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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임정의 그 사람들


노 백린 장군은 다시 상해로 돌아가서 그 말 많은 임시정부에서 애국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이왕 여기서 임시정부의 소란스러운 이야기가 나온김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지나가겠다.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었던 리 승만 박사가 과연 임시정부를 소란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고집하는 일부 인사들의 말이 옳은가? 만약 그러한 사람이면서도 미국에 있는 나와 그리고 많은 동포들이 어리석게도 리 박사를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리 만큼 우매(愚味)하였던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리 박사의 활동 사항을 조금도 윤색(潤色)됨이 없이 사실을 바르게 통찰함으로써 가능해 질 문제이다.


리 박사는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하와이에서 민족 교육사업과 국민보를 발간하면서 혼신(澤身)으로 민족을 위한 사명을 다 하고 있었다. 하와이는 한국인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한국인의 본산과 같았다. 몇년간 리 박사가 머무는 동안 박 용만씨의 테러적 독립운동,안 창호씨의 서북인 중심의 독립운동올 완전히 불식(拂抗)해 버리고 리 박사는 외교와 일민적(一民的)인 독립운동의 기틀올 잡아 놓으시고 미국 동부로 갔다.


기미년 3.1 독립운동 후에 상해에서 세워진 우리의 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을 받는 것이 급선무라고 리 박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리 박사는 부단히 미국시민에게 임시정부세 대한 여론을 환기시켜서 미국 정부로 하여금 우리 임시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써 승인하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 방법의 하나로 미국 주요도시 19개 처를 선정하여 한국우호연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을 이용하여 제1차대전 후의 세계 평화를 위하여 내놓았던 미국 월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실제로 실현시키는데 그 역점을 두었다.


미국은 넓은 나라인데다 수많은 민족들이 사는 곳이다. 그들은 일본을 알고 있고 또 일본과의 우호관계에 대해 알려고 하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또한 한국과의 우호관계는 도무지 알려고 들지를 아니하였다. 이러한 그들에게 넓은 지역을 뛰어 다니면서 우리 한국을 알리고 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서 우호관계를 맺는 조직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단숨에 뛰어가 대통령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남의 나라가 인정도 하지 않은데다가 재정(財政)도 없는 그 대통령직을 리 박사는 그렇게 급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임시정부를 남의 나라로부터 승인을 받고 정정당당한 나라로 행세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미국의 영향력을 가진 저명 인사들을 만나는 일, 미국 신문을 통한 여론조성 둥으로 아주 바쁜 일정을 보내다 보니 상해로 가서 대통령직에 취임하는 것이 늦어졌다.


이러한 사정도 모르고 상해에 앉아 있는 몇몇 인사들은 빨리 상해로 건너와서 대통령직에 오르지 않는다고 대성화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1920년 3월 19일에는 이들 불평 인사들은 리 박사가 2개월내에 임시대통령직에 취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의정원(議政院)에 상정하여 그 익일인 3월 22일에 통과시켰다. 


그 의원서의 제안자들은


 

이 유필,윤 현진, 김 태윤, 이 영근, 계 봉우, 김 홍서, 이 춘숙, 오 윤환, 왕 삼덕,이 진산, 박 선, 이 규홍,이 원익, 유 정근, 신 익희,윤 기섭, 조 동우 


등이고 의원서 주문은 다음과 같다.

                               


「정부 건설초에 내외인심 통일이 미흡하고 만반 정무가 진홍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민족의 사명을 부담하고 광복대업을 성공하려는 정부의 수뇌자들이 한곳에 모여서 정책을 세우고사업을 진정하여야 민중이 정부방침 아래서 일치행동올 취할 터인데 지금 임시 대통령이 먼 곳에 있어서 정부 각원들을 회합하지 못하였고 정무를 살피지 않은 까닭에 일이 장애와 착오가 중첩되는 것이 중대 관계이다.


워싱턴에 김 규식과 서 재필이 있어서 외교 사무를 담임하는 터이니 임시대통령이 그곳올 떠나도 외교에 영향이 없을 것이고 정부의 사무와 원동군사운동과 인심윤화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자면 임시 대통령이 정부에 부임하여야 하겠으므로 이에 리 승만 초래를 제의하는 바이다」 



한국우호연맹을 결성해서 소기의 목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리 박사가 서 재필 박사,김 규식 박사, 정 한경씨, 임 병직씨 둥을 대동하고 외교전선에서 앞장올 서야 하는 것이 이때의 형편이었다. 미국 각처에서 많은 미국 시민을 모아 놓고 그의 애국 충정의 열변과 개별적인 막후교섭을 통한 그의 외교적인 수완은 가는 곳마다 환호와 머무는 곳마다 갈채를 받게 하였다. 순전히 이것은 리 박사의 지력과 피땀, 얼과 힘으로 맺어진 결정체이었다. 리 박사없이는 그와 같은 결실을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코리아는 모르고 있어도「승만 리」하면 알 정도였으니까 리 박사의 존재인식이 미국인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의정원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중차대한 외교활동을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모두 자격과 능력의 구분이 있고 한계가 있는 법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아무든지 그러한 외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상술의 임시정부의 의정원들이 리 박사 초래안(招來案)을 낸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인지 모른다.


그들은 리 박사가 대외적인 자기 소개를 대통령으로 표현 하였다고 심지어는 자칭 대통령이니 혹은 그러지 말라니 여러가지로 중상모라까지 하였다.


이상의 대통령 명칭은 후에 리 박사가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라는 말은 외국정치체제의 명칭에는 없는 말이고 또 이해시키기에도 어렵고 외교활동을 하는데도 지극히 불편하다고 주지시켜 고쳐지고 말았다.


사실 미국에서는 최고의 장(長)을 프레지던트라 나타내는고로 앞의 집정관 총재라는 말은 미국인이 이해하기도 어렵고, 또 설사 이해한다 하더라도 동양적인 군주제(君主制)와 같은 독재적 개념(獨裁的槪念)밖에 풍기지 아니하였다. 그런데도 임시정부에서 탁상공론을 일삼는 이들은 안 창호 선생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전문을 리 박사에게 쳤다.


                               

「처음의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그 후에 조직된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도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은 각하가 집정관 총재 직명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실 것이요,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므로 정부를 통일하는 수조(修條)를 위반하는 것이오니 대통령 행세를 하지 마시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 창호」 



이상의 전문에 대해서 리 박사는 다음과 같이 답전을 상해로 보냈다.

                           


「우리가 정부 승인을 얻으려고 전력하는데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사정을 발표한 까닭에 이제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약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 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니 그 책임은 당신네들에게 돌아 갈 것이므로 떠들지들 마시오.


