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10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4. 동지회의 사업


구미 위원부를 돕는 것 이외에도 동지회의 사업은 상해 임시정부세도 돈을 부쳐야 했다. 미주 동포의 수는 제한되어 있고 그 경제도 노동둥 품팔이에 의존했던고로 우리 동지회의 재정은 넉넉치 못해 항상 쪼들리고 허덕였다.


보다 못한 우리 동지회는 리 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해서 1924년 11월 24일 하와이 호항에서 동지식산회사름 설립하는 대회를 열고 그 착수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인 1925년 3월에 1백불짜리 주(株) 7백 개를 모으는데 성공하여 총 자본금 7만불로 동지식산회사가 조직되었다.



이 때 나는 백인집 스쿨.보이시절의 고학도인고로 한 주도 살 수 없었다. 만약 안 창호의 북미 실업 주식회사의 협잡에 속지만 않았어도 몇 주는 사서 동지촌 건설의 재원 확보와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유감없이 참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푼의 돈이나마 동지회원이 주를 사는데 조금씩 모자라는데 참가하여 간신히 이 모금 운동에 참여 할 수가 있었다. 돈은 없었으나 같은 동지회원과 동포를 설득시켜 동지식간 주식회사 설립의 주응모에 많이 참가하도록 무척이나 애를 썼고 노력을 아끼지를 않았다.


북미 실업 주식회사에 혼이 난 우리 교포들은 선뜻 투자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이 불신감과 주저를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동지식산회사의 설립 목적과 회사 조직의 실태를 아주 격조 높게 설득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안 창호 선생의 사업 처리의 후유증은 이때까지도 완치되지 않아 우리의 순수한 독립운동 자금 염출에 아주 어려움을 주었다. 그래도 동 포들은 내가 열심히 설득할 때 돈의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모두 동 지식산회사 설립에 동조, 투자를 주저하지 않았다. 북미 실업 주식회사에 협잡을 당한지 얼마 되지 않던 때라 돈을 투자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한 주를 사는데 여러 사람이 합자로 한 주씩을 사기도 했다.


우선 투자된 자본금으로 하와이 오올라에 소재하는 민간인 소유 9백 90에이커의 산관올 매입,벌목을 해서 그 자리에 농지 조성을 하여 여러가지 농산물을 재배하고 또 벌목에서 나오는 나무로 재제소 경영,숫 굽는 경영을 하기로 하였다. 리 승만 박사는 하와이 해군기지 수뇌들을 찾아가 동지식산주식회사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상품을 주문하도록 주선을 하여 그 판로의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그는 미 해군에서 무진장으로 4용히는 목재를 동지식산회사가 납품하는 계약을 맺어두었다. 그러나 적정되는 것은 그 많은 목재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최신식 제재소의 기계 도입이었다. 아직 재미 동포는 거액의 예산을 맡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경제였다. 하와이에 무일푼으로 이주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의 몸으로 여전히 전전하고 있을 때이다. 이 홀아비 신세로 백인의 농장 혹은 미국에서 가장 힘겹고 천하며 임금이 싼 직장으로 전전하고 있으니 교포들의 수중에 돈이 많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 연방정부나 은행 둥에서 보조나 융자를 받을수도 없었다. 미국은 당시 유색 인종 특히 갓 이민한 외국의 동양인에 대해서는 제도적으로 혜택을 못 받도록 되어 있어서 금융 지원이나 보조를 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의 국법과 사회 체제가 백인 중심이기 때문에 우리 한인과 같은 망명 이민자들에게는 미국인과 그 정부에 의해서 무관심 내지는 완전히 외면을 당하고 있을 무렵이기 때문이다.


비록 리 승만 박사가 미국인 친우들이 많고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있어 미.해군의 목재 공급의 낙찰이 이루어졌으나 그에 대한 경제적인 문제는 이상과 같은 미국 경제 체제의 상황에서는 리 박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끝에 강구된 것이 字을 한국식으로 구워서 이것을 매각,기계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이 숯을 구워 팔아서 제재소에 필요한 기계를 사들이자는 계획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동포들로부터 투자된 돈은 회사와 공장 부지를 사고 나니 돈이 떨어졌던고로 그밖에 다른길이 없었던 것이다.


