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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땀의 3년


조국에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행하여져서 목가적(牧歌的)인 한국사회가 공포의 학정(虐政) 속에 살고 있었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 당시하와이에 머물고 있었던 이 승만 박사는 하루하루 민족 독립운동의 발판을 만들고 있었다. 이를테면「대한인 국민회」가 조직되어서 이름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면에 있어서 눈부신 활동(교육, 출판, 종교,외교면에서)을 하고 있었다. 1906년 요월 2일 호널룰루에 소재한 한인감리교회에 한인기숙학교를 세워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2세에게는 한국어를, 이민 온 어른들에게는 중학교의 단기 속성과를 직접 가르쳤다. 또한 미주 각지방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자 1913년 9월학기부터는 한인중앙학원이라 하여 국어과,한문과,소학과,고등학과를 두어 본격인 해외동포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때 한국에서 사진결혼하여 들어 온 많은 한국여성들은 신랑 될 남자들의 나이가 너무나 많아 격차가 생긴다든지 아니면 이상에 맞지를 아니하여 일정한 거주지를 잃고 배회하고 있었다.


언어장벽에다 미국생활에 생소한 그들을 집단 수용하여 한인여자학원을 1914년 7월 29일에 리 박사는 설립하였다. 대한인국민회에 소속한 우리 동포들은 리 박사의 하는 일에 협력하여 1915년 7월에 여자학원 부지로서 3에이커를 매입하여 그 위에 건축을 하였다. 1916년 3월 10일에 여자 성경학교라 이름을 바꾸었다가 1918년 요월에는 다시 한인기독학원이라 명명하였다. 후에 이 박사는 4천에이커의 학원 대지위에 당시로서는 거액인 8만4천8백15달라의 건축비를 들여 학교를 확장하였다.한국의 인하공과대학(현재의 인하대학교)은 바로 한인기독학원을 매각 처분해서 세워진 학교이다. 그러기에 [인하]라는 교명이 인천과 하와이에서 따서 지었던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 그때에 학교를 짓고도 돈이 남아서 은행에 상당한 돈을 정기예금하여 장차 학교를 위해서 쓰도록 해 놓았다는 말을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리 박사는 당시 한인 교육을 통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인재를 양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거액의 돈을 마련하는데 미국인의 돈을 5만불이나 기부 받을 만큼 리 박사는 외국인들에게도 덕망과 인기를 모았던 당당한 민족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이와 같은 우리 민족의 수난이 겹겹이 쌓이고 있을 무렵, 나에게도 말 못할 피땀의 고투가 내 운명의 전도에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상항에 도착해서 한인 여관에서 약 2주간 머물고 있는 동안 수중에 가졌던 15불의 돈도 여관비로 들어가고 더 머물래야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한인소개인에게 나의 총수익금에서 1할(10%)을 주기로 하고 콩 밭에서 김매는 일이 생겼다.


돈이 없어서 일복(일할 때 입는 웃)조차 사지를 못하고 입은 그대로 상항과 가주의 주청사(州廳舍)가 있는 새크라엔토 사이에 있는 스탕톤(Stockton) 이라는 곳의 넓은 농장 지대로 차를 타고 갔다. 이 넓은 농징지대의 둘레 외각지대에는 강이 흘러서 흡사 섬과 같은 옥답지대였다.



농촌출신인 나였지만 공부와 교편생활밖에 몰랐던 나에게는 이러한 여름 뙤약별에 중노동을 하는 것은 아주 큰 고통과 시련이었다. 작년까지 고국에서 앓았던 늑막염은 나의 이 중노동에 재발이나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버릴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날 때는 선진국 미국의 의술로 완전히 건강을 되찾고 공부하는데 있었지만 당장 식생활을 해결하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 할 판이었다. 모든 것을 천명에 맡기고 시간당 35센트 받는 김매기를 10시간을 하였다.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돌아와서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밤새 하면서 이튿 날을 맞이 하였다. 검게 탄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손가락은 잘 굽혀지지 않았다. 또한 손바닥은 물이 들어서 부어있는 것도 있고 터진 것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지 백체가 땅기고 마디어 고통스러웠다.


사람은 참으로 모질고 독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의 고통과 질고는 반드시 이겨야 되겠다는 집념은 쑤시고 아픈 그 고통과 방울방울 맺혀져 떨어지는 그 땀방울의 노고를 이길 수가 있었다.그래도 하루 3불50센트의 돈을 손에 쥐기를 한 달을 계속하니 꽤 많은 돈이 모아져 아주 기뻤다.


고국을 떠나 올 때 가족들의 직접생계를 잇던 전답을 갈고 빚까지 지워놓고 왔음으로 나는 나의 생활비만 조금 제치고 모두 한국으로 송금해 버렸다. 이 일이 끝나고 다뉴바의 포도 따는데로 찾아 갔다. 


포도를 따서 상자에 포장하기 좋도록 땅바닥에 늘어놓는 일인데 처음 하는 나에게 쉽지 않았다. 늘어 놓을 때는 바닥에 종이를 깔고 햇빛이 잘 들도록 되어 있어야 했다. 내 경우비는 하루 죽도록 한다고 해도 2 백상자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콩밭에서 김매는 것보다는 수입이 좋았다. 한 상자라도 많이 따려고 유화가루를 무롭쓰고 일을 하자니 고되기는 더 하였다. 이 일도 한 달하고나니 끝이 나서 다른 일을 구하러 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함께 일했던 오 임하(못林河)씨와 같이 그가 잘아는 사이인 박영순씨가 일하고 있는 농장올 방문했다.