미국 워싱턴에서 대통령 이 승 만」 


미국에서 리 박사를 반대하고 모함을 하던 두 거두가 모두 민중의 지지를 잃고 미국을 떠나 상해로 갔다. 그 두 거두란 안 창호씨와 박 용만씨였다. 전자는 홍사단을 조직하여 서북인 중심의 독립운동가이고 후자는 오늘 날 팔레스타인의 아람계 개릴라의 테러단체처럼 과격한 테러에 의한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리 박사의 민족차별없는 대동단결의 독립운동과 외교에 의한 조국의 회복을 주장하는 리 박사를 미주에서 몰아내고 자기들의 천국을 꿈꾸다가 동포들의 냉대를 받고 중국으로 갔던 자들이다. 나는 여기에 대한 관계 사건은 별도로 후술에서 설명하겠거니와 여하간 그들은 리 박사보다는 먼저 중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에서 실패한 그들의 참패를 설욕하려고 했던 것이다.


안 창호 선생은 자기 마음대로 조국의 이름을 빌어서 동포로부터 돈을 거두어 가지고는 1919년 5월 19일 상해에 박 용만씨보다는 약간 먼저 도착하였다. 박 용만씨는 비교적 리 박사를 반대하는 현상이 짙은 해삼위(브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해로 들어갔다. 해삼위는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자들이 많아서 자연히 자유민주주의의 나라에 살고 있는 리 박사를 모르거나 멀리하는 자가 많았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리 박사를 정면적으로 대립하는 공산주의자인 이 동휘씨(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총장), 그리고 해조신문의 신 채호씨 같은 사람이 있어서 리 박사를 타도하는데 연합전선을 펼 수 있었다. 그래서 리 박사가 상해에 도착하기 전에 리 박사를 반대하는 자들은 한 곳에 모여 여러가지 음모를 계속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리 박사를 당장 파면시키고 자기네들 마음대로 임시정부의 요원들을 선출하였으면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리 박사가 대통령이 된 것은 그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13도 대표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가면서 즉 죽음을 각오하고 비밀리에 모여 대통령을 선출한 것이다. 만약에 그들 마음대로 대통령을 바꾸었다가는 한국의 모든 동포들이 가만이 있지 않을 것을 그들은 두려워 하였다. 또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 마음대로 만든 임시정부는 동포들이 인정을 하지 않아 어떠한 지원도,특히 재정적 뒷받침이 없어서 해 나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감안한 그들은 리 박사를 비난하여 동포들로부터 리 박사를 멀리하도록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리 박사가 상해에 와서 집무(執務)를 하더라도 반대당에 몰려 집무를 할수 없도록 그들은 작당과 포섭을 하였다. 그렇기에 안 창호씨,박 용만씨, 이 동휘씨 둥이 모두 자기네들의 하던 만사(萬事)를 제치고 상해로 왔던 것이다. 입법기관인 임시 의정원이 자기네들 편에 있는한 리 박사는 대통령 자리에 부지(扶支)할 수가 없어서 쫓겨나지 않으면 사퇴할 수밖에 없도록 하여 놓고 리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지(死地)를 향해서 리 박사는가야 했었다.


그들을 탓하고 징벌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고 함께 손을 잡아 나라를 찾는데 오직 매진하기 위하여 상해의 길을 서둘렀다. 이제 자기가 없어도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가 당분간 일을 할수 있도록 하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리 박사가 상해로 가는 것은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목에는 미화(美貨) 30만불이라는 거액이 걸려 있었다. 누구나 리 박사를 잡아 일본정부세 바침으로 일확천금하는 횡재(橫財)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가 그 넓고도 먼 태평양을 건너가는 데는 일본의 감시선과 또 상해에 착륙했을 때 일본의 밀정,경찰들이 수두룩 했던 것이다. 이들을 어떻든 요행히 피해야 했다.


드디어 리 박사는 임 병직(林炳援)씨를 대동하고 웨스트 하이카호로 호항에서 1920년 11월 15일 상해로 향하였다. 일본 밀정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아니 아무도 그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하여 어디로 떠났다는 것을 모르도록 떠나기 위해서는 천신만고(千辛萬苦)를 다 겪어야했다.


배에 오르자마자 칸캉하 시체심에 숨어야 했다. 이 시체실은 중국인이 미국에서 사망해서 자기 본국의 고향에 묻히기를 원하는 사람의 시체를 운송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리 박사는 이때의 심회를 이렇게 피력하였다.


            

民國二年(一九二〇)十月十六日 與林炳稷 

潛入運物船  在鐵櫃経夜  待船發明曉出見

船人詳作清人様  自湖港  至上海 

民国二年至月天  布蛙遠客暗登船

板門重鐄洪爐暧  鐵壁四圍漆室玄 

山川渺莫明朝後   歲月支離此夜前  

太平洋上飄然去  誰識此中有九泉 

                               (時有華人屍體入棺在側) 


민국 2년(1920) 11월 16일에 임 병직과 더불어 몰래 화물선에 들어가 철궤 속에서 밤을 새고 출항을 기다려 어둠 새벽에 밖을 나가는데 청인의 모양을 가장하다. 호항에서 상해로 가면서


          

 민국 2년 동짓날 열엿샛날

하와이서 남몰래 배를 탓나니.


겹겹이 판자문에 난로불 있고

사면이 철벽이라 새까만 방안.


내일이면 산천도 아득하련만

이밤엔 세월도 어찌길더냐.


태평양 바다를 둥실 떠가니

이속의 저승을 누가 알리요.


(그때 중국인의 시체가 든 관이 곁에 있었음)



리 박사를 태운 배는 이 속에 그가 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밤새도록 달렸다. 날이 새자 중국인의 옷차림으로 하여 이름도 요한이라 바꾸어 버렸다. 하늘따라 끝도없는 태평양 바다의 1만5천리를 한시(漢詩)로써 날을 보내면서 20여 일 만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동년 12월 5일에 황포강(黃滿江)에 배가 정박하니 리 박사는 임 병직씨와 함께 배에 짐 나르는 인부처럼하여 명연관(孟淵館)에 머물렀다. 장 붕(張騰)이라는 사람올 시켜서 밀서를 우리 임시정부에 알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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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후 거기에는 북간도파, 국내파, 이남파, 서북파, 상해파 둥의 지역성을 띤 수 많은 파벌과 정체형태별(政體形態別)로 난립한 민주주의파,군주주의파, 입헌군주주의파,공산주의파 그리고 독립 방법론으로 나누어진 게릴라파, 특공대파, 외교론파 둥이 제멋대로 분립하여 활거하고 있었다. 이러한 난립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리 박사는 그의 정견(政見)을 뚜렷히 밝혔다.


일단 대통령에 취임한 리 박사는 어느 누구의 개인을 반박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독립 쟁취에 있어서의 첩경의 정체를 표방하였다.


