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1. 흥사단의 북미실업주식회사


북미실업주식회사는 이민 초기사에 있어서 재미 동포들에게 대실망을 준 기업체이었다.


이 기업체로 인해서 수많은 교포가 자기 생활의 파탄과 민족을 불신하는 풍조까지 낳았다. 그리고 기업의 사기성(詐歎性)이 무엇인지를 배 우고 깨달았다. 또한 애국이란 미명(美名)아래 동족들의 돈을 끌어모아 흥사단이 어떻게 처신하며 행동했는가도 알았다.


북미실업주식회사는 1917년 1월 20일 조직되었다. 강원도를 고향으로 하는 최 덕규씨가 자기의 전재산 5천불을 탕진하면서까지 흥사단의 협잡을 가주법정에 고발함으로써 이 회사는 1927년에 완전히 폐사(廢社)되고 말았다. 


최 덕규씨는 일찌기 20세기 벽두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노동과 이민고(移民苦)의 고통 속에서 만난을 참고 돈을 어느 정도 벌었던 사람이다. 상당한 돈을 북미실업주식회사에 투자하였었다. 그가 벼농사를 하면서 돈을 거의 여기에 투자하여 한인도 미국인처럼 큰 기업운영을 하자는데 전적인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20년도의 대장마로 북미실업주식회사가 흥사단의 돈은 갚으면서 자기 돈을 갚지 않자 법에 고발을 했었다. 그의 생각에는 홍사단은 북미실업주식회사의 모체이며 또 동일인들이 경영하는 업체이며 그리고 민족을 위해서 있는 기관인데도 자기네들 돈만 먼저 챙기고 남의 돈은 갚지 않은 그 불의에 대한 의분이었다. 이 의분의 고소로 전재미 교포가 법정투쟁에서 오는 폭로를 기사화한 것을 읽고 흥사단의 정체를 알았다. 그리고 동포들은 몹시 분노했으며 슬퍼했다.



North American Industrial Stock Company 1_yellow.jpg

피고소인: 송종익, 안창호, 정봉규, 임준기(회사와 관계된 흥사단회원)


North American Industrial Stock Company 2.jpg

피해를 당한 대부분이 대한인국민회 회원인 원고자 명단



물론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설립자는 흥사단 창설자인 안 창호 선생이었다. 그는 홍사단의 제2인자인 송 종익씨를 재무책임자로 앉혀 놓았다. 그는 흥사단의 초창기부터 중역의 역활을 했으며 후에는 한때 흥사단의 이사장까지 하였다. 여기서 하나 우스운 것은 그가 경북 대구 사람이라는 것이다. 홍사단이 거의 서북인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경상도 사람인 그가 홍사단의 중역까지 맡게 된 것은 홍사단의 본래 취지에 어긋나는 사태가 돌발한 것이다.


안 창호씨가 홍사단 초창기 발기모임 때 홍사단이 전국적인 단체인 것을 표방하기 위해서 내세운 8도 대표 중의 한 사람이 송 종익씨였다. 비록 안 창호씨는 서북인 중심으로그의 홍사단을 끌고 나가려 했지만 그것은 될 수가 없었다. 민족의 피는 흐르는 물 같아서 그렇게 서북인 중심만이라는 계획을 고정시켜 놓을 수 없었다. 송 종익씨는 흡사 로마 제국 내에 모든 문화분야는 희랍인이 맡아하듯 미국의 백인중심사회에서 흑인이 자기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둣 그러한 현상격의 사람이었다.


