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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하와이 교포 집중지에서 동지회가 생겨난 후 리 승만 박사의 외교활동을 전교포가 합심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했다. 내가 살고 있는 나성지역에도 한인 몇 사람이 합심하여 동지회 지부를 설립하기로 하고 그 지부를 창설하였다. 따라서 미주 본토에는 뉴욕, 몬타나, 오레건, 시카고, 새크라멘트, 스탁톤 둥 지역에도 동지회 지부가 창설되었다. 그후에 한인이 비교적 벼농사에 종사하며 많이 살던 중가주 지방의 다뉴버, 팔리아에도 동지회원이 많이 생겨나서 지부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동지회원과 그 지부가 미주본토에 군데군데 생겨나서 자연히 미주 본토 중심의 동지회 합동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비록 하와이에 동지희의 총 본산이 있다 하더라도 위치가 태평양 한가운데 쪽으로 떨어져 있어 연락관제가 아주 불편했다. 서신 연락관계가 모두 선편으로 이루어져야 했던 시기라서 상호 주고받는 서신 왕래가 빠르면 보름, 늦으면 한 달이나 걸렸다.


더우기 리 박사의 외교활동 중심 무대는 미 본토의 동부 지대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구태여 하와이까지 둘러서 다시 미 본토로 올 필요는 없었다. 즉 바로 미 본토의 동지회 본부세서 수금하여 줄곧 리 박사가 있는 워싱턴의 구미 위원부로 송금하면 아주 신속하게 외교활동을 도울 수가 있었다. 동지회 창설 목적이 리 승만 박사의 외교활동을 효율적으로 돕는데 있었던고로 우리 동지회원은 미주 본토에 동지회 본부를 창설하기를 총재인 리 박사의 재가 아래 이룩하기로 했다.


전기 뉴욕,시카고,나성,몬타나,오레건 등지의 5개 동지회 지부대표가 나성에 모였다. 나성 대표로는 이 살음 임 병직,그리고 나였다. 임 병직씨는 사업차 이 당시 나성에 머물고있었다. 임 병직씨는 아지노모도장사를 하고 있다가 후에 나의 사업체에서 캐쉬어를 맡아 일하였다. 뉴욕에서는 남궁 염,장 기영,시카고에서는 장 인명,정 기환,몬타나에 서는 정 인수,홍 월슨,오레건에서는 김 치웅 등, 제씨가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중가주에서는 박 호근,신 종호, 정 흥생,손 태원 등 제씨가 있었다. 이때가 1929년 여름이였다.







여기서 회의한 결과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를 탄생시켰다. 그 회칙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총 칙


제1조 명 칭

본 회의 명칭은 대한인 동지회 북미총회라 칭함


제2조 위 치

본 회는 총회 사무소를 가주 나성에 둠


제3조 목 적

본 회의 목적은 대한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물질과 정성을 다함


제4조 정 강

1, 우리 독립 선언서에 공약한 바 공약 3장올 실시할지니, 3-1 정신을 발휘하여 끝까지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여 희생적 행동으로 우리 대업을 성취하자.

2, 조직적 행동이 성공의 요소이니 우리는 개인 행동을 일체 버리고 단체 범위안에서 질서를 존중하며 지휘를 복종하자.

3, 경제 자유가 민족의 생명이니 자급자족을 함께 도모하자.


제5조 사 업

본 회의 사업은 종교, 교육,구제,사교에 진력하기로 함



제2장 회 원


제1조 자 격

대한 민족 18세 이상된 남녀로서 본 회의 목적 정강 및 사업에 동감하는 자는 회원이 될 수 있음.