                       


가. 특공대나 게릴라같은 의병단은 우리 민족의 기상을 나타내고 일본의 간장을 서늘하게 하는 방법으론 좋으나 이로 인해서 일본은 우리국내의 동포를 더욱 탄압하고 살상하기 때문에 당분간 우리 힘이 재정비 될 때까지 보류한다.


나. 오직 조국 독립운동의 주류적인 방법은 외교를 통해서 일본을 고립화시키고 난관에 빠뜨려 적절한 시기에 거족적인 봉기를 한다. 힘은 힘으로써 대결하는데는 일본과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아니 그 이상의 강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타도하여 우리 독립을 이룩하는 외교적 수단을 제일로 삼는다.


다. 공산주의는 동양 고유의 가정과 개인의 개성을 파괴하는 정치 체제인고로 이를 당연히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라. 그런고로 공산주의 국가와 제휴하거나 그의 원조로 독립운동을 전개 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리 박사의 정책 발표는 국가의 원수로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그의 확고부동한 백년대계의 정책을 선명(宣明)하게 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사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민족 분란의 회오리바람을 모으고 있었다.


리 박사는 이러한 악순환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임정요인들과 자주 만나서 호형호제(呼兄呼弟)로 허심탄회(虛心迫懷)하게 대화를 나누므로 격의(隔意)를 없애려고 하였다. 그리고 아침 8시 30분이면 모든 임정요인 및 젊은 독립투사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정좌정심(靜坐定心) 속에 더러운 인간의 정념들을 불사르도록 조예(朝禮)를 가졌다.


나는 리 박사의 1921년 3.1절 때에 상해에서 읊은 그분의 시를 읽고 넉넉히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시란 이러하다.



一九二一年三一節   在上海述懷 


    

半島忍看島族侵   綠江波怒白山陰.

百濟新羅隣誼重   壬辰乙未世替深. 

二千萬衆求生計   三十三良決死心. 

人和天地皆同力   常可燒除艦可沈. 




1921년 3.1절에 상해에서 회포를 기록함


          

참을손가 섬오랑케 내나랄 침략하여

압록강 파도치고 북악산 그늘졌네.


백제때 신라맨 이웃 정의 어넸는가

임진년 을미년 대를 이은 원수라니.


삼 천 만 우리겨레 살길올 찾다못해

삼십삼인 어진이 죽음으로 맹세했네.


사람만 뭉친다면 천지도 도움나니

병영도 불사르고 군함도 깨뜨릴시. 



우리는 이 시속에 담겨 있는 뜻을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람만 뭉친다면」못할 것이 없다는 간단한 구절이다. 시의 흐름을 우리 대한인의 타고난 민족성이 결코 남의 침략올 허락하지 않는다는 우리 민족사를 들었으며 그 흐름이 있는 한 우리는 뭉치기만 하면 그 일본의 총칼 정도야 얼마든지 깨뜨릴 수 있다는 그 분의 심회를 단적으로 표현했다고 보겠다.


이것이 그분의 우국 충정이건만 조회(朝會)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역파쟁,이념파쟁, 감투파쟁 등의 독버섯이 솟구쳐 올랐다. 리 박사는 자기와 함께 대동했던 임 병직씨 마져 거기에 말려드는 것 같아서 어느날 그를 불러 호되게 야단을 쳐야할 판이었다.


여기에 누구를 믿고 상해에 머물면서 싸움만 말리다가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하는 한심스러운 생각에 잠겨 저절로 부운환몽(浮雲幻夢)을 느끼게 하였다. 차라리 그는 한 사람의 어부가 되어서 이 고해(苦海)의 세상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온갖일 마치고 나서(人間萬事餘)

낚시터에 돌아와 고기를 낚네(歸約舊磯魚)


강호의 병이깊어 자취병들고(除跡湖潤)

성글은 비 연기 유유한생활(生涯煙雨疎)


푸른 산은 한동이 술에 어리고(一樽山景碧)

외로운 돛에는 달 빛 비었네(孤桃月光虛)


갈매기 해오리와 언약을 맺고(鷗路鳥同尋約)

물인가 구름인가 정처 없어(水雲無定居)


단풍잎에 찬 서리 젖어든 다음(寒楓霜落後)

갈 밭에 맑은이슬 갓내릴 즈음(晚荻露京初)


노래엊자 물결은 고요해지고(曲罷槍浪靜)

꿈을깨니 저녁밀물 밀려오누나(夢麵暮汐噓)


칠리탄(七里灘) 엄자롱(嚴子陵)은 스승이라면(可師嚴七里)

삼려대부(三大夫) 굴원(屈原)은 다정한친구(興子屈三閭)


긴 긴날 낚대끝에 저물어 들고(白日竿頭盡)

바람따라 조각 밴 갈대로 가네(斜風苦寸所如)


세상일 일러 무삼 저 달을 보소(興亡付笑指)

가는 세월 어찌하리 모두 다운명 (窮I述任居器)


명예나 의욕은 허튼일이라(名利辱常事)

어즈버 부귀도 폐허로구나(嗟呼富賣墟)


우장을 깁옷보다 낫게 여기고(衣褰猶勝錦)

수레 탈 생각은 아예 잊었네(加馬後秋忘車)

흠내(欽乃)곡 부르는 어위야 말로(欽乃聲中趣)

고기를 부려서가 아니람내다(世應不在漁)


라고 자기의 슬픈마음을 토로 하였다. 이와 같이 뇌리(腦裡)에 두 가지의 슬픈 생각이 비치었다.


첫째 그 하나는 그의 정치 지론인 외교활동을 위해서는 상해에 더 머물 수 없다는 것과, 둘째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서는 이곳 상해에서 가만히 앉아서 임정의 재정난으로 부하직원들의 불쌍한 참상을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렸다. 파쟁의 탁상 공론과 그 궁핍은 리 박사로 하여금 모처럼의 상해의 힘겨운 길이었건만 더 오래 머물 수 없게 하였다. 


기실 그것은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시간낭비 였다. 결코 리 박사가 정책 부재와 무능 그리고 덕망이 없어서 도피적 미국행이 아니었다. 혹자들이 혹평한 것처럼 무능.무덕하여 반대자의 등살에 못이기어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오직 그의 대통령 취임사에 밝힌 바와 같은 외교정책올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임정의 재정적 뒷바라지를 위하여 의연히 상해를 떠나는 발걸음이었다.


그 증거로써 미국으로 바로 직행하지 않고 외교 통로인 오스트리아, 스위스, 러시아를 들러 도미하게 된 것과 또 하나는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임시정부 명의로 된 공채권 발행과 동지식산 주식회사이다. 리 박사가 비록 이 먼 외교의 여정을 갖는다 하더라도 무책임하게 임정올 혼란에 두지는 아니하였다. 그는 신 규식,노 백린, 이 동녕, 손 정도, 이 시영 등 제씨를 국무원으로 해놓고 상해를 떠났다. 즉 자기가 없는 중에도 임정으로써의 모든 기능을 발휘하도록 해 놓았던 것이다. 