회사의 설립 위원들은 모두 홍사단 사람들로 맹 정희. 심 관희. 백 영숙. 김 인수. 정 봉규,임 준기,김 사원,조 성화 등이었다. 회사설립의 총자본금은 양차에 걸쳐 투자 되었는데 첫번째 것은 4만5천불이고 두번째는 5만불로써 총자본금은 9만5천불의 주식회사이었다. 한 주당 1 백불씩하여 고시하였는데 돈 갖고 있는 교포는 거의 여기에 참가해서 투자하였다. 나도 이때에 즉 1918년도에 그간 미국에 와서 악전고투하여 모은 돈 8백불로 여덟개의 주를 샀었다. 비록 조국광복의 방법은 안 창호 선생과는 다르나 「비지네스는 비지네스로」처리하고 싶은 것이 나의 사업 신념이었기 때문에 나는 전재산을 투자하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가주에 살고 있는 교포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당시 리 승만 박사는 주로 교포가 많이 모여 사는 하와이나 또 그가 외교활동올 하기가 좋은 워싱턴에 상주하는 일이 많으므로 자연히 가주에는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 틈올 타서 안 창호씨는 기백명이 살고 있는 가주내 안착하여 정치문제에서는 리 박사에게 실패했으나 경제문제에서는 가주 동포들로부터 신임을 얻어 보려고 했었다. 그 계획은 아주 적중되어 나부터도 한인 기업체가 없는 미주 본토에서 그의 선전은 구미를 돋구었던 것이다.



1903년부터 한국인의 미국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하와이를 거쳐 혹은 바로 미국 본토에 상륙하여 20년, 10년, 몇 년을 보내는 동안에 수중에 얼마씩의 돈을 갖게 되었다. 말과 미국은행 절차를 잘 모르는 한인들은 은행구실겸, 기업체인 북미실업주식회사에 대해 많은 호감올 갖고 그 돈을 여기에 투자하는 것에 인색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홍사단의 단원이 얼마되지 않고 돈도 얼마 없었지만 1차 회사설립 주응모(株應募)에 4만5천불이 그리고 2차투자에 5만불이나 모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재미 동포들이 동포가 하는 일에는 모두 솔선수범하여 대동단결을 하자는 거룩한 민족의 단결정신의 발로였던 것이다.


설혹 의견의 차식가 좀 있다 하더라도 가능한한 일치점을 찾아서 민족의 이름으로 공생공존의 마음가짐올 다한데서 오는 귀결(歸結)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었으며 길이 빛날 민족성이었다. 그 누구도 더러운 흑심(黑心)을 품어 자기 사욕을 채울 수 없는 기업이었다. 비록 홍사단이 앞장올 서서 기업을 운영한다고 하지만 홍사단의 기업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민족의 공익성을 가진 기업이었다. 거기에는 민족의 이름으로 하는 공평성과 이익배당이 있어야하였다. 사실 홍사단은 회사창설 당시 그렇게 선전했었다. 만약에 그렇게 말하지 않고 흥사단을 위한 기업체이며 홍사단에 입단한 사람에게만 이익배당을 준다고 했다면 어찌 나 같은 사람이 그 피땀 홀려서 마련한 돈을 고스란히 투자할 리가 있겠는가.


하여간 북미실업주식회사는 동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진 재미동포의 기업체로 대변하고 있었다. 기업체의 내용은 벼농사를 하는 한인들을 돕는데 있었다. 자금이 모자라서 벼농사를 못짓는 자에게는 농자금을 융자하여 주는 것이었다. 그 융자금의 원천은 회사설립의 주모금에서 얻어진 돈이다. 주배당올 받는 사람은 농사짓는 사람에게 융자금올 대여한 그 이자금으로 받게 되어 있었다.


1917년도에 설립한 이 회사는 대장마의 홍수가 나던 1920년도까지 상당한 이익의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이 회사를 경영하는 동안 회사의 사무실은 하나의 사무실 안에 안 창호 선생의 개인 사무용 책상, 흥사단 책상,그리고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책상이 함께 놓여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흥사단이 안 창호선생을 필두로 해서 운영하는 북미 실업주식회사라는 인식을 주는 기업체였다. 홍사단의 법규 제 2조에 「본 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서 정의를 돈수하며 덕. 지. 체 3육을 동맹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쌓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영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음」이라 하여 누구든지 흥사단이 사리사욕에 치우쳐서 기업운영을 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의 앞날에 번영을 도모한다는 것을 믿게하였다.