리 승만 박사는 손수 몇 사람을 대동하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톱으로 잘랐다. 그 자른 나무토막을 꿎굽는 용광로에 넣기로 하였다. 그래서 땅을 파고 흙을 모아서 거기에 물과 섶으로 이겨 크고 맵시 있는 숯가마를 만들었다. 이 숯가마의 용광로 속에 자른 나무토막을 차근차근 쌓아 넣어서 불을 넸다. 이제 각 아궁이를 막고 그 나무 둥걸들이 훌륭한 목탄이 되기를 바라고 며칠을 기다렸다. 이 목탄숯으로 제재소의 기계톱을 비롯한 각종 기구를 장만한다는 큰 기대 속에서 그 날들을 고대했었다.


이러한 부푼 가슴을 안고 며칠이 지난 후 숯굽는 장소를 찾았다. 용광로 아궁이에 통풍을 막은 물체를 제치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앗 !이 어찌 생각인들 했으랴 ! ” 응당 보여 야 할 새 까만 숯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하얀 재만 남아 있었다. 그 뜻하지 않은 사태에 멍하니 한참동안 태평양 위의 하늘만 쳐다보아야 했다. 이옥고 정신을 가다듬고 그 원인을 알아 보았더니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공기가 그 속으로 스며 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흙으로 만든 그 숯가마가 처음 열올 몇 천도로 가하니 그 흙벽사이로 균열이 생겨서 비롯된 결과였다. 적어도 그 숯가마를 몇 번 열을 가해보고 숯을 본격적으로 구워야 했는데 경험이 없었던 연고로 실패한 것이다.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너무나 절통한 결과였다. 기대가 큰 역사(役事)였기에 그에 따른 실망도 측량할 수 없이 컸었다. 이 실망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字을 굽고 해서 자본금올 마련하려고 했었지만 리 승만 박사가 더 이상 하와이에 머물수가 없었다. 리 박사는 하루속히 워싱턴 구미 위원부로 돌아가서 그간 미루어 놓았던 외교활동을 해야 했었다. 그리고 미주 본토의 동포와 동지희를 돌아보아야할 일도 있었다.


1929년,10월경 리 승만 박사는 나정에 조직되 동지회 북미총회에 들러서 우리 동포들음 격려하였다. 그는 이때 일본의 대록 침략이 꼭 한반도를 통해서 가장 가까운 만주 침략이 자행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리 박사의 예언대로 일본은 그 2년 후인 1931년 11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삼키고 말았다. 또 그 만주를 통해서 6년 후인 1937년 7월 노구교(蘆滿橋)에서 중국과 충돌 중.일전쟁을 발발시켜 마침내 대동아 전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리 박사는 이 예언적인 그의 정치 철학과 이념을 미국을 비롯한 세계제국에 알릴 필요가 있어서 하와이에 언제까지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한국민의 독립은 일본의 대륙 침라과 세게 전쟁을 막는, 즉 세계 평화 의 지름길이 된다는 여론 환기가 필요했었다.


1924년 가을 하와이에 와서 약 5년간 머무는 동안,즉 동년 11월 24일 대한인 동지회 총재로 부임한 이래 무수한 일을 했다. 교회 신축,학 교설립과 확장, 태평양 주보를 1930년 12월 13일부터의 동지회 기관보 로 발전시키고 하와이 교포 사회를 안정시키고 민족애와 교육으로 동포들에게 애국과 계몽 둥 향상을 도모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민족올 위한 독립운동의 기간 사업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천갈래 만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갈라진 교포사회를 거의 하나로 묶어두었다. 그 말 많고 심술궂은 국민회와 교민회 로부터 하와이 동포들을 해방시킨다고 무던히도 애를 쓴 탓으로 그 빛을 보게 하였다. 혹자는 리 승만 박사의 전기를 쓰고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함에 있어 리 박사가 이 때에 노력한 노고에 대해서는 아주 불운(不運)의 시대라거나 또는 한적한 시대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오히려 민족 독립운동의 보람차고 분망한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한인들이 재미 역사를 자세히 모르는데서 비롯된 표현인 줄 믿는다.