1921년 5월 20일에 미국에 도착한 리 박사의 일정은 매우 바쁘게 돌아갔다. 전기 워싱턴에서 조직한 구미위원부를 좀더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확대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국가에 임시정부의 국위선양에 역점을 두고 맹활약을 벌였다. 19개처의 한국우호연맹을 재점검하여 이를 새롭고도 더욱 공고히 하도록 서 재필, 임 병직, 현리 정, 프레드.R.돌프 등의 제씨에게 독려하였다.


그렇게해야 1921년 8월말 열강의 군축 회의에서 한국 임시정부의 인식도를 높일 수 있고 리 박사 자신이 임시 정부 대통령으로서의 그 외교정책을 편만(通滿)할 수가 있었다. 이 준비로 그는 동년 6월 29일에 호항에 들러 재미동포와 미국 시민에게 한국의 독립에 관심도를 환기시키기 시작, 전미주를 누비면서 그 일을 진작시켰다.


비록 리 박사는 세계열강의 군축회의에 공식적인 초청장올 받지 못하고 정회원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가 노리는 바는 바로 참가하는 거기에서 우리 임시정부의 존재의식을 군축회의에 모이는 모든 나라들에 게 선전하는 것이었다. 리 박사는 여기에 참석 전에도 신문지상올 통해서 세계에 한국이라는 정부가 있는 것을 주지시켰다. 


즉 그는 제이, 제롬, 월리암스라는 친우의 도움을 받아 신문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회견에서 리 박사는 우리 임시정부가 당연히 하나의 민족국가임을 세계가 인정을 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상해의 임시정부로부터 군축회의에 참가하는 위임장을 미 국무장관 헤이스에게 제출 하기도 했다. 

그 위임장 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요월 29일 정식으로 전각료의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 하였음을 이에 밝히는 바이다. 즉 대한민국 대통령 리 승만은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군비축소회의에 전권을 가질 한국 대표단을 다음과 같이 선정. 임명한다.


전권대사 리 승 만

전권부사 서 재 필 

비서관 헨리 정 

고문관 프래드.A.돌프


전권대사에게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며 대표 1명을 더 추가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대표단의 전인원은 5명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본 군축회의에 한국문제에 관한 주장을 제의할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군축 회의에서 제기되는 모든 협정,의정서,조약 일체에 대한 협정 및 체결할 권한을 부여하는 바이다.」 


라고 하였다.


헤이스 미 국무장관에게 제출한 서류는 그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많은 의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대한민족이 일본의 식민을 용납할 수 없으므로 우리 민족은 한사코 투쟁한다는 비장한 결의를 망명정부의 이름으로 만방(萬邦)에 밝혔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군축회의에의 정식 대표단 파견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옵서버 파견을 위해 리 박사는 노력하여 또 한국이라는 것을 계속 인식시켰다. 법률고문인 돌프씨로 하여금 1882년 한. 미조약에 의해서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는 논설을 쓰도록 하였다. 


이 논설은 미국인에게 인기를 모아 1921년 12월 1일자 미국 의회록에 수록될 만큼 중요시 되었다. 일본의 정치 평론가인 아다찌. 기모스께와 같은 일본인도 이 논설을 읽고 일본의 한국합방은 부당한 것이며 한국인은 한국인의 정부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진데 일본인 아닌 사람들에게야 더욱더 이 논설은 고무적이었다. 그 일본인은 1921년도 「평론의 평론」지 10월호에서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에 대해서 너무나 고압적인 방법으로 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웃집 뒷뜰에 들어가서 그집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집의 주인을 군소리말고 물러나가 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는 미국인이 그들 영토의 주인인 인디안들에 대해 해온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있다. 또한 우리는 영국이 인도에서, 프랑스가 인도지나에서, 독일이 남아프리카에서 한 것과 같은 방법을 취하여 세계 열강의 하나로 자처하게 되었다.」 


라고 피력했다.


이것은 큰 외교정책상의 수확이었다. 우리의 숙적 일본인이 이 정도로 비분강개하여 독백을 하였으니 자유를 사랑하며 형유하고 있는 미국인에게 큰 파문과 선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은 몬로주의에 철저한 잠재의식이 남아 있어서 제3국의 분쟁에 대해서 직접 개입을 꺼리고 있었다. 오히려 일부 미국 정치인은 일본의 인구가 너무나 조밀하여 과잉상태를 이루고 있으므로 한국과 같은 인근 미개국을 이용하므로 일본의 야욕올 한국에서 충족하여 더 이상 세계를 소란시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시는 제1차세계대전과 같은 불행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계열강은 약소국가를 위하는 나머지 대전을 유발시키지 않기 위해서 다옴과 같은 유행어까지 흥행하던 때였다. 즉 「얻을 수 있는 자에게는 얻도록하고 잃어야 될 자에게는 잃도록 하라」는 성구의 한 귀절과 같은 모토가 판을치던 1921년과 1922년대였기 때문에 불행히 리 박사의 약소국가의 존재권은 잘 먹혀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러나 리 박사는 여기에 실망하여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여론을 실제적으로 약소국가를 우1하는데로 끌기 위해서 국제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고 불철주야 연구 하기도 하였다. 그의 연구논문은 세계 열강의 부당성과 약소국가의 자주성을 성토하고 고무하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탈취할 수 있는데로 탈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통용 될 때 강대국은 이해가 상반되는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정치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 결과가 전쟁을 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오직 이러한 현실에서 외면 당한 약소국민만이 그들의 정당한 주장조차 펴지 못하고 주권을 유린 당하게 되는 것이다.