이와 같은 흥사단의 취지와 목적이 모두 재미 동포들에게는 선명한 명분이 섰던고로 주당 백원짜리주 9백50개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여기에 응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가주 동포들은 있는 돈을 모두 여기에 쏟았던고로 자기 생활에 쪼들리는 가운데 살아야 했었다. 그 결과 상해에 우리 임시정부가 세워져도 마음만 간절할 뿐 독립금을 제대로 보낼수가 없었다. 홍사단 단원들은 안 창호 선생의 지시로 무조건 일인당 2 백불을 투자하게 해서 도무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애국금을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인데도 가주 동포들은 불평없이 일시적인 곤경을 이겨 나가면서 흥사단의 북미실업주식회사에 협조를 다같이 하였다.


홍사단에 가입하지 않았던 가주 동포들은 이러한 홍사단의 기업에 대 해서 내심으로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이와 같은 기업이 미주에 서지 않았는데 홍사단에서 이 일을 착 수해서 그 어려운 일을 맡아 가주 동포들에게 민족으로서의 사업의 긍지와 복지건설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0년의 대장마와 홍수는 이상과 같은 홍사단에 대한 고마운 생각은 살부지수(殺父之讎)와 같은 경지로 돌변하고 말았다. 이 홍수로 흥사단은 이자는 물론 원금상환도 하지 않은데다가 그 회사의 파경을 처리하는 과정이 신의와 공평성을 잃었었다. 몇몇 소수의 홍사단 골수인을 제쳐 놓고는 모두 홍사단의 하는 일이 민족을 배신하고 동포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吸血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 내막은 앞서 말한 바 있는 최 덕규씨가 가주법정에 소송을 제기해 서 밝혀진 바와 같다. 모두 부모형제를 두고 먼 미국 땅인 낯설고 물설은 곳에 와서 한에 사무친 망명생활을 몇 십년씩 해 오면서 모은 돈을 애국의 탈을 덮어 쓴 흥사단의 협잡에 사기를 당했다 하니 모두 서슬이 시퍼렇게 되었었다. 


나도 미국에 내리자마자 콩밭 속에서 수없는 땀을 밭고랑에 적시며 얼굴은 새까말게 타서 허물이 일어나고 손바닥은 부어 터지고 굳은 살이 생기는 것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 하면서 마른 날,궂은 날, 성한 날, 아픈 날 가리지 않고 일터를 찾아 헤매며 모은 돈올 한 푼도 찾지 못하고 고스란히 꼬나박고 말았던 것이다. 가주의 동포들 이 모두 나 같은 형편이었기 때문에 북미실업주식회사가 어떻게 정리되 는가를 알고 싶어하였다.


홍사단은 벼농사를 짓는데 융자혜택을 거의 흥사단 계통의 사람들에 게만 융자금을 대여하였다. 그러니까 홍사단 아닌 사람들이 홍사단 단원들의 농사를 짓도록 도와준 셈이었다. 오히려 흥사단은 장마로 폐농한 그들을 보호해서 변호하여 주어야 하였다. 흥사단은 이들 벼농사인들에게 돈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안 창호 선생으로부터도 돈을 받을 수가 없았다.


안 창호 선생은 임시정부가 수립하던 1919년 4월에 중국 상해로 갈 때에 엄청난 돈을 갖고 갔었다.


이미 나는 임정의 그 사람들이라는 글 속에 지적한 바와 같이 안 창호선생은 리 승만 박사보다 먼저 상해로 가서 갖고 간 그 돈으로 임정의 사람들을 포섭하여 리 박사의 허락도 없이 임정의 대통령 대리역할을 했던 것이다. 장마가 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이 밝혀지지 아니 하였을 것인데 그 장마로 인해서 밝혀지고 말았다.