여하간 리 승만 박사는 하와이를 떠나 미주 본토를 둘러 본 이후 하 와이의 제반 사업을 자기가 없더라도 해 나갈 수 있도록 정리를 해야 하였기에 1930년 1월 하와이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동지식산주식회사를 정리하였다. 리 박사가 없는 한 재정이 달리는 회사를 더 이상 경영 하지 못할 것 같아 동지회원의 전체 의사에 따라서 문을 닫고 말았다. 모든 동지회원과 주주들은 한 사람의 불평과 원망없이 폐사를 선언하게 되었다. 오히려 리 박사의 이 때까지의 노고에 대해 치하를 아끼지 아 니하였고 언제가는 다시 리 박사를 모시고 우리 동포들의 사업을 대대 적으로 벌일 준비와 기회를 기다리기까지 하였다.

그 이유는


                                    

 첫 째 우리 교포들의 빈약한 경제 사정이 동회사를 제대로 뒷받침못한데 공동의 책임 의식이 있었고 

둘 째로 신홍 동양인의 기업체가 기성 백인 사회에서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며, 

세 째로 리 승만 박사가 언제까지나 하와이에 머문다는 것이 독립운동에 유익치 못 하다는 것을 인지(認知)했던고로 어떠한 잡음도 없었다. 결코 홍사단의 북미 실업 주식회사처럼 협잡에 대한 불미스러운 일이나 소요(羅提)가 없었다. 다만 1년 전에 해고당한 길 원용씨가 그의 지조를 잃은 인격은 생각지 않고 자기가 해고당한 앙갚음과 이러니 저러니 했을 뿐 아무런 일이 없었다. 그는 1930년 7월 16일 리 승만 박사의 동지회 일을 돕도록 한 바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후술에서 좀더 자세히 이야기 하겠다.



폐일언(廢一言)하고 리 승만 박사의 이때 업적은 독립운동 뿐만 아니 라 오늘날까지 민족에게 큰 유익을 느낀 위대한 사업이라 하겠다. 그 증거가 1955년 땅을 매각 처분하여 마련된 인하 대학교(仁荷大學校)라 하겠다. 환언하면 리 승만 박사를 중심해서 이루어진 이 동지회의 여러사람 가운데 부동산이 다수 값지게 남게 되어 오늘의 한국 인하 대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인하 공대로써 한국의 많은 젊은 과학도들을 양성했고 지금은 종합 대학교로 승격되어 수많은 지성인들을 길러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한편 우리 동지회 북미 총회에서는 이미 언굽한 바 있는 워싱천의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 자금 지원과 회관 건립 이외에 [북미시보]를 발행했다. [북미시보]는 1943년 4월 11일 회관 건립식 날짜와 보조를 같이 해 창간되었다. 처음엔 속쇄판의 주간지로 발행했으나 나중에는 한글 타자로 발간되었다.


1965년도까지 발간되어 오다가 중도에 동지회 자체의 소침(錯沈)으로 인하여 근 10년 동안 휴간하다가 1973년 11월 18일 날짜로 다시 복간이 되었다. 이 신문을 통해서 미주 본토의 한인들이 안으로 동포 상호간의 소식 및 친목도모와 밖으로 해외소식의 궁금증을 덜게 되어서 많은 공헌을 했다.


해방이 되고 구미 위원부의 규모가 축소되였음 때 우리 동지회워듬이 워싱턴으로 보내는 애국금의 부담도 적어져서 그 남는 여력을 갖고 해방 후의 조국에 구호품을 보냈다. 일본의 40년간의 수탈 행위는 조국으로 하여금 빈죽더기를 만들어 놓았다. 해방된 조국을 찾아 세계 각지에 서 돌아오는 동포는 해방의 기쁨도 잠깐일 뿐 굶주림과 기아석상에서 허덕여야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전국에 만연(養延)한 호열자병으로 해방된 조국은 마치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애국지사라고하는 인사들은 조국의 이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참혹상의 관심보다는 정치적 금의환향에 더욱눈독을 두었다. 그래서 정치적 파당 행위로 수많은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나왔다. 이럴 때 나는 이역만리 미국에서 조용히 나혼자 동족들에게  보내는 구호금 및 구호물자를 모으는데 전신을 바렸다. 사랑하는 내  조국이기에, 그렇게도 목마르게 바라던 내 조국의 해방이기에, 내 혼과 힘을 다하여 구호픔을 내 동족 뿐만 아니라 미국 시민에게 갹출(醜出)하여 모이는 대로 조국으로 쪽쪽 운송해 보냈다. 물론 동지회의 이름으로 보냈었다. 내 평생 조국과 함께 살기로 수없이 결심했던 그대로 행동을 계속했다. 다른 이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애국을 안했다. 해방 후 조국으로 갈 수만 있으면 가서 미군정청에 한 자리를 하면서 애국하려고 하여 이와 같은 구호품을 모으는 운동에 관심을 가질여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구호품을 만들어 적십자사를 통하여 보냈는데 이것이 일본 하관(下關)에서 묶인 채 한국으로 가지 않았다. 그래서 최 운상 영사에게 이야기하여 미 해군성에 부탁하여 한국으로 운송토록 했다. 나는 차가 없는 최 영사를 태워 수속도 하고 또 각 요로에도 찾아다녔다. 일단 구호품이 모여지면 일꾼들이 구호품을 미.해군성에 갖다 주어 한국으로 보내게 되었다.