제2조 권 리

본 회 회원의 권리는 발언, 표결 , 선거 및 피선거권이 있음


제3조 의 무

본 회 회원의 의무는 강령을 준수하고 회무에 봉사하며 일체 회금올 납입함


제3장 기 관


제1조 총회...행정부


1. 총 회

총회는 본 회의 일체 사업 진행을 주관하기 위하여 총회장, 부회장 및 서무원과 편집부,교육부,산업부, 구제부,사교부 및 종교부 둥 6부를 둠


2. 지방회

지방회는 회원 10인 이상이 모인 곳에 총회의 인준을 받아 조 직하고 지방회의 일체 회무를 처리함


3. 지방분회

5인 이상의 회원이 모인 곳에는 필요에 따라 가까운 지방회와 연락하여 분회를 조직하되 총회의 인준을 요함 


4 통신처

1 또는 2인의 회원이 있는 곳에는 본총회가 연락할 통신처를 둠 


제2조 대표회..입법부

본 회의 대표회는 각 지방 회에서 회원 10인에 1인씩 공선한 대표원으로 조직하되 매년 1차씩 회집하여 본 회의 일체 장정, 입안, 예결산 및 임원 선거의I 의결을 행함. 단 필요한 경우에는 임시회로 모임


제3조 이사부...사법부


이사부는 본 회의 사법권을 가지고 사무진을 감찰함

1. 정원은 7인으로함

2. 이사의 자격은 35세 이상된 남녀고 본 회를 위하여 5년 이상 경력 봉사한 자로함


제4장 총회 임원


제1조 총회장

1. 임 무

총회장은 총회 일체 사업을 운영하며 대외적으로 본 회를 대표함

2. 자 격

총회장의 자격은 5개년 이상 본 회의 의무금올 계속 납입한 35세 이상된 자로함

3.선 거

선거방법은 대표 대회 의장이 대표원 전부의 투표로써 후 보자 2인을 택하여 총회에서 연계금올 납입한 일반 회원에게 유기명 투표를 행케하고 그 계수는 대표 대회에서 공개하여 제 1다수표를 받은 이로 선임함 

4. 임 기

총회장 이하 모든 임원의 임기는 1개년으로 함


제2조 부회장

부회장은 총회장올 보좌하며 총회장이 유고할 때는 대리하며 또는 대표 대회의 의장으로 행사하되 그 자격과 선거 방법은 총 회장의 그것과 동일함


제3조 서무원

본 총회에 서무원으로 총무 1인, 재무 1인, 서기 2인을 임명함. 서무원은 통용 규칙에 의하여 각기 직무를 행하되 그 선거 방법은 총회 임원 선거 방법과 동일함 


제4조 총회 임원의 선거 방법

총회 임원 선거 방법은 총부회장이 각 지방 대표 중 1인씩 협조로써 결정하여 대표 대회의 인준을 받되 회원된지 만 1년 이상된로 함


제5장 재 정


제1조 예 산

본 총회의 재정 수입은 연례금과 특별금의 2종으로 하되 연례금은 매년 남자 회원에게는 10불, 부인 회원에게는 5불로 하고 특별금은 행정상 필요한 때마다 수합함


제2조 결 산

본 총회의 재정 결산표는 연례 대표 대회에서 검열 공포하되 재정 년도는 매년 1월1일에 시작하여 동년 12월 31일에 마침



제6장 탁사부


제1조 본 북미 총회에 탁사부를 둠

제2조 탁사부는 북미 총회에 속한 기본 재산 즉 토지, 건물, 설비품 또는 지정한 목적이 있어서 기부된 금전을 은행에 보관할 것.

제3조 본 탁사부의 목적을 달성하기 우1하여 본 회 재산 일부 혹은 전부를 처분할 경우에는 탁사들의 동의를 얻어야 함 제4조 본탁사부의 탁사는 9인으로 함


제7장 집 회


제1조 총회 임원희

총회 임원희는 매 3삭에 정기회와 또는 필요에 따라서 북미 총회 각 기관의 모든 집회는 의회 통용 규칙에 의하여 소속 회원 반 수 이상의 출석으로 개회할 수 있음 제2조 대표 대회 대표 대회는 매년 1차색 하되 필요에 의하여 임시 대표 대회 를 총회장이 소집하고 부회장이 의장이 되어 개최함


제3조 지방회

각 지방회와 지방 분회는 매삭 1차씩 정기회 또는 필요에 따라서 임시회로 지방 회장이 소집하고 처리 사항의 중요한 것은 총회에 보고 함


제8장 부 칙


제1조 벌 칙

본회 회원이나 임원으로서 범과가 있올 때는 소속된 기관과 총회 조사를 받아 가지고 이사부세서 견책, 경고, 정권, 제명 둥으로 처벌함.