이 농장은 북가주의 월리암 타운에 소재하고 있었다. 오임하씨는 박영순과 마찬가지로 흥사단 사람이었다. 박씨는 오씨만 일터로 데리고 가고 나는 자기 숙소에 그냥 두었다. 노자도 떨어지고 언어의 장벽까지 있는 나에게 어디가서 일터를 찾아야 될지 몰라서 그냥 여기에 머물고 있었다. 혹시나 일을 하러 가자고 할런지 몰라 며칠 묵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면 어디든지 떠나 달라는 눈치인데 어디라도 갈수 없는 것이 내 형편이었다. 



이렇게 내 평생에 처음 눈치밥을 먹고 있는데 함경도를 고향으로 하고 있는 맹 정회(孟 正熙)씨가 주일날 찾아왔다. 그는 이곳에 우연히 들렀다가 딱한 나의 사정을 보고 자기가 있는 북가주 콜로라도로 가자고 하였다. 얼마나 기뻤는지 당장에 쾌히 승낙을 하고 그를 따라 갔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벼를 베는 경운기(耕耘機)가 지나가기 전에 바퀴에 밟힐 벼를 부지런히 베었다. 그랬더니 같이 일하던 일꾼들이 나에게 불평을 토로하였다. 자기네들은 담배도 피워 가면서 일올 천천히 하는데 나의 일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내가 일부러 빨리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내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으로서 내 힘 가는대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맹씨도 나를 불러서 남들과 같이 천천히 일을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나의 성격이 가식을 모를 뿐만 아니라 내 능력껏 일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온 사람이라 그렇게 천천히 되어지지를 않았다. 그러자 맹씨는 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벼베는 일에서 다른 일로 바꾸어 주었다. 그것은 사람들과 기계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맹씨와의 일도 벼타작이 끝나자 나는 또 다른 일을 구해야 했다. 이번 일은 겨울 일로써 철도부설 작업이었다. 나는 맥스웰이라는 곳까지 가서 멕시칸들과 같이 3개월간 일을 하엿다. 기식처는 철로변에 임시로 세워진 소위 색손.하우스 (Section House)라 해서 멕시칸과 한인들은 기식처를 각각 따로 하였다. 이래서 내가 미국에 도착하였던 첫해는 그럭저록 지나갔다.


이듬해 1918년 봄이 되자 송 이균(宋 二均)씨가 경영하는 벼농사에 봄부터 가을까지 일을 해 주고 어느 정도의 돈을 저축할 수가 있었다. 이 겨울에도 쉬지 않고 과실주(果實株)를 심었다. 한 구덩이를 파는데 15센트를 받았다. 높이와 넓이(高廣) 지하 한자 반을 파는 구덩이었다. 이 일은 후에 내가 과수원을 직영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해가 바뀌고 1919년이 되었다. 지난 1년간의 벼농사의 경험은 벼농사에 대한 나의 기술과 노동력이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게 하였다. 어느날 채필이라는 백인 농장주가 찾아왔다. 자기와 같이 벼농사의 병작(供作)을 하자는 것이다.


그 백인은 10퍼센트의 이익배당을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나는 그 농장이 1년간 휴경(休耕)하지 않은 농경지이기에 돌피가 많이 있을 것으로 알고 수정안을 내었다. 돌피를 뽑지 않은 조건에서 총수확의 8퍼센트 이익배딩올 받는 것으로 제의하여 쌍방이 합의를 보았다. 이제 나 혼자서도 벼농사를 단독 직영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농사였다. 나는 이 농사에서 상당한 수확을 올려 어느 정도 나의 경제에 무엇을 할 수 있는 여력올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평생 처음 눈치밥을 먹게 하였던 박영순가 찾아왔다.내가 벼농사와 이번 겨울에도 작년과 같이 과실주 구덩이를 파서 어느 정도 돈울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 이때만 해도 한인수가 상당히 적은 연고로 누가 무엇을 해서 돈을 벌었다는 것은 당장 소문이 날수 있던 때였다. 그는 나와 함께 벼농사를 병작하자고 하였다. 나는 지난 날의 서운한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동족의 피를 물려 받은 동족이라 지날 날올 용서하고 그와 함께 병작을 하기로 하였다.


사실 나는 그가 찾아 오기 전까지는 지금까지 벌었던 돈을 갖고 오직 공부만 하기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받아들여 1년만 더 돈을 벌어서 공부하기로 하였다.


내가 맡은 벼농사는 2백40에이커였다. 그때 생각에는 한 에이커당 최소 50포대에서 최고 80포대 산출하는데 나는 최소한 에이커다당 50포대를 보았다. 그리고 포대당 최하 3불에서 최고 7불까지 받는 것을 나는 3불로 줄잡아 계산하여 벼생산 하는데 에이커당 1백 50불(弗)의 경작비를 제하면 최악(最惡)에 가서도 밑져봐야 본전이니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나는 이 외에도 조금 뒤에 후술할 홍사단의 북미실업주식회사에 한 주당(株當) 백불하는 주(株)를 8개나 사서 내 사업에 나대로 대망을 품고 투자하기도 하였다. 이 때의 홍사단에 대한 투자는 나의 사업관인「비지네스는 비지네스로」처리 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의 사업관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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