〈굶주림과 인구의 과잉〉이라는 명목을 위해서 강대국은 어떠한 짓을 해도 좋다는 것을 차춤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약소국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실을 오히려 수치로 생각하고 표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반면에 강대국은 항상 세력의 확장을 우1하여 필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정통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약소국들은 항상 약한상태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할 뿐만아니라 날로 더욱 약소국의 위치로 전락되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강대국들의 팽창은 가끔 이해의 상호 충돌이라는 자연스러운 귀결에 인도됨으로써 대규모의 주기적인 전쟁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 결과는 당연한 것인데 강대국들은 이런 이유로 하여 전쟁을 해도 그로 말미암아 상호간에 영속적인 대적감정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이 끝나면 전승국은 패전강국을 전쟁전의 상태로 회복해 주기 위하여 치밀하게 그 부흥을 도와주고 있다. 이와 같이 익살맞은 사실은 당연한 것이며 역사는 그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리 박사는 이 글에서 미래 역사의 예언자적인 말을 했다고 하겠다. 약소국가를 삼키는 강대국을 그냥두면 필경은 강대국끼리 대싸움이 벌어져서 전승국은 싸우는데 필사의 힘을 쏟아야 하였다. 싸운 후에도 패전국의 부흥을 위해서 원조를 해야하는 고충이 있기 때문에 강대국은 처음부터 약소국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역사는 리 박사의 예언적인 말 그대로 따라 역사를 되풀이 하였다. 약소국을 삼킨 제열강은 마침내 자기네들끼리 싸움이 일어나서 제2차세계대전을 발발시키고 말았다. 연합국이 전승올 하였으나 미국은 그의 우방국가를 복구하는데 열중했을 뿐만 아니라 적국이었던 일본,독일, 이태리까지 재건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리 박사의 예언 그대로 미국은 움직여야 했고, 또 사실 그렇게 했다. 이 얼마나 위대한 그의 판단이며 예언적 역사관인가?


그래서「역사의 개관에(The Outline of History)을 쓴 바 있는 유명한 영국의 대역사가 H.G.웰스끼사 군축회의에 참석차 와서 이상의 리 박사 글을 읽고 굑찬을 했던 것이다. 그는 이 군축회의에 참석하여 그 기사를 쓰려고 왔었다. 후에 리 박사는 될스씨를 초청하여 만났다. 그 자리에서 리 박사는 「한국의 독립은 동양의 평화이며 세계의 평화까지 직결 된다」고 하였다. 될스교수는 리 박사의 조리있는 그의 해박한 식견에 감탄함과 동시에 전적으로 리 박사의 의향에 대찬동을 보냈다.


과연 리 박사는 한민족의 독립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정치가, 교육가, 예언적 역사가였다. 웰스교수는 세계가 아는 대역사가이며 세계 대석학이 었다. 그는 영국의 18세기 대역사가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 이후 대역사가로서 첫째 손가락을 꼽을 수 있는 사가(史家)이다. 


그러한 그가 감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었다. 따라서 리 박사의 국제적 미래관이 소수의 해박한 대석학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바르게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긍정된다. 이것은 흡사 아인슈타인이 처음 상대성원리를 이 세상에 발표하였을 때 이를 이해하는 과학자가 세계에서 불과 한두 사람밖에 없었던 사례와 같은 경우였다.


나는 이래서 아인슈타인하면 현대 과학을 대표하고 리 승만하면 현대 국제 외교정치를 대표한다고 서슴지 않고 말하고 싶다.이러한 지.덕.용(知.德.勇)을 겸비한 리 박사에 대해서 우리 임시정부의 몇몇 깨우치지 못한 인사들은 어떠하였던가? 그들은 즉 아벨에게는 가인이 있듯이, 그리고 이 순신에게는 원균이가 있둣이 그러한 행동을 했었다. 


그들은 1922년 6월 대통령 불신임을 가결하고 이어서 1925년 3월에는 대통령을 탄핵하여 파면시키고 말았다. 아 ! 이 얼마나 비통스러운 일인가 ? 일찌기 우리 반 만년 역사에서 이와 같은 슬픈 일이 몇번이나 있었던가? 아무리 몽진(蒙塵)같은 세상이라 하더라도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비탄에 잠겨 나는 그 흑백을 이제 파헤 친다.


상해 임시정부의 의정원들이 리 박사에 대한 비난과 파면음모를 꾸미고 있을때 리 박사는 미주의 한인 동포를 하나로 결속하고 있었다.


가장 한인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하와이로 1922년 요월에 와서 지난해 7월 7일 조직했던 대한인 동지회름 지두지휘하여 견고히하고 1924년 11월에는 동지식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동포가 있는 곳에 그를 필요로 했으며 그가 있는 곳에 동포사회는 하나로 뭉쳐져서 민족 광복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졌다.


이렇게 동포들로부터 각광(脚光)을 한몸에 받으니 상해 임정 의정원들은 빨리 리 박사를 대통령직에서 면책, 파면하여 민족의 지도자로서 일을 더 못하도록 서둘렀다. 그 결과 그들은 일단 리 박사의 의향부터 알아보기 위해서 전보(電報)를 쳤다.


         

 1922년 4월 17일 상해발 전보


임시 대통령 리 승만 각하

정부의 형세가 급하니 유지방침을 보내시고 난국을 정돈 하시오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이 전보문의「정부의 형세가 급하다」는 말은 리 박사를 대통령직에서몰아내기 위한 저희들의 원성(怨聲)과 불평이 대단하다는 뜻이고「유지방침」이란 그 불평의 소요를 없이 하는 만족한 해답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정부의 형세가 급하다」는 말을 난국이라 표현한 것은 임시정부의 존재목적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망각하여 버리고 다만 그 임시정부의 목적이 완전한 대한민국의 독립이란 기치(旗織) 아래 리 박사가 미국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알았던들 그리고 그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관심있게 생각하였던들 적어도 이상의 슬픈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혹 자기 네들끼리 힘든 일이 있고 잡음 이 있다 하더라도 외교일선에서 고전 분투하는 리 박사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격려를 하기 위해서더라도 그러한 말은 자중하여 삼가해야 했을 것이다.


리 박사는 이 전보문을 받고 그들의 심정이나 상태를 너무나 잘 간파 (看破)하고 있었다. 아직도 독립이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정권을 잡겠다고 인간관계, 지역관계, 이념관계 등으로 천갈래 만갈래 나누어 씨우고만 있는 그들은 상해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리 박사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파쟁 일로로 향하고 있는 그들을 깊이 생각하는 중 리 박사는 단안올 내렸다. 그 단안이란 리 박사 자신이 외교활동을 미주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종래의 외교활동만의 독립운동을 좀 누그려 군사활동의 방법도 허용하는 정책 실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익적(右翼的)인 건전한 군사방법이었지 테로적인 극단파나 공산주의적인 사보타즈(Sabotage)는 아니었다.


그래서 리 박사는 테로적 극단파도 아니며 공산주의자도 아닌 노 백린 장군을 군무 총장에서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그밖의 내각 조직도 당파싸움을 지양하고 내부분열을 막는 조각(祖閣)을 하였다. 따라서 총리는 대통령의 최종 결재를 통해서 재가(裁可)하도록 했었다. 

답전 하기를


       

1922년 4월 18일 워싱턴발 전보


노 백린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니 내각을 다시 조직하고 나의 결재를 받은 후에 실시 하시오


워싱턴 리 승 만 



라고 했을 때 그들은 이 답전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안 창호씨의 홍사단,박 용만씨의 극렬파,이 동휘씨의 공산주의파가 임정의원을 움직여 노 백린씨의 국무총리 임명을 불능하게 만들었다.