제2조 장정의 변경

본 장정을 증감 혹은 변경할 경우에는 대표 대회에서 4분지 3 이상의 동의로 의결하되 만 1년 후에 실행함. Alfred Song 이 하와이 대학교 법과를 졸업했을 때 내가 그를 우리 집으로 불러 알프레드,송으로 하여금 동지회 회칙을 만들고 가수 정부로부터 비영리 단체로 인가를 받게 하였다. Alfred Song은 그 후에 가주검찰 총장이 되었다. 그 전에도 LA근교에 있는 몬타나에서 가주 상원의원이 되기도 했으며 중국,일본,한국인들의 모임으로 2년 동안 몬타나 시장을 지냈다. 이 때 알프레드 송은 동지회 회칙과 차트(법인체 설립 등기)를 만드는데 한달 이상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하와이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이 없을때 내가 그를 불러 이 일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하와이에서 출생했는데도 한국말을 잘한 것은 리 승만 박사의 기독 학원에서 한국말을 배웠기 때문이다. Tom Hong 씨 또한 한국말을 잘 했는데 그 역시 리 승만 박 사의 기독 학원 출신이었다. 1954년 리 박사가 대 통령으로 재직시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잠시 LA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때 리 박사는 Tom을 보자마자「Tom,너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느냐?」고 그를 기억해 주어 많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미 본토에서도 동지회가 하와이에서 독린하여 세워지니 리승만 박사의 외고활동은 원활하게 활동이 개시되었다. 대한인 동지회 북미총회장은 이 살음씨가 당선되었다. 재무는 내가 맡아보았다. 이 살음씨는 약 6년간 계속해서 동회 총회장으로 역임하여 초창기 북미주 동지회 건회 공로자(建會功勞者)였다. 그는 임종할 때까지 동지회의 뜻을 따라 애국애족 하다가 일생을 끝마쳤다. 이 살음 목사는 다뉴바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했다. 그 자녀들은 Bakersfield의 Drug Store에서 일했었다.


이살음씨 다음에는 박호근(주)씨가 2년간 동지회의 총회장으로 수고했도 역시 재무는 나였다.박 호근씨가 그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총회장을 새로 뽑올 때 회중은 모두 나를 지목하여 총회장을 뽑으려고하였다. 나는 단호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간 나는 동지회 북미 총회의 재무로 일해온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읍니다. 이 재무직도 과분하여 총회 선거 때마다 극구 사양을 했지만 회중이 모두 나아니면 안되겠다고 하기에 마지 못해서 맡아 봉직해왔읍니다. 내가 총회장이 되면 누가 재무를 맡겠읍니까? 그러니 나는 총회장은 못하니 다른 좋은 분을 뽑아 주시기 바람니다」


이와 같은 나의 신상 발언에 회중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그러면 재무를 겸직한 총회장이 되면 되니 송 철씨를 총회장으로 추대,동의합니다」


라 하여 만장일치로 총회장이 되고 말았다. 총회장이 된 나는 내가 맡은 소임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알았으므로 열심히 뛰었다. 나성에 동지회의 독립체가 생긴 목적이 리 승만 박사의 구미 위원부를 도와 외교활 동을 돕는데 있었던고로 동분서주하면서 내 힘껏 일을 했다.