가주 법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안 창호 선생이 가지고간 돈은 모두 그의 봉급으로 처리되었었다. 그 돈으로 안 창호 선생은 돈 없는 임 정을 마음대로 주물럭 거리기 위해서 미리 리 박사보다 먼저 상해로 가서 임정의 파란을 조장한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개입 된 것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즉 어찌해서 안 창호 선생의 영향력이 임정에 그렇게 강력하게 미쳤는가를 추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돈으로 매수 되어서 정치를 하자니 어떻게 참 양심과 정의를 발견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 까닭에 리 승만 박사와 같은 당대의 영웅도 무식과 무능으로 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돈의 마(魔)를 십분 이용하여 안 창호 선생은 임시정부 벽두에 리 승만 박사가 상해로 와서 대통령직에 취임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대변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유증은 리 박사가 상해에 있는 동안은 잠잠하다가 리 박사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에 다시 그 증상이 나타나서 임정을 골게하여 마침내는 불치의 병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임정의 바른 역사를 한국이나 상해에서 보는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고 이곳 미국에서의 일어난 일도 함께 역사의 소재로 취소 되어져야 하겠기에 이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최근의 한국역사가 전체의 일각면을 나타내어서 미주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전체의 면모를 들어내는데 좀더 포괄적인 개연성(蓋然性)에 충실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쉬운 것이다.


안 창호 선생이 없는 미주 홍사단에서는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재무 책임자인 송 종익씨가 장마와 홍수로 인하여 투자된 모든 돈은 변상할 수가 없다고 주주들에게 선포하였다. 주주들은 변상의 유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북미실업주식회사의 회계장부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랬더니 매주 1백불씩 준 주를 주당 15전1리6모씩을 주겠다고 하였다. 어떻게 계산해서 그 돈을 주려고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나 여하간 줄 것이 있는 계산이 나오고 보면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최 덕규씨는 회계장부의 공개없이 어떠한 돈도 받을 수 없다하여 계속 장부 공개를 요구하였다. 사실 백수십분의 일도 안되는 돈을 주 겠다는 말은 안주겠다는 말과 같았고 그것을 설사 받는다 하더라도 돈이 되지를 아니하였다. 


참다못한 주주들은 최 덕규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제휴하여 그에게 연서로 서명날인하여 주었다. 최 덕규씨가 아니면 아무도 그 일을 맡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최 덕규씨만이 다행히 은행에 5천불을 저금한 것이 있어서 그 돈으로 변호사를 사고 소송비를 치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외에는 모두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나 또한 그때 십리밖을 나갈 노자도 없었던 형편이었다.


이러한 처지에 무엇인들 이야기 못하겠는가? 수 없는 민족의 끼니를 앗아갔고 배우겠다고 마련한 학자금까지 완전히 고갈시켜 버린 그 파럼치한 홍사단이었다. 가주법정은 북미 실업주식회사의 장부를 압수해가서 철저한 조사를 하였다. 그 조사는 재판석상과 신문지상에서 흥사단의 악랄한 조작이 폭로되고 보도되었다.


이를테면 홍사단 단원이 개인명의로 투자한 주를 흥사단 이름으로 투자한 것처럼 조작해서 원금과 이자를 북미실업주식회사에서 뽑아 버렸다. 이때 흥사단에 투입된 돈은 투자한 것이 아니고 북미실업주식회사가 흥사단의 돈을 빌려 쓴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나머지 돈에서 안 창호, 송 종익 등 제씨의 봉급, 접대비, 사무실 비용 둥으로 공제하였다. 그리고 흥사단원이 벼농작을 할 때 융자한 돈을 미수금으로 정리하여 또 공제하고 나니 돈이 얼마 남지를 아니하였다. 


그래서 1백불짜리 주를 주당 15전1리6모씩을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수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대풍년에서 얻은 3년간의 이익금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이것은 큰 이익이 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이때에 흥사단이 투입한 돈은 투자로 처리되어서 대부분의 이익금이 홍사단으로 들어갔었다.


이밖에도 북미실업주식회사는 홍사단원에게 벼농작 융자에 많은 돈을 대여해 주어서 회수불능으로 처리하여


  • 첫째 홍사단원들에 은혜를 베풀어 더욱 단에 대한 충성과 신임을 굳히고, 
  • 둘째 경제력을 풍부하게 해서 단원 개인생활의 윤택과 동시에 흥사단에 단비를 지출케함으로써 단이 더욱 재정적으로 튼튼하게 하였고,
  • 세째 돈이 고갈된 교포사회에 뛰어 들어서 홍사단의 세력을 부식확장 할 수있게 하였다. 그로 인해서 교포사회는 더욱 혼란하여져서 진통을 겪게하였다.


