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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주 대학교 시절


팔리택 고둥학교의 학제는 4년제이었다. 한국인은 거의 나성 고둥학교로 갔기 때문에 한국 학생은 아주 드물었다. 영화배우를 전공하는 안창호 선생의 영식인 필립 안이 있었다. 그는 미국 에로 나보다 나이 가 많이 어렸고 학년도 낮았다. 그와의 교제 관계는 비교적 친숙했었다. 지난 날의 팔순기념 잔치를 자녀들과 조카들이 서둘러 중국촌의 황 용장(黃龍註)에서할 때 필립,안이 그 바쁜 일정 가운데도 나와줄 정도로 우리 사이는 가까왔다. 그는 이 고등학교의 영화과를 졸업해서 동양 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배우로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필립 안은 1977년 헐리웃 소재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파란많은 일생을 마쳤다.


여하간 이 팔리택 고둥학교를 졸업하면 자기 전공 분야에서는 미국 사회에 적응하여 잘 살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오늘 날 이 학교는 전략 무기인 미사일까지 만들어내는 대규모의 유명한 과학의 전당이기도하다.


나는 이 학교를 졸업할때 영어 과목만 빼고는 올에이(All A)의 수석졸업을 1925년 6월 25일에 하였다.

뿐만 아니라 4년만에 마치는 과정을 1년을 단축하여 3년만에 졸업을하는 영예를 갖기도 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에 어려운 관문올 무난히 뚫고 오늘의 UCLA(University of California in Los Angeles)라는 가주대학교에 입학한것이 물론 전기공학이었다.



5_UC버클리시절.jpg



나성 가주대학교는 센프란시스코의 버클리(Berkley)에 소재한 가주대학교 본교에서부터 시작하였다.내가 이 학교에 들어가기 6년 전인 1919년에 일단 분교로 세워졌다가 UCLA라는 정식 교명은 내가 분교에서 본교인 버크리로 진학하던 때인 1927년에 불리어졌다.


그리고 현 UCLA의 교지(校地)는 내가 가주 대학에서 수학을 마칠 무렵인 1929년에 이룩 된 것이다.


그 당시 사범 계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2년을 나성에서 마치도록 되어 있었다. 주정부에서 운영하는고로 미국 시민으로서 가주에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은 거의 무료로 공부했으므로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이때부터 입학 경쟁이 치열하였다. 비록 좋은 성적으로 입학이 되었다 하더라도 입학 후 전체 학생의 25퍼센트를 낙제시켜 다른 학교로 전학하써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었다.



외국 학생인 나는 이러한 주정부의 혜택도 받지 못하여 매학기 75불이라는 등록금을 내야 했다. 이 돈은 나 같은 학생에게는 거액이었다. 당장 장만 하라면 도저히 마련할 수 없었던 큰 돈이었다. 나는 이를 위해서 4년 이상이나 저축을 하였다. 나의 스쿨보이 생활에서 주당(週常) 5불씩 받는 돈을 쓰지 않고 한푼 한푼 모아서 저축해 놓았던 돈이었다.


이 돈을 모으는 데는 적지 않은 공과 어려움이 있었다. 꼭 써야 할때 쓰지 않고 일구월심 대학등록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그 염려때문에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모른다. 객지에서 맞는 생일 때마다 다정한 친구를 만날 때마다 그 돈을 쓰지 않으려고 많은 애를 태웠다. 고국에 있 는 부모. 처자세게 명절마다, 생신마다 마음만 간전할 뿐 한푼의 돈도 부치지 못하니 그 속타는 마음 말할수 없었다. 의복과 신발이 남루하고 해어져도 언제나 그 옷과 그 신발로 다녀야 하였다. 간혹 감기와 몸살이나도 약과 의사없이 지내야 했던 이 암담한 시절이 모두 공부때문이었다. 눈물겹기 짝이 없었던 이 시절,오직 공부로 마음을 달래고 참았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의 공부였지만 보람을 느끼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시간마다 새로운 학문과 이론이 모두 내 민족과 내 조국의 강토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곤경을 이기고 참을 수 있었다. 전기공학 가운데 수력발전학은 언제나 새롭고 관심이 있었다. 언제나 연중 강우량이 풍부하면서도 한발이나 홍수로 고생만 하고 있는 내 조국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 불행을 해결하는 비법(秘法)을 공부한다니 신기스러운 흥미는 물론 날로 학구열이 가속화 되었다. 이론을 배우고 실험하는 그 과정이 곧 내 조국을 수술대 위에 놓고 수술하는 것과 같이 그 책임이 무거웠다. 하나도 매지 말고 하나도 잊지 말고 고스란이 내 조국에 옮 겨 놓고 싶은 마음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을 전깃불로 밝히며 그 수력 발전소의 저수 지로 홍수를 막고 가공을 막아 해마다 오곡백과를 누리며 풍년가를 부를 내 조국을 생각하니 그 기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두산 천지못을 타고 내려오는 두 물줄기의 강을 따라 그리고 장백산맥, 태백산 맥의 척추를 따라 수많은 강물로 평야를 덮은 내 조국의 강토. 이제 이 학문과 이 기술로 아름다운 행복의 나라로 수를 놓는다 하니 더 이상의 기쁨이 없었다.


그러나 차차 어두운 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학비 문제였다. UCLA에서의 2년간의 학비는 그 동안 저축해 놓았던 돈으로 모두 써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본교로 가서 나머지 2년간의 학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본교로 가면 등록금도 문제려니와 기숙사비 또한 큰 문제였다. 이 때까지는 스쿨보이로서 침식 문제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센프란시스코의 버크리로 가면 기숙사에 들어가 졸업반 학생으로 공부만 해야했었다.  아무리 줄잡아도 기백불은 있어야 본교로 떠날 수 있었다. 당시의 대학 형편은 최소한 2,3백불이 있어야 등록금과 기숙사비가 겨우 되었다.