1차세계대전 후 2차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미국은 일본이 그네들의 우호국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 동지회 동을 통해서 일본은 결코 미국의 우호국이 될수 없고 다만 세계평화를 깨뜨리는 침략 제국주의인 것을 알리고자 전심전력을 쏟았다. 미국을 친일 외교에서 반일 외교 정책으로 전환시켜 우리의 독립을 포촉하려고 했다. 이것은 오직 우리 의 외교활동에서만 가능했었다. 나는 이 때문에 도처럼 찾아간 고국산 천이었지만 재망명을 결심하고 이곳 미국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뜻을 쳐고 있는 리 박사가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눈물겨운 모습을 볼 때 나의 심장은 들끓었다. 리 박사가 혼자서의 외교활동은 전미 국을 휩쓸고 나아가서는 전세계까지 휩쓸기 위해서는 너무나 역부족(力不足)이었다. 그를 밀어 줄 후원자와 후원 단체가 이것이니 내가 맡은 총회장의 소임은 어느 때보다 중요했었다.


이 때 리 박사는 그의 은사이자 미국 대통령이었던 월슨 대통령을 비롯해서 미 국무성 관리들에게 냉대와 모멸(海建)을 당한 이후 줄곧 우리 대한인의 독립이 미국의 무관심에 처하여 있었던고로 우리 민족의 단합이 절실히 요구될 때였다. 미국은 일본올 무서운 존재로 생각했고 또 절대 중요시하였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여 버리는 행동이 동지회를 통해 일사불란한 독립운동을 외교적으로 전개, 미국인의 태도를 바꾸는데 역점을 모았다. 만약 이 외교적 활동이 그 실효를 거두어 나간다면 우리의 외교활동을 반대하던 일부 우리 민족도 대세의 흐름에 자연히 각성 감동하여 상호 협조하에 민족 통일을 이룩 할 수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 민족이 어디에 있으나 일본에 대항하는 우리의 독립 정신이 굳게 뭉쳐져 있고 또 이를 기필코 이루고 말겠다는 집요한 결심과 행동을 동지회를 통해 유감없이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리 승만 박사가 마음놓고 외교활동을 할 수 있는 재정 확보와

둘째 동지회원 상호간의 민족애 발로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동지회 운영의 묘(妙)를 살리고

세째 내 일신이 문자 그대로 백골이 진토되는 한이 있어도 충성을 다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일정한 주소도 없는 내 동포를 소문만 듣고 찾아나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소문하여 찾아 가면 며칠 전에 이 곳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일터를 찾아 갔다고 하기도 했다. 막상 만났다 하더라도 오히려 회비는 커녕 거꾸로 도와 주어야 할 동포들도 없잖아 있었다. 이렇게 원근을 가리지 않고 그리고 교통의 불편,일기의 불순(不順)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내 동포가 있는 일터, 숙소,심지어는 중국인의 노름방(도박장)까지 찾아다녔다.


그 당시 차이나타운에 도박장이 있었는데 이 도박장을 세탁소 뒤에 비밀로 열고 도박과 매음 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도박장에 세탁물을 들고 세탁하러 온 것처럼 가장하고 들어가 도박을 했다. 세탁소는 주로 중국인들이 많이 했는데 세탁소가 있는 곳에는 거의 이런 도박장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 내 모든 마음과 입을 모아서 리 승만 박사의 외교활동이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영향과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입 속의 침이 마르도록 설파했다. 우리들이 한 푼씩 모은 그 돈이 나라를 되찾고 우리 자신은 물론 민족의 긍지와 행운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진실되고도 열렬하게 호소했다. 그 때 그들은 그들의 호주머니를 톡록 털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돈을 모두 나에게 건네 주었다. 노름하던 동포들은 내 애소에 노름하던 손을 멈추고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노름판의 관돈을 몽땅 끌어 모아서 나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내가 방문했던 동포들 중에는 모두가 리 박사의 외교론을 지지하는 사람만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리 승만 박사가 자기 명예만 위한 독재적인 애국인이며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데 으뜸이니 그런 위인에게 우리의 애국금을 줄 수 없다」

라고까지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여전히 안 창호의 흥사단을 비롯해서 자기 명예욕세 만 부심(腐心)한 나머지 작당분란을 일으키는 일부 국민회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한 동포들에게 나는 리 박사의 외교활동이 란 결코 리 박사 개인의 명예나 지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우리 대한 민족의 자주독립을 도모하고자 하는 최적의 방안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유하였다.