최 운상 영사는 당시 나성 다운타운.브로드웨이 4가에 위치한 Arcade Building 2층에서 일하면서 한국 국기를 바깥에 내걸고 방 2개를 얻어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차가 없어 어딜 가게 되면 내가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본국 정부에서 보낸 서신이 모두 나에게 왔기 때문에 그것을 전해 주다보니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내 독립운동은 처음부터 조용히 내 조국의 독립과 번영에 목적을 둔 고로 그러한 정치적 입신양명(立身揚名)같은 마음은 내겐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살아 생전에 조금이라도 민족과 조국을 위해 좀더 일 하고 좀더 헌신하는 그런 신념밖엔 없었다.  이 때까지 살면서 한번도 명예욕을 탐내 본 일이 없는 나인지라 이때 일수록 내 마음을 정양(靜養)하여 무엇이 애국이며 민족의 사명인지를 살피고 살폈었다.


먼 이국에 살면서 전파를 타고오는 고국소식은 고국의 경제 형편이 ᅳ 엉망진창이라는데 대해 가슴이 아팠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해방의 기 쁨에만 젖어있을 수 없던 것이 내 조국의 경제 형편이라서 그 기아와 전염병에서 해방시키는데 모든 신경을 몰두해야 했었다. 전쟁 후에 패 전국의 참혹상, 더군다나 패전국의 식민지의 참혹상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었으니 민족된 자 어찌 가만히 전승(戰勝)에만 도취된 채 좌시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듯 조국애에 사무쳐 활동하고 있을 때 양대세력인 미,소를 중심 해서 수많은 정당의 파벌 싸움으로 독립운동의 거성들이 하나하나 암살로 사라지니 정치나 세상 명예욕은 더욱나와는 멀어져 갔다. 오직 일편단심 조용히 말없이 숨어서의 조국의 뒷바라지를 하리라는 생각만 성숙(成熟)되었다.




53_미서해안 - Copy.jpg






54_한미제독 - Copy.jpg



55_한국해군 - Copy.jpg




56_장교단.jpg



57_화한증정.jpg




58_환영인파.jpg



59_조국부흥.jpg



그런던 중 1948년 8월15일을 기해서 반쪽나마 독립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에선 손 원일(孫 元一)씨를 단장으로 하여 우리 해군을 이곳 나성으로 파견해 왔다. 우리 정부가 세워진지 오래돼지 않니하여 우리 동지회는 한국 총영사관을 대신하여 그들을 성심으로 환영하였다. 대한민국의 해군정장을 하고 늠늠하게 상륙한 그들와 모습을 접할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 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왜놈들의 군복만 보다가 이렇게 막상 우리 해군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이 이상 더 감개무량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들을 부둥켜 얼싸안고 한없이 기뻐했다. 나는 그들을 우리집으로 모셔와서 먹이고 재웠다. 무엇이던지 그들이 원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켙에 나가 내 손수 사오기도 했다.


