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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령(金大領: 인식론∙역사 연구가/저자/칼럼니스트)
University of Maryland 역사학과 졸업 (B.A.)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 (M.A., Ph.D.)
.
[5.18 역사 관련 주요 저서]
『역사로서의 5.18 전4권』(비봉출판사, 2013)
−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비봉출판사, 2013)
−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비봉출판사, 2013)
−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의 비화들』(비봉출판사, 2013)
− 『5.18재판 법리의 모순』(비봉출판사, 2013)
『임을 위한 행진곡』 (2015)
『문재인의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Gwangju Uprising Overthrown by Moon Jae-in's 5.18, 아마존, 2018)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 아마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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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홍콩의 인구가 광주사태 당시의 광주의 인구 열 배가 넘지만 홍콩사태는 절대로 광주사태처럼 전개되지 못한다. 홍콩사태와 광주사태는 그 성격이 정반대로 다르다. 이것은 홍콩사태와 가장 이해관계가 있는 중국과 광주사태와 가장 이해관계가 있는 북한이 고수하고 있는 입장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자유로와지려는 홍콩사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북한이 남한의 광주사태는 지난 40년간 변함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왔다.

    중국이 민주화운동 시위대를 홍콩에 파견해 주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북한은 폭력시위 주동자들을 광주에 파견해 주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보라. 지금 광주단체들이 입으로는 벙긋 홍콩 시위를 지지한다고 한마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시위자라도 파견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가? 이렇듯 광주사태와 홍콩 사태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북한이 광주사태를 지지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무장시위를 주동하고 선동하며 광주 일원에서 군경과 유격전을 벌일 전투원 남파였다. 1980년 5월 21일에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함락한 괴무장단체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북한군 특수부대에서 선발된 전투원들이었다. 아래 사진은 지난 2010년 5월 17일에 평양 직총회관에서 `광주인민봉기' 3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가 열리고 있는 장면을 평양 조선중앙통신으로부터 받아서 연합뉴스가 보도한 사진이다. 광주사태 사진들 중에서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5월 22일에 찍은 사진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로 군용트럭을 타고 다니는 세 명의 시민군 모습을 보여준다. 그 세 명의 시민군이 바로 아래 사진 하단 우측에서 양복을 입고 있는 인물이다. 

2010.5.17평양 중앙노동자회관에서 `광주인민봉기' 3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

3인조 광수


    이 세 명 중 가운데 있는 인물은 강상우 감독의 5∙18 왜곡영화 ‘김군’을 통해 그 얼굴이 잘 알려진 인물이다. 강상우 감독은 북한특수군을 광주사태 때 죽은 넝마주이로 각색하고 2018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만약 3인조 전투원들 중 한 명으로 활동하던 그가 광주사태 때 죽었다면 어떻게 그 3인조 전원이 30년 후에 북한의 광주사태 보고회에 나타나 보고할 수 있었겠는가?


김군


    강상우 감독이 김군이라고 이름 붙인 무장괴한을 비롯한 3인조 무장공비들은 북한이 파견한 전투원들이었다는 사실을 전 체코 주재 북한무역대표로서 현재 탈북국민인 김태산은 이렇게 증언한다:

    저것이 바로..평양시 대동강구역에 있는 직총회관 (직업총동맹 중앵위원회 회관) 에서 열렸던 광주폭동 30돐을 기념하는 보고대회라는 행사입니다...... 앞줄에 특별하게 넥타이를 맨 3명의 남자들이 바로 30년 전 5,18 당시에 직접 광주에 내려왔던 전투원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중앙 보고대회에 초청했던 것이 찍힌겁니다 (김태산 2019).1