이미 분교에서의 취득할 학점은 거의 다 되어 갔고 이제 남은 것은 몇 학점이 남지 않았다. 이 때부터 저정없는 날이 없었고 밤잠을 설치 는 날이 많았으며 입맛도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생각다 못한 나는 몇 해 전 벼병작을 같이한 바 있었던 박 영순씨에게 편지를 내었다. 박씨 는 전술과 같이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눈치밥을 먹게했던 사람이다. 즉 내가 오 임하씨와 함께 그를 찾아갔올 때 그는 같은 홍사단원인 오씨에게만 일자리를 주고 나는 따돌려 놓은 사람이다. 맹 정회씨로부터 이때의 난관 에서 구출을 받아 요행히 나는 가련함을 면할 수가 있었다. 박영순씨는 개성사람으로 원래 부기법을 잘 알아 스탁톤에서 식당을 하고 있을 때에 내가 편지를 냈던 것이다.


박씨는 한때 현섭씨의 딸과 디뉴바에서 결혼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평생을 결혼하지않은 채 홀아비로 지내다가 식당을 그민둔뒤 디뉴바에서 타계하였다.


그는 노백린장군이 설립하여 운영한 비행학교를 나왔는데 평소 이재가 있어 장사를 잘하였다. 이 비행 학교는 전술한 평안도 사람 오 임하씨와 이 초씨 두 사람이 졸업했는데 비행단이 캘리포녀 대장마로 해체되어 그 후 이 초씨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군에 들어갔고 오임하씨는 멕시코에 살면서 미국에서 일을 하고 거주지인 멕시코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마음에 상당히 짚이는 바를 갖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그 동안 노동과 벼병작으로 돈을 모았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다. 그는 지난 날의 허물을 용서하고 자기와 함께 벼병작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잦아와서 지난 날을 뉘우치기에 반갑게 용서를 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때까지 모은 돈을 갖고 타처로 공부하러 가는 계획도 일시 중단하고 그와 함께 손을 잡아 벼병작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방문과 요청만 없었더라도 나는 그 1920년의 대장마로 인한 폐농을 당하지 않고 공부를 무난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자연의 재해인고로 그를 전적으로 탓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내 긴박한 운명을 말하다 보니까 나대로의 느낌이 있어서 말하는 것 뿐이다. 아무튼 그때 나의 많은 투자로 그에게는 별로 손해되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후 공부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돈벌이 하는데 열중하여 그 나름대로 돈을 좀 모은 사람이었다.


나는 이러한 연관 때문에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아니다. 너무 내 형편이 절박하여 그때 사권 박씨에게 돈 2백불을 좀 빌리자는 것 뿐이었다. 나는 편지에 다만 내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졸업 후 꼭 갚아 주겠다고 하였다. 나의 경제 능력과 내 인간성을 알 것 같아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또 평소 그의 인간성과 민족애에 호소하기도 했다.


편지를 내기 전까지의 저정과 망설임은 내 마음과 자존심을 몹시도 슬프게 했다. 그러나 돈 2백불을 빌려야 하는 내 아쉬움 탓으로 편지를 써야했다. 편지 를 쓴 그 날부터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와 같은 마음으로 그날그날을 회신오기만을 기다렸다. 제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간곡한 애소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시기를 두손 모아 빌기도 하였다. 동이 트는 저 하늘이 푸르러 지기까지 그 하늘을 바라보면서 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 했다. 밤이면 기다림에 지쳐 잠이 들었고 꿈까지 꾸었다. 그래도 마음은 어수선하기만했다.


그러나 그 편지는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끝내 이렇다할 아무런 연락이 없은 채 영원히 지나가고 마는 것인가. 세상이 이다지도 무정하고 그다지도 내 운명이 알궂고 험하단 말인가! 바로 인생의 험산 준록이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안 창호 선생의 서북인 중심의 홍사단이 나의 이같은 애끓는 슬픔에 단측(園則)이나 그 사상에서 볼 때 동정적일 수가 없었다. 홍사단 단원이 아니고 서북인이 아닌 나에게 그 호의를 베풀어 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의 지난 날 오고간 인간상지애(人間常之愛)가 단과 지역을 초월하여 우리의 인간적인 우정이 있을 줄 알았었다. 그런 나의 생각과 판단은 아주 잘못이었다. 오직 나에게는 기다림의 초조와 민족의 비애만이 안기워졌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보이지 않는 단의 사상과 정책이 나빴던 것이다. 그로 인해서 인간 관계와 민족의 우의가 유감스럽게 작용되었다.


결국 나는 본교로 이내 진학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사립학교인 남가주대학교(USC)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내가 다녔던 UCLA보다 먼저 세워진 학교로서 규모도 컸었다. 또한 많은 한국 유학생이 수학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문과 계동이 많았고 들어가기도 쉬웠다. 나는 이 학교에서 교양 과목으로 경제학,헌법,미국사를 선택했다.


본교로 당장 진학은 못했지만 그래도 학업만은 계속하고 싶었다. 미국생활에 필요한 교양 과목을 이 기회에 해 놓자는 심정이었다. 조금도 배움을 중단하는 공백을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본교에는 학자금이 없어 진학하지 못한 것을 결코 포기하여 전학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교양 과목을 공부하면서 본교로 진학하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삼았다.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겨내는 것이 내가 살아 온 성미라서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럴수록 원기백배하여삶의 길을 찾는 것이 내 성벽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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