우리 해군의 도미 목적은 미 '해군의 구축함 인수차 온 것이다. 손원일씨는 후에 그가 국방장관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여기서 발휘했다. 해군의 께끗하고 우아한 정징을 벗어 버리고 그대신 기름때가 새까망게 묻은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그의 사병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구 스 가은 땀을 홀리면서 헌 배를 손질하는 것이었다. 또 조금이라도 국고(國庫)를 아끼기 위해 아주 싼 방 하나를 숙소로 정했고 차는 미 . 해군과 절충,그냥 빌려 랐으며 부하 장병들의 필수품 조달은 본인이 직접 상가에서 싸게 구입을 하는 둥 대단한 노력가이며 경제가였다. 이때 인수한 배는 전부 세 척이었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사진 가운데 구축함인지 순양함인지 모르나 期2호 함정의 큰 사진 한 장을 갖고 있다. 이 세 함정은 6.25 바로 직전 모두 수리를 마쳤다. 동지회 북미 총회에서는 그 수리가 끝나는 날 축하 파티를 크게 열어 주었다. 이곳 나성을 떠나는 날 하와이 동지회에 알려서 그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도록 주선까지 해 주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 세 함정은 1950년 주일날인 6월 25일 갑판 축하연회를 가졌다. 그러나 바로 이날 북한이 남한을 침라하여 6*25를 일으켜 본국 정부로부터 빨리 귀항하라는 명령을 받고 모든 축하 연회를 중단하고 귀국해야 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귀국한 이 세배는 6,25전(戰)에 참전,용감 분투하다가 그중 한 함정이 함흥 앞바다에서 장열하 게 침몰하고 지금은 두 함정이 남았다는 이야기를 후에 손 원일 제독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6,25 사변을 전해 들은 나는 다시 한번더 내 조국을 위해 구호품을 로집하지 않으며 안되었다. 조국의 국난을 위해 범교포적이 운동을 벌여 미국 시민들로부터 우리 조국을 돕도록하려했다. 국민회의 실력자 이 화목여사를 만나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의 구호품을 누구에게 보내는냐 하는 문제 때문에 깨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 누가 받던 거기에 관심을 갖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구호품을 많이 모아 한국 땅에만 갖다 두면 우리의 목적은 끝난다고 하였다. 일단 한국 땅에 도착하면 한국 정부도 있고 또 그밖에 각 사회 봉사단체 가 있으니 거기 너무 신경을 쓰지 말자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 국민희측은 구호품옴 모아서는 이북땅에 한정을 시키고 그리고 그 어떤 특정인을 선정, 구호품유 보내야 한다고 우겼다. 즉 이 것은 홍사단이 서북인 중심의 지역, 혹은 지방색을 들어낸 것이다. 그 옛날 안 창호 선생의 본바탕을 드러낸 소의(小意)였다. 그래서 그들은 독자적으로 구호품올 모아서 보내겠다고 하기에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나는 그러한 홍사단의 구호관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설사 구호품이 남쪽인 부산 항구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 구호품은 북쪽 지방에서 피난온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집 갖고 자기 먹을 것이 있는 동족들이야 모두 남쪽사람이 대부분이니 그들에게는 자연히 구호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을 몰랐다. 사실 그 구호품은 대부분 모두가 이북 피난민 동포들에게 나뉘어 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사단의 국민회 사람들은 지역과 특정인을 주장,범교포적 구호 사업에까지 동조를 거부했다.


그 당시 동지회관에는 약 20명의 동지회워들이 삼며서 구호품 포장을 했는데 윤 병국씨의 부인,이 춘화,최 덕규,오 대도, 이 영근,박 영등 제씨이다.


앞서 애기한 최 운상 영사가 편지를 써서 구호품을 모으곤 했다. 나는 내 가족들과 함께 우리와 지면이 있는 미국 시민들에게 한국을 돕기 위한 구호품 수집의 캠페인을 벌였다. 내 아내는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기록해 두고 나는 그것을 지역별로 나누어 구호품을 찾아 오고 내 처형은 감사 편지를 발송하는 3면작전음 벌였다. 이 작전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내가 밖에서 하루종일 움직이다가 집에 돌아오면 내 아내는 그 구호품을 가져가라는 전화를 받아서 주소. 성명을 수북이적어 두었다. 전화 명단음 지역별로 정리. 다시 니는 전화를 걸어 어느날 몇 시경에 귀댁을 찾아 갈 터이니 귀댁의 문적에 구호품음 두며 가지고 가겠다고 연락을 취했다. 내가 찾아 온 그 구호품에 대해서는 반드시 나의 처형이 감사 편지를 친절하게 내었다. 미국 시민들은 이 처음 경험하는 구호품 기증 답례에 대해 아주 이상한지 자기들끼리 화제(話題)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 화게는 서로 꼬리를 물고 미국 사회에 널리 선전이 되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미국시민과 교회가 호응 해서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나성서는 물론 먼 타주에서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구호품을 수 없이 부쳐왔다.