「보십시오. 여러분 리 승만 박사는 1919년 기미 3.1 독립운동 이후 우리 대한인의 임시정부 대통령입니다. 이 분은 자기가 원해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대한의 13도 대표, 즉 우리 민족 전체가 자유 의사에 의해서 뽑은 대통령입니다. 이를테면 1919년 4월 16일에서 동월 23일까지 우리 삼천리 방방곡곡의 대표들이 서울의 어떤 비밀 장소나 인천 둥지에서 모여 선출한 우리의 대통령입니다. 왜놈들의 감시망을 피해 일사를 각오하고 민족 대표들이 뽑은 리 승만박사를 다시 상해에서 만주, 시베리아, 일본 둥지의 해외 망명 애국 자들이 인정하여 추인한 대통령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대통령 리 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국무총리 이 동휘, 외무총장 박 용만, 군무 총장 노 백린, 법무총장 신 규식, 교통.체신총장 문 창범, 참모장유 동열, 내무총장 이 동녕,재무총장 이 시영, 학무총장 김 규식,노동국총변 안 창호입니다.


여러분 이 임시정부는 우리 나라가 왜놈들과 싸워서 우리의 자주독립을 기어코 쟁취하기 위해서 조직된 우리의 유일무이한 정부입니다. 그래서 리 승만 박사는 명실공히 우리의 대통령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분입니다. 결코 개인 리 승만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우리의 애국금을 각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정부의 조직을 운영하고 내 나라 내 민족을 찾기 위해 우리의 물질과 마음을 바치고 있는 것 입니다. 이러한 대의명분이 분명하고 의당한데 어떻게 우리가1리 승 만 박사 개인의 명예욕을 위해서 그리고 그의 추종자가 되기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맹목적으로 바친다고 할 수가 있겠읍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우리 민족 모두를 부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밖에 되지 않읍니다.

이것은 왜놈들이 바라는 일이지 우리 민족의 피가 흐르는 대한인이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이라도 그러한 민족이 있다면 그 자는 이 완용과 같은 매국노가 아니면 그 자야말로 자기 명예와 자기 주장을 위해서 민족이야 죽든말든 조국독립이 되든말든 그러한 치한족속(療漢族屬)입니다.


여러분 ! 우리는 지금 자유 민주주의의 미국 땅에 살고 있읍니다. 미국식의 정치 체제와 같은 과정에서 뽑은 우리 대통령의 정책이 바로 구미 위원부를 통해서 외교활동을 전개시켜 우리의 독립 숙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원 단체로 우리 대한인 동지회가 생겼 고 내가 또한 이렇게 여러분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외교활동올 통해 우리 조국의 독립이 우리 민족의 그 어떤 독립운동의 방법보다 월등한 것이냐 하는 명제(命題)가 있겠읍니다. 첫 째 우리가 이 외교방법론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우리 나라는 일본에 의해 점령되고 있어 그들과 싸울만한 대등한 조건 위에 있지 않읍니다. 왜놈과 총칼로 싸우려면 어떻게 해서 그 막강한 왜놈과 무슨 수로 싸우겠읍니까? 왜놈 만큼 군대가 있읍니까? 무기가 있읍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놈과 싸우기 위해서는 왜놈 만큼의 힘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는 중국을 믿을 수 없읍니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중국은 지금 자기의 힘도 잘 가누지 못하여 갈팡질장하고 있읍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1918년 공산주의 11월 혁명이 일어나 그들은 개인의 자유도 가 족의 존재도 부정해버리는 유물론적 전체주의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 자체에도 많은 내적 문제를 갖고 있어 제삼국을 돌아볼 여유가 없거니와 설사 우리를 돕는다 해도 공산주의 국가의 도움은 받을 수가 없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본 이상의 침라야욕이 있을 뿐만 아니 라 우리 민족이 취할 정체(政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차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자기의 국력이 어느 정도 막강한가를 나타내었읍니다. 우리가 보거니와 미국은 크고 자원이 풍부하고 정체도 민주주의 체제가 되어서 우리의 독립을 돕는데 가장 최적의 나라 입니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기에 우리가 한데 뭉쳐 미국인에게 우리 독립을 호소하는 여론을 일으키기에 좋은 나라입니다. 이 미 국은 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대강국입니다. 만약 미국이 우리 대한인 을 도와 우리의 독립을 돕는다면 가장 유력한 나라입니다. 현재 일본의 대륙 침라과 남양에로의 진출 의도는 필연코 일.미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바로 외교입니다.