    남한의 5.18 유공자 대우는 북한에서의 5.18 유공자 대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북한에서의 5.18 유공자 칭호는 공화국영웅이며, 김일성에게 직접 훈장과 칭호를 받았다. 광주사태 때 광주에서 무장시위대로 활약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공화국영웅 칭호는 북한 사회에서 최고의 훈장, 최고의 칭호이며, 공화국영웅이 되면 상당한 재물과 감투를 보상으로 받았으며, 어느 고위층 노동당 당원 못지 않게 끗발 좋은 신분 상승을 단번에 하였다. 문재인 정부가 단 한 명의 시위자도 홍콩에 파견해 주지 않겠지만, 설사 파견한다 하더라도 그런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며 파격적인 보상을 해주겠는가? 이렇듯 광주사태와 홍콩 시위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광주사태 주동자들에게 무장시위대를 파견해 주는 지원을 해 준 이유는 민간인 스스로는 군 무기로 무장하고 광주해방구를 설치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광주사태 때처럼 홍콩사태에서 민간인들이 군복 비슷한 차림에 철모를 쓰고, 기관총이 장착된 군용트럭을 몰고다니며 기관총 사격을 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그것을 시위나 데모라고 말하지 않는다. 광주사태가 무장봉기였던 이유는 광주에 코뮌, 즉 해방구를 설치하기 위함이었다. 5월 21일 저녁에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함락하고 해방구 본부를 설치한 북한군은 22일 해방구 통치 업무를 광주 내부 협조자들에게 인계하였다. 그러나 도청을 점거하고 광주의 새 지배자가 된 무장난동자들 중에서 전남대 학생 수는 의외로 적어 다섯 명이 채 안되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전남대 공대생이었다. 

    당시 전남대학교 재적학생 수가 4만명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 전남도청을 점거한 무장학생 수는 만분지 일에 불과하였으며, 전남대 공대생이 그 만분지 일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전남대 공대생이 해방구와 무슨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그 단서는 5∙18 유공자 박몽구의 금년 2019년 기고문 “5.18민주화운동 - 광주 해방구에 핀 사랑의 꽃”에서 발견된다.

    자생간첩단인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전사이자 반미 시인으로서 공산주의 이념을 고취하는 시를 쓰던 김남주가 광주해방구 설치 구상을 처음으로 한 때는 광주사태 발생 3년 전이었던 1977년이었다. 광주해방구는 1980년 5월 21일 우발적으로 혹은 우연하게 갑자기 설치된 것이 아니라, 3년간의 준비기간이 있었으며, 파리코뮨 독서클럽을 만든 것이 그 첫 준비였다. 박몽구는 김남주와 더불어 파리코뮨 독서클럽을 처음 시작한 인물이 바로 전남대 공대생 노준현이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아마도 1977년 가을쯤의 일일 것이다. 당시 전남대생들을 주축으로 한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광주 계림동 소재의 녹두서점에 모여서 줄 바레스가 지은 ≪파리 콤뮨≫의 일본어 판을 김남주 시인의 지도하에 강독하고 있었다. 전남대 공대생 노준현 군을 비롯한 여남은 명의 젊은이들은 1871년 3월에 발발하여 불과 3일간의 단명으로 끝난, 파리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기층 민중들이 철통같이 단결하여 이룬 해방구에 대한 이야기를 경이의 눈으로 들었다 (박몽구 2019).2

    북한측이 아닌 남한측 광주사태 주동세력은 광주운동권으로 구성된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이었으며,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선배 공산주의자 세대로서 광주사태 주동 가장 윗선이 류락진, 김세원, 장두석, 박현채 등의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원래 빨치산들이 해방구 설치 전문가들이었다. 광주사태 때 해방구가 설치되었으며, 문재인은 북한처럼 광주사태 지지세력이다.  


    지난 2019년 여름에 홍콩사태가 발생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주단체들과 한국 정부는 당연히 홍콩시위대를 지지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정반대로 문재인 정부는 중국 공산당 편처럼 행동한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1980년 5월의 광주해방구의 정치적 의미를 알아야 풀린다. 근현대사에서 해방구의 의미는 “중국 혁명의 과정에서 공산당 정권이 통치한 지구”이다. 지금도 중공군을 인민해방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중국 공산당 군대가 해방구를 설치하는 군대였기 때문이다. 광주해방구 명칭 자체가 중국 공산당 해방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기에 광주해방구 지지세력은 정치적으로 본래 같은 편인 중국 공산당 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주사태 때 다시금 그 존재감을 드러냈던 한국 빨치산의 기원이 바로 1927년 12월 중국 광주사태(廣州事態)이다. 廣州事態를 廣州 코뮌폭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廣州에 해방구가 설치되었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 때 빨치산들이 하는 일이 해방구 설치였는데, 그 기원이 중국 廣州事態 때 중국공산당이 廣州에 설치하였던 해방구였다. 중국 광주(廣州)의 중국어 발음은 ‘광저우’이다. 부마사태와 광주사태 등의 ‘사태’ 명칭이 한국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주동자들이 중국 공산주의 혁명사의 큰 사건이었던 광주사태(廣州事態)에서 따온 명칭이다. 한국에서 광주사태가 발생하기 53년 전에 중국에서 발생한 광주사태를 위키백과는 이렇게 정의한다:


    광저우 봉기(廣州起義) 또는 광저우 폭동(廣州暴動)은 1927년 12월 11일 중국 광둥 성 광저우 시에서 소비에트 건립을 의도해 발생한 폭동으로 중국공산당의 장태뢰(張太雷), 엽검영(葉劍英) 등이 현장을 지도하였고, 한국인 공산주의자 최용건 등이 가담하였다. 광주폭동(廣州暴動), 광저우코뮌폭동, 광저우사태(廣州事態)로도 부른다.


    남한 광주사태 때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된 것에 북한의 개입이 있었던 것처럼 중국 광저우사태(廣州事態) 때도 소련의 개입이 있었다. 광저우에 소비에트 국가 형태로서의 코뮌이 설치된 것은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위의 위키백과는 이어 이렇게 기록한다:

    코민테른의 중국 공산화 사업이 계속되는 실패를 겪는 과정에서 스탈린의 정책은 소련의 당내 경쟁자 트로츠키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 이에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에 일련의 무장 폭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중국내 성(省) 한 곳이라도 탈취하여 소비에트국가를 건립해야한다고 중공에 지시하였고 자신의 대중국 정책의 정확성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광저우사태(廣州事態)는 만주에서 공산주의 혁명가로서의 김일성이 등장할 수 있게 한 시대 배경이었다. 광저우사태 주동자들이 스탈린의 지시를 받는 자들이었다. 

    2001년부터 3년간 전남대 5.18연구소 객원교수였던 조지 카치아피카스 는 2007년 풀브라이트재단 후원을 받아 한 연구 결과로서 2011년에 출간된 『한국의 민중봉기』에서 광주해방구는 광주코뮌이었다는 사실을 발표 하고 미국의 (혹은 세계적인) 5∙18 역사 전문가로 등극하고 2015년 5월 21일에는 광주시에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김혜영 2015). 그러나 김일성과 북한 당국이 보는 시각에서는 카치아피카스의 연구성과는 가소로운 것이다. 김일성은 카치아피카스가 31년이나 빠른 1980년 광주사태 직후에 교시를 통해 광주해방구는 광주코뮌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괴무장단체가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한 사건을 광주사태라고 부른다. 그런데 Ohmynews는 최근에 “[김삼웅의 5·18 광주혈사] 프랑스혁명 후에 나타난 파리꼬뮨, 그리고 광주꼬뮨”이란 제목의 2019년 11월 21일자 기사에서 광주해방구는 광주꼬뮨이요, 광주꼬뮨은 1871년의 파리꼬뮨에 이어 가장 큰 꼬뮨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39년전부터 삼척동자도 알고 있었던 사실을 이제서야 알아냈는가? 광주사태 발생 직후의 그의 교시에서 김일성은 광주꼬뮨의 정치적 의의를 이렇게 극찬하였다:

    광주인민봉기는 100여년전에 파리콥뮨이 있는 다음 세계에서 처음으로 되는 큰 규모의 대중적 봉기입니다. 몇십만명의 광주시민들은 현대적 무장을 갖춘 괴뢰군과 싸우면서 광주시를 장악하고 10일 동안이나 지켜냈습니다. 광주인민봉기는 미제의 부추김을 받은 남조선군사 파쇼분자들의 탄압책동으로 말미암아 진압되었지만 광주인민들의 투쟁정신은 살아있습니다 (한민전 평양대표부 1990).

    남한에는 광주사태에 대한 수만 가지 이론과 주장이 있으며, 사람마다 제각기 말하여 통일된 이론은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광주인민봉기에 대한 단 하나의 이론, 단 하나의 주장만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북한은 김일성의 5∙18 교시를 결코 바꾸거나 수정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광주해방구가 광주꼬뮨이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이유는 북한세력이 바로 광주꼬뮨 설치 당사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註釋:

  1) 김태산의 페북 댓글 증언 

  2) 박몽구. 2019. 5.18민주화운동 - 광주 해방구에 핀 사랑의 꽃.

  3) 전남대 교환교수 카치아피카스가 발견한 광주코뮌에 대해서는 
역사로서의 5.18 (제3권):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Google Play) 혹은 역사로서의 5.18 (제3권):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Google 도서) 335~346 면에서 상세한 내용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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