노동총판에 임명되었던 안 창호씨는 명분없는 이유를 갖고 사퇴하고 말았다. 그의 사퇴는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사퇴를 연발케 만들어 임시정부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완전히 임시정부를 무정부(無政府)상태로 만들어서 리 박사의 행정체제를 말살 해버리려는 의도였다. 

이들은 한 달간 권모술수를 다하여 싸운 끝에 대통령인 리 박사의 노 백린 국무총리 지명을 상세한 이유, 설명도 없이 거부 답전을 보냈다.


        

1922년 5월 16일 상해발 전보 임시 대통령 리 승만 각하


노 백린은 국무 총리직에 취임이 불능하고 정부에 각원이 없으니 무정부상태이오. 속히 책임을 이행하시되 5일 안으로 회답 하시오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민족의 독립을 한다는 양심에서 그리고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체제론에서 볼 때 이 전보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었다. 13도의 대한민국 도대표들이 리 박사 중심의 독립올 위한 정부를 세워 일하도록 하였는데 도무지 일을 할수 없도록 사사건건(事事件件) 물고 늘어지니 민심을 저버리는 행위이며 천심에 역행을 하는 행위를 자행(恣行)하였다. 


소위 임정의원이란 자들이 입법기관을 대행하고 있으나 그들은 민족이 모르는 사람인 동시에 신망있는 인사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파에서 뽑아서 파송한 사람이었지 민족이 뽑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들은 민족보다 자기 당파를, 독립보다 정권을 노리는 무리들이었다. 파쟁을 일으켜 그들의 존재의식을 나타내고 거기에서 얻자는 그들이었다. 생산적인 건설을 해서 독립운동을 하자는데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파벌싸움으로 무정부가 되어도 싸움은 계속되었고 분열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들은 진정으로 민족애도 조국광복도 없었다. 있다면 그들의 존재를 위해서이고 그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였다. 이 분열의 비극으로 일본이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마련한다고 해도 또는 우리 민족이 임시정부를 불신임해도 거기엔 아랑곳없는 위인들이었다.


이러한 그들인지라 리 박사는 참다 못해서 다음과 같은 답전을 쳐야 했다.


 

 1922년 5월 22일 워싱턴발 전보


「당신들이 소란을 일으키면 이곳의 재정수합하는 일이 방해 되어서 재정곤란을 당할터이니 속히 정돈 하시오」


워싱턴 리 승 만



이 전보를 칠 때 리박사는 앞이 캄캄하였다. 한말 7년의 옥고생활에 서 모진고문,굶주림,추위에서 얻은 신병이 도져 온몸에 경련을 대지진처럼 일으켰다. 두 손을 움켜잡고 전안면(顔面)부터 발 끝까지 바늘 끝으로 찌르는 듯한 그 고통스러운 경련을 참아야 하였다.


이 전보는 리 박사가 상해 임시정부를 저으기 위협하여 리 박사의 의사를 추종하는 그러한 수단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이때에 미주에서는 상해 임시정부가 혼란을 일으키는 그 여파의 물결이 미쳐 홍사단과 반 리 박사(反李博士)의 국민회 일부파가 작당하여 광복자금 염출에 있어서 큰 지장올 일으키고 있었다. 상해에서 흘러들어오는 소리는 모두 리 박사를 비난하고 불신임하는 이야기라서 그러한 임시정부세 무엇 때문에 미주의 교포들이 돈을 거두어서 보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재미 동포들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이라는 말과 같이 리 박사가 하는 일을 직접보고 듣고 있는고로 상해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믿지 않았다. 우리 민족중에 리 박사만큼 많이 배우고 덕이 많은 사람으로서 그렇게 국위선양(國威宣揚)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포들은 신문, 라디오, 미국인의 입을 통해서 매일 리 박사가 조국독립운동을 위해서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어서 거의 모두가 리 박사를 찬양하고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헌데 임시정부 의정원들이 리 박사에 대한 그와 같은 행동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것은 리 박사의 민족지도자로서의 또 하나의 가슴아픈 일이었다. 민족이 민족을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는만큼 더 슬픈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슬픈 일은 드디어 일어나고 말았다. 안 창호, 이 동휘, 박 용만 둥의 제씨파가 임정의원을올 조종하고 있는한, 리 박사의 애국충정의 애소는 묵살되고 말았다. 그들은 리 박사의 대통령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였다는 통지를 전보로 보냈던 것이다.


           

1922년 6월 5일 상해발 전보


「임시 대통령 리 승만 각하

시국이 지극히 어려운데 임시 대통령과 국무원들이 정부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므로 임시 대통령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 되었으니 의향을 말하시오」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기가차는 이 전보를 받은 리 박사는 곧 다음과 같이 타전을 하였다.


         

 1922년 6월 8일 워싱턴발 전보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정부를 조직하고 이로써 정식 정부가 설립 될때까지 이행하자는 약법이 있으므로 정식 후임자가 나오기 전에는 사명을 전할 곳이 없어서 사면하지 못하겠소」


워싱턴 리 승 만


리 박사 대통령직은 사면하지 못한다는 전보를 접수한 임정 의원들은 1922년 6월 10일에 다시 오 명선, 안 정근, 조 상섭, 양 기하,차 이석과 같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불신임 안을 제출하여 일주일 후인 6월 17일에 통과시켰다. 이러한 처사에 대해서 상해의 한인 동포들은 그 부당성 에 대해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어째서 리 박사가 불신임되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벌써부터 상해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은 관심을 가져왔다. 이 불신임안은 임정의 몇몇 소수의 의정원들에 의해서 결정될 일이 아니라해서 이것을 범국민적으로 조사와 여론에 붙여져야 한다하여 1921년 5월 21일에 시국강연대회가 열려졌다.


여기서 동년 5월 29일에 국민대표회 발기회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여 운형, 한 진교, 강 구우,이 탁,안 창호, 서 병호,김 병조, 김 규식,김 위택,남 형우,송 병조, 최 동호,남 공선, 윤 현진,이 병열,도 익권,김 만겸, 신 숙,김 철,최 대갑,양 현,원 세훈,나 용균, 이 규홍,이 원익


이 국민대피의는 더욱 확장하여 일본, 봉천,천진,혹통강, 길림, 상해, 남경, 북경,모스코,연해주,치따, 미주,하와이, 맥시코 둥지 에 대표를 파송하여 1923년 1월 3일 상해 불란서 법조계에서 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에서 대회 대표들로부터 리 박사와 내각을 불신임한 처사에 대해서 엄중한 항의를 받았다. 3개월 동안 속개된 대회에서 92차의 회의를 가져 1백 50건의 안건을 토론 하였으나 무엇 하나 성사되는 일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모두 제각기 목적하는 바가 달랐기때문이다. 안 창호, 박 용만,여 운형, 이 동휘, 김 규식 둥의 제씨는 이 국민대회를 통해서 모두 제각기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세가 그들을 대통령을 추대하기 위해서 리 박사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하자고 하지를 않았다.