이 외교는 가능합니다. 1920년 3월이라고 생각됩니다. 리 승만 박사의 외교활동으로 미국 상원의원 찰스.토마스씨와 존.쉬로스씨가 우리 독립을 우1하여 움직이게 되었읍니다. 그들 두 상원의원의 노력으로 미국 상원에


“한국과 아일랜드의 독립올 일본 및 영국에서 각각 승인하도록 권고할 것이며 국제연맹에 가입하도록 하는 결의안 제출”


이 있었읍니다. 


이 의안은 동년 4월 16일 미국 상원에서 53대 22로 부결되었지만 이로 인해서 한국의 독립 문제가 미국 의회 뿐만 아니 라 전세계인에게 주목을 끌게 하였읍니다. 이것이 우리가 돕고 있는 리 승만 박사의 외교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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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외교활동이 날이 가고 달이 가서 해가 차고 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미국의 힘을 입어 일본을 쳐서 우리 독립을 되찾을 수가 있읍니다.


어떻게 하든지 미국을 일본편에서 우리편으로 만들어 우리의 독립 이 성취되어야 하겠읍니다. 이를 위해 우리들은 이미 동지회를 조직 해서 일을 하고 있으니 모두 여기에 참가하여 우리 독립을 촉구합시다」


나의 이와 같은 장시간의 설득에 그들은 감동이 되어서 그들 평생을 동지회에 몸을 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처를 하면서까지 살았다. 당시 우리 한인들은 노동으로 세월을 보냈는고로 국제정세의 상식과 정 보가 불충분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만은 한인이고 또 애국적이어서 이치에 맞는 진실한 애국적인 호소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박한 분들이었다.


그들이 노동을 통해 돈을 마련하면 그것을 한푼도프노에게 가져오기도 했다.「이 돈은 내 돈이 아닙니다.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는 돈입 니다」하면서 나에게 모든 돈을 맡겼다. 전 진 같은 분은 오히려 차비까지 나세게 맡겨 그 차비를 다시 빌려가기도 했다. 그빌린 돈은 어김없이 갚아 주는 어진 분들이었다. 이들의 이런 독립운동으로 조국은 독립이 되고 그들은 처자식 하나없이 늙었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양로원에서 조용히 임종의 그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내가 그들을 찾았을 때 그들은 나에게 사후의 장례를 부탁하기도 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없는 그들 독립운동가들이 이 세상을 조용 히 떠날 때마다, 그리고 그들의 장례를 치루고 해마다 찾아오는 현충일 (顯忠日) 때마다 나는 묵묵히 거룩한 묵념과 눈물로 그 예(禮)를 그들에게 드렸다.


미국의 현충일 때는 나는 오늘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의 무덤을 찾아 두 손모아 헌화를 해 오고 있다. 이제 고국은 독립이 되어 수많은 우리 교포들이 이 곳 미국에 건너와 살고 있건만 그들 영전을 찾는자는 한 사람도 없다. 오직 이름모를 새만이 공동요지의 숲과 나무에 찾 아들어 지저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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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행히 오늘날까지 장수하여 그들의 장례를 모두 치루어 주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1974년호에는 5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이 춘화선생이 만 99년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남으로서 나는 마지막 동지의 장례를 무사히 치루었다. 그는 함남 원산에서 1875년 11월 28일 출생하여 리 승만 박사와는 동갑년 생이였다. 이분도 물론 평생을 독신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양로원에서 숨졌다. 지금도 내 눈에는 선할 뿐이다.