정음 한국으로의 운송은 국제 적십자를 통해서 했다. 그러나 적십자 측에서는 그 구호품을 일본 하관까지만 운송하고 더 이상 한국까지 운송하기는 전쟁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통지가 왔다. 나는 미 해군을 찾아가 구호품을 한국까지 운송해줄 도움을 요청했다. 미 해군에서는 즉각 허락해 주었다. 한국의 어느 장소든지 미 해군의 배가 정박하는 곳에 구호품을 하선시켜주면 만족한다고 했다. 나의 심중은 다만 그 구호품이 미국에서 한국 땅에 떨어지기만하면 그 구호품은 한국의 것이 되니 그 구호품처리는 한국사람에게 맡겨던 것이다. 소승적인 것보다 대승적입장에서 내 구호품 보내는 운동은 계속 되었다.


구호품이 적던 초기에는 내 승용차로 나를 수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구호품이 원근 각처에서 쇄도(殺到)하니 승용차로는 나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사업에 청과물과 채소를 싣고 다니는 대형 추럭으로 실어 날랐다.


우리 동지회 넓은 뒷 마당에는 온통 구호품으로 가득찼었다. 동지회건물에 기식하고 있는 우리 연로한 동지회원들은 그 구호품을 꾸리느라고 몇년을 쉬지 않고 수고했다. 나는 포장지를 마켓에서 사다가 포장을 완전히 하도록 했고 마지막 미 해군에서는 한국으로 가는 선편에 운송하여 조국의 동포들에게 전해졌다.


나는 앞에서도 조금 말했지만, 그 구호품이 어느 지역, 어느 누구에게 간다해도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하든지 구제 물품을 많이 보내어 수난 받고 있는 내 동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것 뿐이었다. 그 구호품이 혹시 개인의 사리사욕에 이용된다 하더라도 구태여 누구를 지명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민족으로서 민족의 양심에 맡겨 그 구호품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에 일임하자는 것이 내 주관이었다.


내가 맡은 소임은 부지런히 쏘다니면서 구호품을 열심히 하나라도 더 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6.25 전쟁이 끝나고도 2년 여를 구호품을 걷 우어 보내다 보니 사생활이란 거의 없었다. 어린 아들 자식은 아예 나 의 차를 안타려고 하였다. 심지어 나에게 안기려고도 하지 않했다. 왜냐하면 구호품의 고약한 냄새가 내 차와 내 의복에서 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수없이 보낸 그 구호품은 누가 보내는지 내동포는 몰랐었다. 다만 미국에서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와 동지회원들은 그저 열심히 해외에서 민족을 돕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자 만족이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완전히 꾸린 짐만도 대형 추럭에 3, 4대분이 되었으니 그 구호품이 산더미 같이 언제나 우리 동지회 마당에 산적(山積)되어 있었다. 나는 혼자서 그것을 수년 동안 나성 산페그로에 위치한 해군 기지에 실어 날라 한국으로 보냈다. 아마 내가 보낸 구호품만도 수천 톤이 넘었을 것이다.


어떤 미국 시민은 자발적으로 구호금도 보내 주었다. 편지 사연에 자 기는 구호품이 公으니 그대신 현금올 보낸다고 했다. 현금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한국으로 보냈다. 지금 기억되기는 서울 동대문 밖인가 거기에 사회사업을 하고 있었던 황 온순씨, 그리고 군 . 경 . 원 호청 둥지에 보낸 것이 기억된다.


이렇게 해방 후부터 6.25 전쟁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조국으로 구호 품과 구호금을 보내게 되니 남모르게 계속했던 우리들의 자선 운동도 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성주재 총영사 최 운상씨가 보고하는 이외 에도 미국을 거쳐간 동포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조국에서 미국으로 온 육. 해,공군을 위시해서 많은 공무원들이 동지회에 찾아오면 나는 들에게 이 구호품을 한국에 가지고 갈 수만 있으면 가지고 가서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금까지 건내 주었다.