이 공기를 감안한 김 구,이 시영,손 정도,손 병조 둥의 제씨들은 모두 리 박사 중심의 현체제를 끌 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민족독립운동의 파당을 불식하고 효과적으로 뭉쳐져서 독립 쟁취를 하는 것이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직에 관심을 가진 인사들은 오직 리 박사가 몰러나가야 하는 쪽으로 동조하여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의 국민 대표회의가 파선(破船)안 할 리가 없었다. 리 박사가 참석하지 않은 이 회의에서 리 박사의 반대파들이 대회의 주도권을 쥐고 각 대표들을 설유하여 자기네들 편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그 생각은 한낱 헛된 꿈으로 변하고 말았다. 


오히려 그 국민대표회의에서 자기들의 꿍꿍이를 노출시키는 큰 오산(誤算)밖에 가져오지 않았다. 이래서 그들은 유아무야(有苦無苦)하여 이 회의를 오리무중에 끝내고 끌다 가는 도리어 변을 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이 회를 유산시키고 말았다.


왜냐하면 리 박사의 우익 민주주의 독립단 말고도 이 동휘, 문 창범, 윤 해 등의 제씨는 임시정부를 완전히 없애 그 위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암살, 방화, 파괴등을 불사하는 단체이어서 안 창호, 박 용만 제씨 등의 인사들은 이를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리 박사의 반대파들은 국민회의와 같은 범국민적 집회에서 리 박사의 신임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종래의 방법대로하여 리 박사를 몰아낼 수 밖에 없었다. 즉 임정의 의정원을 움직여서 목적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행동에 옮길 수는 없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리 박사의 지지자가 너무나 많자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 대회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혼이 났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주를 받아 임정의 의정원에서 리 박사를 불신임하여 그안을 가결했던 것을 철회했던 것이다. 빗발치는 면책은 언제이며 그리고 그것을 철회할 때는 언제인지 도무지 알수 없는 그들이었다. 이렇게 주체없는 그들인지라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다는 안도감에서 자기 잘못을 솔직히 터놓지 않고 졸열한 자기 변명의,소위 대국쇄신안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것에 이르기를

                  

  • 가.  정국의 혼란과 임시정부의 혼돈상태를 교정하려던 결과가 오늘의 현상을 초래하였고 지금에 쌓인 착오를 문제마다 교정하려면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며 문제도 해결되치 않을 것임 
  • 나.  임시정부 문제를 중심하고 시비하던 우리의 충돌이 모두 정부를 위함이고 정부 존재의 위기를 부르려던 것이 아니었으나 그 시비로 인하여 정부의 존폐 문제가 발생되었으니 이제 모든 의사 차이를 무조건으로 쓸어버리고 정부 후원에 동심동력하지 않을 수 없음 
  • 다.  임시정부의 혼란한 정형을 정돈하는 첫계단으로 임시 대통령 불신임안을 취소하고 리 승만 박사와 각계인사들을 합석시켜 대국쇄신의 방책을 강구하기로 제안함 


이라 하였다. 아무리 자기네들의 잘못을 합법화시켜 가면서 이 발표문을 선포하였으나 거기에는 읽는 자마다 우스운 자기 변명이 있는 것을 발견할 줄 나는 안다. 


그들의 잘못을 자인하는

              

  •  첫째 이유가 임시정부의 혼란은 자기들이 일으켰다는 것과 그 혼란은 좀 잘해 보려고 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더욱 소란을 야기시켜 임시정부 존폐 문제까지 가져 왔다는 것
  • 둘째 임시정부를 무조건 지지하지 못하여 공연히 피해만 주었으니 앞으로 임시정부를 위해서 동심동력 하겠다는 것. 
  • 셋째 리 승만 박사에 대해서 불신임안이 잘못되어서 이를 취소하여 리 박사와 각계 인사들의 말을 듣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진술이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 깊은 내심에는 기회만 있으면 리 박사를 쫓아내고 그들의 그 욕구 충족을 취하여 보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진정한 뉘우침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질책하는 시국의 상황을 교묘히 피하여 보려는 용어로 대국쇄신안을 작성하였다. 임시정부를 동심동력하고 리 박사를 따르겠다 하면서도 한편에는 「각계 인사들을 합석시키라」해서 배신을 할 수있는 길올 열어 놓았다. 이 문구는 임시정부의 대통령 정책에 순응하는 것 보다는 그들이 소속한 수령들의 말을 추종하겠다는 저의로 해석 될 수도 있었다.


이 대국쇄신안 발표에 대해서 리 박사는 아무런 논평도 하지를 않았다. 그들의 사탕발림한 간계에 넘어갈 리 박사가 아니었다. 두고보면 알 것을 구태여 이러니 저러니 해서 마음을 더욱 상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다만 침묵으로써 시종일관하여 침묵의 지혜와 미덕을 갖추었다. 오직 맡은 바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기만 했었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고 그들을 주시해 보던 이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니 리 박사의 허락도 없이 헌법 제17조에 의한다 해서 이 동녕씨를 대통령 직권대리로 임명하였다. 분명히 국무총리라는 직위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대통령 직권대리라 하여 리 박사를 무시해 버리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리 박사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약은 술책을 썼다. 


설사 대통령직에 있다 하더라도 무력해진 한갖 명예직에 불과하도록 하려고 획책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한 정부안에 두 사람이 대통령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구미외교구락부와 상해임정 사이의 알력을 자아내었다. 리 박사는 이 함정에서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이 함정은 민족의 화기애애한 피가 자연스럽게 순환하지 않기 때문에 전민족의 독립운동에 고통스러운 수난을 안겨다 주었다.


대국쇄신안으로 다시는 이 박사를 몰아내지 않겠다고 하던 그들이 1924년 4월 23일 이 동녕씨를 대통령 직무대리로 마음대로 앉혀 놓았다가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자 젊은 극렬파인 조 덕율(超德津),김 두만(金斗萬)등을 앞세워 11명의 임정 의정원들의 이름으로 드디어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1925년 3월 13일에 상정된 탄핵안을 


                 

 「임시 대통령 리 승만은 시세에 암매하여 정견이 없고 무소불위의 독재 행동을 감행하였으며 포용과 덕성이 결핍하여 민주주의 국가 정부의 책임자 자격이 없음을 판정함.