나의 동지회 총회장직은 오래 계속됐다. 매년 내가 자동적으로 총회 장에 선출돼 이를 막기 위하여 한번 총회장을 지낸 사람은 계속해서 총회장으로 유임하지 못하도록 의논하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재무직은 계속 맡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국이 해방되기까지 동지회 북미 총회는 활발하게 움직였다. 해방후에도 조국의 독립과 6.25 둥의 큰 사건 둥이 있었던고로 동지회는 쉴 사이없이 그 활동을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리 승만 대통령이 민주주의의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서 하야하신 후부터는 의기소침했다. 리 박사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던 1960년도에 신 종호씨가 총회장직을 역임하 후부터는 동지회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1961년 주 영한씨, 그962년 송 헌영씨의 아들이며 청년이였던 송영창씨를 끝으로, 즉 1964년부터는 동지회의 기능이 거의 10년동안 동민 상태를 계속했다. 그 동안 동지회 건물의 모든 유지비를 혼자서 밭아왔다. 대의명분으로는 동지회 위원장으로, 그리고 재무로 1973년 10월 21년까지 끌어왔었다.


1973년 나성 지방총회에서 회장에 송영창, 총무에 이상무, 재무에 김 창하, 서기 메리.리. 손등의 제비를 뽑고 과거부터 내려오는 동지회 북미총회의 이사들은 나를 다은 총회장을 뽑을때까지 총회장으로 지명 결의하였다.


왜냐하면 미주 각지의 동지회 대표가 모이지를 않아 나성 중심으로 동지희를 모았기 때문에 총회장을 뽑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 재건 작업도 나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그 목적은 옛날 동지회의 애국 사상과 활동이 조국의 독립을 가져올 수 있는 산파 역할을 다시 살려 혼란한 미주 교포 사회를 정화시키고 민족 통일의 선구적 역할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여기에 대한 나의 지론은 후술의 기회에 더 상세한 것을 다루기로 하고 동지회의 회관 구입에 대해 좀 이야기 하기로 하겠다.


우리 동지회가 나성에 창건되고 회원이 모여 들어도 초창기 우리 동지희에서는 회관을 가질 수가 없었다. 모인 돈은 모두 워싱턴 구미 위원부로 보내기에 바쁘고」우리 동지회 회관 건립은 요원한 문제호 남아있었다. 그러나 우리 동지회원은 낙심하지 않고 동지회관 건립 추진 위원회를 조직,별도로 건축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매달 회원의 능력에 따라서 1불로부터 시작,10불까지 받았었다. 이 건축 기금 마련 때문에 워싱턴의 구미 위원부세 조금이라도 해가 가지 않기 위해 나는 무척 고심과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그 1불을 받기 위해 몇 배의 교통비를 쓸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내 마음에는 기쁨이 총만했었다.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성심껏 1불씩 내는 돈이면 그 돈이 적든지 많든지 관계없 이 따지지 않고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비록 지금은 1불을 내지만 그 성심이 있는 한 형편에 따라 장차 10불, 백불도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1불 속에 그 분의 애국심을 발휘하는 기회가 되며 또한 민족 대동단결에 첩경이 되는 운동이 되는 고로 나는 그 1불을 받기 위해 수십년 동안 동지회 재무로서 봉사를 즐 겁게 감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수년간 모은 돈은 1935년에 이르러 어느 정도 모으기 시작해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믿고 더욱 분발, 동지회 회관 건립을 위해 활동을 했다. 육음 모금 착수 때는 너무나 그 액수가 적어서 낙심이 되었지만 1935년을 넘어서니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이 보였던 것이다. 리 승만 박사의 구미 위원부로 송금을 제대로 보내려니 회원들의 경제력이 남아 돌아가지 않았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더니 그 적은 돈이 모아진 지 10여 년에 약 4천불의 돈이 은행에 건축 기금으로 저축이 되었다. 마침내 우리 동지회원은 남가주 대학교의、교수집을 6천불에 사기로 하였다. 이 집은 남가주대학교 근방인 나성 버몬트가와 36가(街)가 교차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36가 1112먼지였다.  우리는 이 집을 사기 위해서 모자라는 돈 2000불을 주택은행에서 융자하여 드디어 1943년 4월 11일 대한인 동지희 북미 총회 헌관식 (獻館式)을 가졌다.


