폐지되고, 대신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기구가 만들어졌다. 혁명 초기에 부르조아 임시정부의 성(省)은 폐지되었다. 소비에트권력은 인민위원부를 창설했다. 임시정부의 입김이 닿은 것은 새롭게 교체되고, 지방에서도 시의회, 지방자치제의 참사회 등 구세력의 기관은 해산되었다. 전국 어디서나 전권을 가진 유일한 기관은 노동자∙병사 농민대표∙소비에트로 구성되었다. 옛 재판소와 경찰에 대신하여 소비에트 인민재판소, 노동자 민경(民警)이 조직되었다 (조국 1989, 7).

    한국판 소비에트 권력이 광주코뮌 권력이었으며,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으며, 경찰과 법원을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 기구의 기관장으로서는 노동자계급이 적임자였고, 그래서 광주코뮌, 즉 광주해방구에서는 아주 빠른 속력으로 수사권과 재판권이 박남선과 신만식에게 집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래 사진에서 박남선은 M16 유탄발사기를 왼손에 들고 김인태씨 납치를 지휘하는 인물이 자기라는 주장으로 재판에 이겼다. 그러나 이 재판은 사실 판사가 판결을 보류하여야 할 재판이었다. 왜냐하면 이 인물이 박남선이라는 아무런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광주단체 편인 검사가 보기에도 이 자의 얼굴이 박남선의 얼굴과 너무 다르며, 5천명의 5∙18 유공자들 중 단 한 명도 이 자가 박남선임을 알아본 이가 없었다. 원고가 사진 속의 인물이 자신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이 소송 건은 기각되는 것이 마땅하였을 것이다.

심복례씨 남편 김인태


    참으로 이상한 재판 판결이었다. 아무리 편파적인 재판이라고 하더라도 박남선이 자기가 김인태씨 납치사건 최고책임자라고 주장하였을 때는 김인태씨 사망사건에 대한 조사를 마땅히 하여야 하지 않았는가? 김인태씨를 납치하여 조사실로 끌고간 자들이 5∙18 유공자들이라는 것이 광주단체의 입장이다. 그런데 걸어서 조사실로 끌려간 김인태씨는 시체가 되어 상무관으로 운구되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광주사태 가해자가 5∙18 유공자들 혹은 시민군들이라는 증거인데 어떻게 검사가 이런 사실을 가리고 기소할 수 있으며, 판사가 이런 진실을 숨기고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단 말인가!

    당시 48세의 해남 농민 김인태씨는 10대 후반 내지 20대 초의 아들뻘 젊은이들에게 조사를 받다가 우측 두개골 압박골절로 사망하였다. 즉 시민군들 중 누군가가 총 개머리판 등 둔기로 가격하였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상으로 사망하였던 것이다. 만약 김인태씨 납치사건 지휘자가 박남선 본인인 것이 참으로 맞다면 광주 5∙18 단체 회원들 수가 많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 사진들 속에서 박남선이 아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는가?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만약 김인태씨 납치 살해사건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털끝만치만 연루되어 있어도 온 언론에서 도배를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5∙18 유공자들이 가해자였음이 명백한 이 증거에 대해서는 어째서 모두가 쥐죽은듯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심복례 할머니를 부추겨 박남선과 더불어 공동 소송인이 되게 한 광주단체들은 박남선의 승소는 곧 심복례 할머니 남편 사망사건 가해자가 박남선이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할머니에게 알려드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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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釋:

  1)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경에 박남선을 비롯한 도청 안 무장난동자들이 김길자씨 아들 문재학 군 등 도청 정문 방향의 도청 바깥 자기 편을 향하여 집중적으로 총기난사한 사건에 대해서는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Google Play) 혹은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Google 도서) 제3장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81~147 페이지)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다. 


  1. 김일성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광주코뮌

    Date2019.11.27 By백마필봉 Views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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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조갑제의 북한 광주사태 비개입설을 뒤집는 CIA 문건

    Date2019.11.07 By백마필봉 Views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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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일성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광주코뮌

    Date 2019.11.27 / 단기: 4352.11.27 By백마필봉 Views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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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조국 논문 덕분에 탄로난 5∙18 광주코뮌 인민재판

    Date 2019.11.15 / 단기: 4352.11.15 By백마필봉 Views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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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조갑제의 북한 광주사태 비개입설을 뒤집는 CIA 문건

    Date 2019.11.07 / 단기: 4352.11.07 By백마필봉 Views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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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북한이 사노맹을 위해 제작한 5∙18 화보 '아! 광주여!' (1)

    Date 2019.10.30 / 단기: 4352.10.30 By백마필봉 Views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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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홍콩의 민주화 시위와 상극인 5∙18의 코뮨주의

    Date 2019.10.22 / 단기: 4352.10.22 By백마필봉 Views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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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5∙18이란 광주사태 상징 숫자의 모순

    Date 2019.10.15 / 단기: 4352.10.15 By백마필봉 Views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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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남의 글을 자기 가명으로 출판한 사노맹 얼굴마담 조국

    Date 2019.10.09 / 단기: 4352.10.09 By백마필봉 Views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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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석사 논문에서 日本이 자기 조국(祖國)이라고 한 조국

    Date 2019.10.02 / 단기: 4352.10.02 By백마필봉 Views1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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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광주무장봉기 사전 기획설 증거 제시한 조국의 사노맹

    Date 2019.09.26 / 단기: 4352.09.26 By백마필봉 Views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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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조국의 헌법정신과 사노맹 재판 법리 그리고 5∙18

    Date 2019.09.18 / 단기: 4352.09.18 By백마필봉 Views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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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일본 책 표절한 조국 논문과 5.18의 비밀

    Date 2019.09.10 / 단기: 4352.09.10 By백마필봉 Views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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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조국의 사노맹의 시각에서 본 광주사태 (1)

    Date 2019.09.02 / 단기: 4352.09.02 By백마필봉 Views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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