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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 형사의 미행


내가 상항에서 아사마마루를 타고 동경에 하선했을 때 한국인 세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 사람들이란 이 유일이라는 치과 의사와 주 요한씨와 형제간이 되는 주 요섭씨,그리고 흥일점의 송복신이라는 여자였다.  주 요섭씨가 귀뜸해 주기를 그녀는 미국 동^11서 백인과 결혼한 유부녀라 하였다. 


관부선(關蓋船)이 부산항에 정박하자 일본수상경찰이 승선하였다. 미국에서 온 우리 남자 세 사람이 하선하는 중에 계 단에서 만났다. 세 사람 가운데 제일 앞장선 나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그 수상경찰은 말을 걸었다. 「선생님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안에 잠간 들어가서 한 분을 모시고 나오겠읍니다」 그 한 분이란 송 복신 여사를 가르킨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 남자 일행은 그의 말대로 기다리지 않고 바로 내려서 기차역으로 가서 각기 자기 행선지의 급행열차표를 샀다. 그리고는 역구내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시켜먹었다.


우리가 부산에 내릴 때는 새벽녘이었다. 그런데 송 복신 여사가 기차역에 나타나기는 약 1시 반이 지나서였다. 아마 일본 경찰을 따라가서 때까지 장시 간에 걸쳐 조사를 받은 것 같았다. 만약 우리 남자 일행이 따라갔다면 최소한 밤을 새울 정도로 철저한 조사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다행히 그의 주위 산만과 우리들의 민첩한 행동으로 무사히 첫 검문에 통과되어 급행열차를 탈 수 있었다.


동경에서 집에 전보를 쳐 놓았던 관계로 내가 대전역에 내렸을 때 큰 형님이 마중나오셨다.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계속해서 서울 방면으로 떠났었다. 형님을 만나 서로 힘있게 부둥켜안고 우리들은 한참 동안이 나 말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반가운 재회로 말문이 닫혔기 때문이다.


대전에서 금산까지 오는 데는 7~8십리 길이었다. 우리 형제는 지금 은 러널이 II어져 있지만 그 때만 해도 태봉재를 걸어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재를 넘고 금강 지류를 건너니 드디어 그렇게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살아 생전 한 번만 이라도 찾고 싶었던 정든 고향 땅에 당도하였다. 바빠지는 발걸음과 같이 마음 또한 비길데 없이 서둘러 져 곧 바로 집안 에 발을 들여 놓았다. 엄친에게 먼저 절로 인사를 드리고 어머님 방올 찾았다.


신병으로 항상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병상에 늘 누워 계시다가 내가 왔다는 소리에 억지로 일어나 앉아 계셨다. 핼쓱하게 야원 어머니를 보니 나도 모르게 울음으로 어머니를 뵈었다. 두 모자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주위 사람들도 따라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태산같아서 내가 살고 있는 동안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결코 잊어 본 일이 없었다. 이국만리에서 중천에 뜬 달을 쳐다보고 어머니 생각을 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어머니께서 나 같은 것도 자식이라고 춘하추동 나를 못잊어 일구월심 기도와 염려로 지내시다가 오늘날 이렇게까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것을 생각만 해도 불효 막대한 자식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말로써 어떻게 형용할지 물랐었다.


오늘까지 내가 살아 이국만리에서 공부하고 이렇게까지 된 것은 어머 님의 숨은 기도와 염려가 있어서 되었구나하는 깨달음이 어머니를 상봉 하는 그 극적인 순간에 느낄 수 있었다. 이 어머니의 사랑을 따라 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사명을 다 하리라 하는 강한 교훈까지 동시에 받게 되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 나의 아내는 내 부모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었다. 떠날 때 생후 8개월밖에 안 되었던 내 아들 전무(全武)는 이제 어엿이 자라서 서울 경신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 준비로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그간 내가 없는 동안에 조카들도 많이 자랐고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많아서 누가 누구인지 몰라볼 정도였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은 더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더우기 젊은 사람들은 모두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옛날 나와 함께 놀던 그들은 농터를 잃고 자기 살 길을 찾아 어디론지 물물이 떠나 버리고 없었다. 농촌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국권이 없는 조국은 죽은 나무와 다름이 없었다.