참으로 기나긴 세월 속에서 장만한 우리 독립운동의 회관이었다.


이 건물을 살 때만 해도 미국의 부동산업에 의하면 아무나 살 수가 없었다. 오직 미국 태생의 미국 시민이라야 부동산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이것은 큰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 이민사가 짧았던 탓으로 미국 태생의 제2세 한인이 아주 드물 때였다. 더군다나 동지회원으로서 부동산을 살 수 있는 적격자가 거의 없었다.


이때 나는 현 나의 아내인 로즈와 결혼을 하여 살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 2세의 한인이었다. 이를 알고 있는 동지회원은 내 아내 및 내 처형과 메리.리 이름으로 동지 회관을 살 것을 완강히 권유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동지회 북미 총회의 회칙에 따라 내 아내 및 처제와 메리.리가 탁사부 의원으로 되어 있고 그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있다. 이들의 이름으로 산 집을 동지회 희사(喜捨)한 것처럼 해서 되어진 것이 오늘의 동지회 회관이다.


오늘날 나성 앨렌댈.플래이스 2716번지에 위치한 동지회 회관은 이것을 7천불에 매각 처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현(現)회관은 당시 2 만1천불에 매입하여 은행에 매월 1백 80불씩 부어 마련된 건물이다. 이 돈을 수금하러 회원집에 나타날 때자다 회원들은 내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를 알고 으례히 말하지 않아도 작정한 액수의 회관 건립비를 주었다. 혹시 거리 나 우연한 장소에서 만나더라도「송 선생, 나 이달 회관 비는 내었읍니다」라는 말이 인사 대신에 사용되어질 정도로 나의 회관모금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제때 회관비를 받지 못하고 은행에 불입할 날짜가 다가오면 응당 그 돈은 내가 대신 지불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십년간 무보수로 이 회관 모금올 위해서 소비한 시간만 해도 내 생애의 몇 분지 일을 차지했을 줄 나는 믿는다.그 숱한 사연을 다 애기하라면 책이 몇 권이 되어도 모자랄 것으로 안다. 조국의 독립운동이 그토록 생명처럼 중요 하고 귀해서 민족된 자로서 내 할 바를 하다가 보니 그랬을 뿐이다.


이러한 내 조국이라 독립 후 내 조국이 오늘까지 아니 자손만대까지 내 조국의 장래 문제를 신중히 생각했지 결코 잊어 본 일이 없다. 부디 바라기는 민족된 자 그 누구든지 지난 우리 민족의 애국애족했던 그 역사들을 깊이 통찰하여 조금도 조국에 유감된 일이 없기를 바란다.


조국을 위해 애쓰며 눈물과 피를 홀리 면서까지 애국애족했던 사실을 결코 가법게 생각하지 말고 신중하기 바란다.


두 번 다시 자기 명예와 이익 때문에 민족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 는 그와 같은 행동이 없기를 학수고대한다. 나라 사랑이 무엇인가를 수많은 선조들의 그 위대한 업적들을 살피고 깨달아서 민족의 번영과 자 주를 영원토록 창달하기 앙원(仰願)한다. 선조의 업적 가운데 우리 대한인 동지회도 그 하나인 줄 믿어 감히 이 증언을 남겨 조금이라도 애 국애족의 보탬이 되고자 이 글을 쓴다.










(주) 팔리어에서 양로원을 경영했었다. 한국 노인들을 위해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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