아마 장마의 흥수 이후 홍사단은 북미실업주식회사에 남은 돈을 완전히 홍사단으로 돌리기 위해서 장마 이전으로 소급하여 홍사단원들에게 융자금을 지급한 것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없지않았다. 물론 모든 이상의 장부처리가 장마 이후에 다시 조작하여 만들어진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 흥사단은 그들의 간악한 협잡으로 흥사단 이외의 민족은 굶어죽든 말든 그리고 생활의 궁핍(窮之)에서 평생 고생을 하든 말든 조금도 관계치 않은 무뢰한(無領漢)으로 행세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민족을 위해서 애국을 한다고했고 민족애가 있다고 했다.


그들의 이와 같은 행동으로 우리 가주 동포들은 사막과 같은 황막한 이국에서의 삶을 새로 출발해야 했었다. 이 출발은 오장육부를 갉아 먹는 고통 속에서 한숨과 눈물로 마음을 달래면서 시작하였다. 이 피맺히는 경험을 몸소 겪어 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흥사단을 찬양하는 이가 없고 입당조차 하려 들지를 아니하였다. 


이 글을 읽는 흥사단원이 혹 있더라도 당시에 우리들이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없이 못가는 길을 감수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던 지난 날의 형편을 널리 참작해 주기 바란다. 나는 결코 홍사단올 더우기나 현재의 흥사단을 미워하거나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들이 겪었던 지난 날들이 너무나 뼈에 사무 치도록 고통스러웠고 민족에 있어서 크나큰 슬픔이었기에 그때의 정경을 말할 뿐이다.



나는 정말 어이없는 이 자연과 민족으로부터 받은 재난과 상처로 다시 날품팔이로 세월을 보내기 싫었다. 다만 얼마의 노자가 장만되는 대로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공부를 하리라고 결심을 세웠다. 

한푼의 돈도 없던 나는 일터로 갈 차비조차 없어서 그냥 나의 숙소에 주저 앉았다. 여기서 동료들의 밥올 해주었다. 그러다가 새크라엔토에서 한인여관을 경영하는 안 영열씨에게 편지를 내어 10불을 빌렸다. 안 영열 씨에 대해서는 이미 나는 많은 언급을 하였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를 잘 기억할 줄로 믿는다. 그의 도움으로 그가 있는 곳까지 가서 포도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포도를 따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지난 날을 생각하지 않고 일에만 열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 의지의 한계를 뚫고 나타나는 지난날의 만가지 회포는 가주의 따가운 햇볕과 그 지독한 열풍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일어서야 되겠다는 결심이 혼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결심에는 그만큼 내가 참고 견디어야 하는 시련도 함께 따랐다. 단돈 몇 십불의 돈을 마련하기까지 숱한 고심과 고투를 겪으면서 이를 악물고 마음에 철퇴(鐵植)룰 가하였다. 그런 지루한 날들을 하루하루 보낼 때 인생이 짧지마는 그 받아야 할 자기 시련때문에 초분(抄分)을 헤아려 가면서 살아야 할 만큼 길게도 느껴졌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이 세상에 온 인생, 무엇이 그렇게 걸릴 것이 많아서 이다지도 괴로워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모든 근심걱정을 일축하여 버리는 만법무아(萬法無我)를 수 없이 찾고 찾았다. 이러한 깊은 철학적이고,종교적인 경지에서 내 자신을 부정해 버리기도 하고 없애 버리기도 하고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마음가짐을 이모양 저모양으로 만들어 다시 내 존재를 의식해 보기도 하였다. 