그 다음 날 날이 밝자 일본 형사가 찾아왔다. 부산에서 우리를 놓쳤 던 그 경찰은 아주 야단을 맞고 얼마나 황급했던지 이곳 경찰서로 즉시 연락을 취해 나를 찾게하였다. 일본 경찰은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왜 한국으로 왔느냐고 캐물으며 조사했다. 나는 다만 신병 치로차' 미국에 건너갔다가 노부모님을 찾아 됨기 위해서 방문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오는 동안 누구를 만났으며 또 앞으로 무슨 계획 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와 같은 형식의 질문은 하루에도 세 번 이상 찾아와 꼬치꼬치 심문하며 조사했다. 잠만 밖에 갔다와도 일본 형사는 어 김없이 찾아와서 일일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럴 무렵 나는 서울을 갔다 오고 싶었다. 내 아들 전무의 진학 관계 로 상경한다는 핑계로 서울의 공기를 한 번 알고 싶었던 것이다. 즉 고국을 향하여 떠나올 때의 그 비장한 결심이 실제로 가능한지 타진하고 싶었다. 며칠 뒤 나는 서울에 도착했다. 남대문 근처에 여관을 정하고 아들 전무를 만났다. 도무지 몰라 볼 정도로 청년티가 나는 소년이었다. 핏줄로 느껴지는 부자지간은 만난 그 순간부터 정으로 엉켜졌다.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학의 방향을 물어보기도 하니 아주 대견스러웠다. 그는 민족 사랑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술(醫術)로써 일평생 몸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민족애의 정신을 갖고 자기의 장래 목표를 설정하는 그의 마음가짐에 아들이지만 경탄할 뿐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연세 대학교의 전신인 세브란스로 같이 갔다. 전무는 이 입학시험에 무난히 합격하여 평생을 자기 목표대로 일할 수 가 있었다. 그를 미국으로 데리고가서 공부시킬 마음이 없었던 나에게는 전무의 입학이 아주 기뻤다. 나는 최소한 미국 유학은 자기 주관이 완전히 확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한숙에서 대학을 마친 다음 유학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많은 한인 제 께들이 그들의 부모는 망명으로 도미했건만 부모 들의 애국심을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한국에서 고둥교육의 수학(修學) 이 없는 탓인지 그들의 민족관을 바로 정립할 수 없었다. 적어도 고둥 교육올 받을 수 있는 적령기에 이르러야 민족정신이 충분히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한국어로 공부하면 그 말과 그 분위기 속에 자연히 민족 의식이 일어나서 자기 스스로 민족을 위해 살게 되는 민족에의 사람이 된다. 또 공부의 이해도(理解度)도 모국어이기에 빠르다. 그러지 않고 중. 고둥 과정이나 대학 과정을 이 곳 미국에서 마치게 되면 미국화는 될지 모르나 조국에 대한 사랑은 잊어 버린다. 그런고로 내 주장은 조국을 위해서 일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오는 것을 환영한다.


재미 일본 민족은 자식을 낳아서 공부할 적령기가 되면  아예 일본으 로 보내서 전공부를 마치게 한다. 심지어는 군대 의무까지 마치게 해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표면에는 미국적을 가진 사람이 있었지만 그 혼과 정신은 철저한 일본 민족이었던 이중 시민이었다.


2차대전 발발 이 후 미국정부는 재미 전일본인을 한곳에 강제 수용하여 종전이 되기까지 주거를 제한하였다. 이와 같은 처사는 이상의 일본 인의 민족성 때문이었다. 그들의 거주지를 그렇게 제한하지 않고는 미 국이 대 일본전을 수행함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일본인의 구금을 해제하고 그간 일본인을 위해 손해 배상까지 해주었다.


세브란스에서 알만한 사람을 만난 것을 비롯해서 서울의 몇 사람 친 지를 아주 조심스런 가운데 만나 보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말과 몸조심 때문에 깊은 말은 서로 나눌 수가 없었다. 잘못 하다가는 일본밀정의 함정에 빠져 형무소 신세를 지기 알맞았다. 그러니 이 민족의 저명인사를 잘못 만났다가는 나는 물론 그분들에게까지 공연히 욕만 끼칠까해서 함부로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내가 미국에서 한국에 도착하기 1년 전인 1929년 11월에 광주학생 사건이 나서 일본 총독부는 눈에 가시돋둣 웅크려 보고 있을 무렵 이므로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지 몰랐다. 그러니 지자(智者》의 혜안으로 그들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아야 했다. 내가 한국에 도착한 1930년은 3*1 독립운동 이후 소작. 노동쟁의(小作 -勞動爭議)가 최고조(通高潮)에 달한 때 인고로 자칫하면 그들의 손에 들어 가기가 십상이었다. 1927년에 국내에서 조직되었던 신간회(新幹會)는 민족주의와 연합(連合)하여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펴서 각계충의 우리 동족이 총망라되어 그 회원수가 3만명에 달하는 중 광주 학생 사건을 지도하고 있었다. 광주 학생 사건은 1930년도까지 계속되어 참가교 1백여,참가 학생 수 5만4천여 명에 달하는 3.1 독립운동 이후 최대의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 운동이었다.


나는 호남의 전직 중학교 교사였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서 혹시나 호남과 서울 사이의 미묘한 연락 관계를 내 아들과 함께 공작을 하고 있는 인상을 일본인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는 매사에 초긴장속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아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자기의 소신을 이룰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서울을 떠나기로 하였다.


일본이 우리 조국을 통치하고 있는 이상 내가 배운 공부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공부 때문에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아 영어(固圍)의 신세를 못 면한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의 진고개(현 서울의 충무로)가 좋다고 하여 구경가자고 하였으나 그것이 일본인의 집결지라는 이야기에 그만 아무말 없이 시골로 내려오고 말았다.


집에 돌아오니 일본 형사가 찾아왔다. 일일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함이었다. 상당히 지능적인 조사방법으로 인해 신중히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너무 마음이 울적하여 밝은 달빛을 따라 아이들이 놀고있는 냇가로 나왔다.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 동네애들의 순진한 놀이에 정신이 팔려 보고 있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보았더니 일본 형사가 미행하여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여기까지 찾아다니면서 나를 지키고 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견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는 곳마다,머무는 데마다 이러니 어떻게 내 조국에 머물수 있겠는가하는 의구심이 비탄 가운데 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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