임시 대통령 리 승만이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탄없이 저촉하였고 국정을 혼란시켜서 국법의 신성과 정부의 위신을 타락하게 하였음을 판정함.임시 대통령 이 승만의 범과 사실을 심리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 4장 제 21조 제14항에 의하여서 탄핵 면직에 해당함을 관정함」



이라 하였다.


이 탄핵안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실무근한 말로써 리 박사를 탄핵 했었다. 리 박사는 세계가 인정하는 외교 정치인으로서 청사에 길이 남을 분이었다. 그러한 분을 시세에 암매하다고 낙인을 찍었다. 영국의 웰스교수가 찬탄하는 그 지식을 그들은 무식하다고 혹평을 하였다. 그리고 세계를 누비면서 그의 외교정책을 회담,신문,라디오를 통하여 외치기도 하고 책으로 저술도 하고있는 그를 일러서 정견없는 정치인으로 못을 박아 부정해 버렸다. 이러한 통탄지사의 탄핵안이 꾸며져서 그들은 임시정부 대통령 리 승만 박사 탄핵안을 상정하였다.


이 탄핵안은 5가지 항목으로 나뉘어져 설명되어 있는데


                                                                

 첫째 그들은 리 박사가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 자리를 지키지 않은 근무지 이탈을 들고 있다. 리 박사가 무엇 때문에 상해에서 떠나 구미제국에서 머물러야 했으며 거기서 어떠한 정견을 갖고 민족 독립운동에 여하히 공헌하였는가를 조금도 고려함이 없이 정부 소재지에서 이탈하여 국사를 그르쳤다는 것이다.


둘째 임시 의정원의 동의없이 리 박사가 함부로 외교활동올 하며 거기에 준한 발언과 성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또한 리 박사가 그때그때 국제정세의 추이에 따라서 조국광복을 외교적으로 그 첩경을 가져 오려는 피나는 눈물의 노고와 결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재고와 평가도 없이 무조건 독재자라고 험담을 늘어놓았다.


세째 리 박사의 대통령직이 종신제로 착각을 하여 영원한 독재 정권을 배제하기 위해서 탄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를 만들어 낸 민족의 13도 대표가 임정을 만들때 대통령의 임기는 조국이 독립할 때 까지라고 명시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 형성의 기본원칙 6개 조항 중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 것을 가지고 그들은 리 박사가 독재를 원한 나머지 종신독재를 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네째 리 박사의 외교정책의 한 일환책으로 착수하였던 워싱턴의 구미외교구락부를 가리켜 임시정부 이상의 기관을 만들어 두개의 정부를 만들었다는 책임의 추궁이었다. 오늘날 한국에는 중앙청이 있고 청와대가 있다. 미국에도 대통령이 움직일 때 마다 현 백악관 이외에 소백악관이니 하면서 별명을 붙이고 있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이 타고 다니는 비행기까지도 그러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하나 두 개의 정부가 있다고 탄핵을 하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상해가 우리 강토가 아니고 임시적인 망명지에 불과하다고 하면 미국 워싱턴이면 어떠며,영국의 런던이면 어떠랴! 더우기 리 박사가 상해보다는 워싱턴이 외교활동 무대로써 유리하다고 할 때 것은 더욱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들은 한국 대대로 내려오는 반역의 대역죄가 가장 중한 죄인줄만 알고 그것을 리 박사에게 덮어 예우자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던지 어마어마한 죄로 리 박사가 탄핵된 것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구미외교구락부는 그 명칭에서 당장 알듯이 그것은 정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3도의 대표들이 리 박사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대통령 자리를 가만히 않아서 지키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구미외교구락부나 무엇이든 간에 조국광복을 위해서 일해 줄 것을 당부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리 박사는 구미위원부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외교적으로 펴나갔고 이를 운영하자니 예산도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갖고 그들은 부당국고 횡령이니 부정이니하여 리 박사를 신랄하게 탄핵을 하였다.


다섯째 재미 한인 사회에 대해서 리 박사가 파쟁과 소란을 일으켰다 는 것이다. 이미 나는 미주에서 동포를 이간시키고 파쟁과 소란을 일삼다가 상해로 도망하다시피 가버린 안 창호, 박 용만 둥 제씨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므로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지 않겠다. 그들이 이것을 트집을 잡아서 이야기 할 때 탄핵의 장본인들이 누구인줄 알 것이다. 


즉 리 박사를 탄핵하겠다고 하는 인물들이 모두 안 창호씨와 박 용만씨를 두문해서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모두 한패거리였다. 그러나 안 창호씨는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처신올 했으니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이었다.


이상의 내용이 포함된 탄핵안을 임정의원들은 1925년 3월 18일에 탄핵토의를 종결짓고 그 표결을 서둘렀다. 마침내 동년 3월 23일 리 박사 의 탄핵을 표결에 붙인 바 출석의원 4분의 3의 찬성을 얻어 리 박사의 대통령직올 탄핵 면직시키고 말았다.


탄핵 후 그들은 민족이 잘 알지도 못하는 80고령의 박 은식씨를 추대하여 저희들끼리 싸워서 난장판이 되어 이것이야말로 무정부상태를 만들고 말았다. 리 박사에게 동조하고 절친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없었다면 임시정부는 그것으로써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다. 김구 선생은 리 박사를 처음 한성정부가 대통령으로 세웠던 것올 그대로 인정하여 임정을 광복 때까지 끌고 나갔다. 후술에서도 다루겠지만 김 구 선생 자신은 임정의 주석으로, 그리고 리 승만 박사는 임정의 대통령으로 모든 예를 다 하였다.


참으로 임정의 그 사람들 가운데 어진이도 있었지만 한때 잠시나마 민족의 역사에 준엄한 심판을 받을 사람도 없지 않아서 조국 독립운동에 적지않은 격동을 겪어야 하였다. 심판이 민족과 역사의 심판인 만큼 이 문제는 두고두고 내 민족 후예(後裔)들이 자잘못을 가려가면서 역사의 귀감(龜監)으로 삼을 줄 안다.


내가 왜 이러한 말을 하느냐하면 아직도 상당수의 우리 민족이 임정 초에 벌어진 사실을 바르게 잘 알고 있지 아니하여 더러는 이 박사를 반대하는 자들의 말과 글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박사는 결코 한 개인으로 끝나는 인물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 민족의 지도자였던 만큼 그 분의 뜻을 찬성하고 따랐던 수많은 민족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기억 해야 할 것이다. 


그분 하나를 비난하고 공격 한다는 것은 그분을 따랐던 모든 내민족에 대해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분 중심으로 수없는 동포들이,아니 절대 다수의 동포들이 일본에 대항해서 싸웠던 것이다. 그들 대다수의 동포들의 숭고한 그 조국애와 그 투쟁을 정곡(正鵠)의 입장에서 민족사가 기록되어져야 하겠기에 나는 임정의 초창기를 회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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