머리털보다 많은 사색의 가닥들이 변화무쌍항 쌍곡선을 긋고 지나간 그 자리에는 다시 땀 구멍으로 통해서 들어 왔는지 그 많은 사색의 물결이 몇천억년 전부터 시작한 파도의 물결처럼 밀려들어오고는 또 나가는 것을 되풀이하였다. 그럴 때 지나간 몇년간의 미국생활도, 홍사단도, 안 창호 선생도 모두 그 많은 명멸(明滅)의 물결에 불과하다는 것을 오뇌(與腦)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영성(應性)을 가졌기에 자연적으로 이와 같은 나대로의 철리(哲理)를 찾고 그 영성계(靈性界)에 존재하여 살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타고난 운명과 주위의 운명과의 관계에서 내 자유 의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사랑과 조화의 도가니 속에 깊숙히 넣어진 존재의 세계였다.


이러한 깨달음의 존재의식은 내 평생에 남과의 상극(相혭)을 맺지않게 하였고 오직 조화와 사랑으로 내생을 불태울 수 있게 하였다. 나는 결코 내 돈과 동료때문에 내 동포와 정면으로 뇌우(雷雨)를 일으키지 아니하였다. 모든 시간이 바꾸어지고 상태가 달라지면 우주조화의 법칙에 따라 있을 것은 남고 없어질 것은 사라질 줄을 알았다. 이를 깨닫고 도 행치 아니하면 그것이야말로 우둔자요,소인배요,장부나 영웅이 안닌 줄을 알았다. 


일의 작고 큰데서 그 가지를 따질 것이 아니며 그 지위의 낮고 높음에서 그사람을 평가할 것도 아니며 또한 승패에서 반드시 그 정의가 있는 것도 아니며 금화를 많이 갖고 안 갖고 하는데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도 내 스스로 깨달았을 때에 그렇게나 다급하고 앙탈하던 마음도 간 곳 없고 오직 묵묵하고 조용하기만 하였다.


이 마음으로 너무나 태연하게 있을 때 어느 날 송 종익씨는 나에게 물었다.「송 선생,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참 생각지도 않았던 장마로 면목이 없읍니다」 


나는 그의 물음과 위로에 정말 깨달음의 동포애로 [괜찮습니다. 꼭 금년에는 공부하기로 작정하였으니 공부나 하겠읍니다」


「아니 무슨 돈으로 공부를 하려고 합니까? 혹시 나성에 가시면 우리 흥사단의 장 리욱(張利郁)씨를 찾아서 저의 안부도 전할 겸 그곳 물정에 도움이나 되도록 하십시오」


「송 종익 선생은 저의 종씨도 되거니와 그간 북미실업주식회사에서 여러모로 고생도 하셨으니 안부야 가는 길이니 전해 주어야지요. 그러나 도움을 얻기 위해서 그곳 나성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다만 나성이 기후나 풍토가 우리 망국인에게 공부하기에 적절하지 않을까해서 갈 뿐입니다.」


이와 같은 송 종익씨와의 인간관계는 비록 그가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재무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한몸에 얻어 먹었지만 나와는 그가 1956년 1월 7일 신병으로 나성 공동묘지에 묻히기까지 소속과 이념을 초월하여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는 1906년 4월 도미한 사람으로 향년 69세로 여생을 보내기까지 홍사단의 중심인물로서 많은 활동올 하였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 웃으면서 상호의 당을 자랑하며 또한 질타(叱唾)를 보내기도 하였다.


홍사단으로부터 자기 돈을 사기당하였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속시원한 해결을 보려고 하던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서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고 있었다. 최 덕규씨는 그의 투철한 시종일관의 투쟁으로 소송을 벌여 결말을 내기는 하였으나 갖고 있던 자기 돈을 모두 소송비에 탕진하고 말았다. 그 후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이국의 하늘밑에서 객사(客死)하였다. 나는 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나성 공동묘지에 내 손수 장례를 정중히 해 주었다.


내가 나성으로 공부하기 위해서 떠날때 내마음은 가쁜하고 지난날에 대해 하등 미련을 두지 아니하였다.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심광학교로 향하던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내 어머니의 그 감동적이고 사랑스러운 말씀을 기억하면서 발걸음을 나성으로 재촉했을 뿐이다. 이런 생각에 접어들 때 저절로 전주 신홍 중학교, 군산 영명 고둥학교 시절의 고학이 회상되어서 나성으로 향하는 고학의 발걸음은 한충 더 가벼워지고 빨라졌다.


어떻게 해서 내가 고국산천을 두고 그리고 부모형제와 처자식을 두고 이 미국 땅에서 망명생활을 보내야 되느냐하는 그 생각만이 스쳐갔다. 배우고 배우는 동안 모진풍상이 있다하더라도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서 굳건히 불사조처럼 참자!  오직 거기에만 내 가족과의 재회와 내 신생의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1. [연재: 송철회고록] 송철 회고록________차례

    Date2019.12.12 By종이비행기 Views126
    read more
  2. [연재: 송철회고록] 제 6장 대한인 동지회 시절

    Date 2020.07.17 / 단기: 4353.07.17 By종이비행기 Views113
    Read More
  3. [연재: 송철회고록] 7. 7백 의사(義士)의 충혼

    Date 2020.07.05 / 단기: 4353.07.05 By종이비행기 Views80
    Read More
  4. [연재: 송철회고록] 6. 다시 망명으로

    Date 2020.06.23 / 단기: 4353.06.23 By종이비행기 Views46
    Read More
  5. [연재: 송철회고록] 5. 나는 어디로

    Date 2020.06.23 / 단기: 4353.06.23 By종이비행기 Views27
    Read More
  6. [연재: 송철회고록] 4. 나무를 심는 마음

    Date 2020.06.23 / 단기: 4353.06.23 By종이비행기 Views31
    Read More
  7. [연재: 송철회고록] 3. 일본 형사의 미행

    Date 2020.06.23 / 단기: 4353.06.23 By종이비행기 Views35
    Read More
  8. [연재: 송철회고록] 2. 15년 만의 고국산천

    Date 2020.06.13 / 단기: 4353.06.13 By종이비행기 Views47
    Read More
  9. [연재: 송철회고록] 제 5 장 비참한 조국방문

    Date 2020.06.12 / 단기: 4353.06.12 By종이비행기 Views38
    Read More
  10. [연재: 송철회고록] 7. 10년 학업의 총결산

    Date 2020.05.31 / 단기: 4353.05.31 By종이비행기 Views42
    Read More
  11. [연재: 송철회고록] 6. 민립 대학은 해서 뭐해?

    Date 2020.05.30 / 단기: 4353.05.30 By종이비행기 Views49
    Read More
  12. [연재: 송철회고록] 5. 고학도의 사업

    Date 2020.05.22 / 단기: 4353.05.22 By종이비행기 Views22
    Read More
  13. [연재: 송철회고록] 4. 가주 대학교 시절

    Date 2020.03.15 / 단기: 4353.03.15 By종이비행기 Views48
    Read More
  14. [연재: 송철회고록] 3. 나라 없는 슬픔

    Date 2020.03.15 / 단기: 4353.03.15 By종이비행기 Views49
    Read More
  15. [연재: 송철회고록] 2, 전기 공학도

    Date 2020.02.15 / 단기: 4353.02.15 By종이비행기 Views57
    Read More
  16. [연재: 송철회고록] 제 4 장 고달픈 유학시절

    Date 2020.01.28 / 단기: 4353.01.28 By종이비행기 Views150
    Read More
  17. [연재: 송철회고록] 1. 흥사단의 북미실업주식회사

    Date 2020.01.13 / 단기: 4353.01.13 By종이비행기 Views137
    Read More
  18. [연재: 송철회고록] 6, 임정의 그 사람들

    Date 2020.01.11 / 단기: 4353.01.11 By종이비행기 Views141
    Read More
  19. [연재: 송철회고록] 4. 아一 그 장마

    Date 2020.01.11 / 단기: 4353.01.11 By종이비행기 Views53
    Read More
  20. [연재: 송철회고록] 3. 피땀의 3년

    Date 2020.01.10 / 단기: 4353.01.10 By종이비행기 Views44
    Read More
  21. [연재: 송철회고록] 2. 도산 안 창호(島山 安昌治) 선생을 만나서(공립협회의 폐해(弊害))

    Date 2020.01.03 / 단기: 4353.01.03 By종이비행기 Views138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