이래서 그들 동포들이 고국에 당도해서 동지회의 동포돕기 운동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이 소문과 보고가 리 승만 대통령에게도 상세히 알려 졌던 모양이다. 리 승만 대통령은 그 국난 중에 정무(政務)가 바쁜 가운데도 친히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보내왔다.


                                                                                 

 「라성 동지회 일동


지난 성탄에 귀한 예물올 보낸 것을 받고 깊이 감사하며 긴용할 적마다 기념할 것입니다. 새해에 귀회 일동이 많은 복을 받으시며 회무가 진전되고 나라 통일을 완성하기를 축하합니다. 귀회에 여러 동지들을 보고 싶은 생각이 종종 나서 편지라도 보내고 싶으나 시간도 얻기 어렵거니와 누구에게나 다 할 수도 없고 도무지 무정하게 잊고 지내는 것 같아서 한탄할 뿐입니다. 몇 동지를 청해서 한 번씩 다녀가라고 하고 싶으나 난리 중에 국내 에 있는 사람도 어찌 할지를 모르는데 숙식할 처소도 없이 청할 수도 없고 한갖 생각 뿐이매 아주 잊어버린 줄로 알지는 마시오.


내가 귀국한 후로 속에 작정한 것은 과거 40여 년 동안 파당 싸움 으로 독립운동에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지금은 다만 이 남만이 라도 찾 아가지고 국권을 회복하게 되 었은즉 나부터 내 파당이 라는 의도를 버리고 내 당파를 정부안에 수립한다는 말을 없이하기 위해 반대파 사 람들을 얼마 내어 세울지언정 내 동지들은 아직 내세우지 말아야 반 대파 사람들이 스스로 감복해서 국시를 같이 도움게 함으로 남북이 정신통일을 해야 이 후에도 영구히 민족의 복리를 줄 수 있겠다 하고 그대로 행하여 온 것인데 지금와서 보니 우리의 반대 분자들은 국내 외에서 여전히 비밀리에 이전의 구습대로 반대운동올 조직적으로 진행하석 나가는 중에서 지방 관념이 점점 깊게 뵈이고 있음으로 이것을 그저 두고는 앞으로 민국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임으로 지금은 서로 정당울 조직하여 자유당이라는 명의로 대활동이 되고 있으니 귀회 여러 동지들은 이 취지서를 자세히 보시고 이 정강을 믿는 남 . 녀 동포는 일일이 선서 입당시켜 동지회는 여전히 지켜가며 자유당 당원이 많아 민족분열올 일삼는 무리들로 동족상쟁의 화가 되는 것을 양성치 못할 만치 만들어야 될 줄로 믿는 바입니다.


이상을 여러분이 보고 절실히 상의하여 이 주의를 옳게 아는 동지들은 다 입당시켜서 명록올 속히 총본부로 보내시기 바라며 다시 신년 만복을 축하합니다.


임진년 1월 8일 밤에 잠겨

리 승 만」




이상의 리 승만 박사 편지는 당시 내가 대한인 동지회 북미 총회 총회장으로 있을 때이다. 이 편지 내용이 우리 동지회가 보낸 예물의 감사와 자유당 결성시의 리 박사의 심정을 적어 보내고 거기에 적극 협력할 것을 당부했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동지회가 리 박사의 귀국 후에도 줄기차게 국가에 영향을 미칠만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에 만족해 하시고 그 힘을 십분 믿었던고로 이 편지를 나에게 보내어 동지회원들에게 촉구했던 것이다.


리 승만 박사는 그 후 6,25 전쟁 이 끝나고 백 한성 내무부장관을 시켜 다음과 같은 감사장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아니하셨다.


                                            

「감 사 장

로스앤게르스 동지회 회장

외 회원 일동


귀회원 제위는 해외 수만리 이역에서 허다한 곤란과 형극의 애로를 타개하면서 오직 조국의 광복과 평화를 념원하며 국제교의를 돈후히 하였을 뿐 외라 북한 괴뢰와 중공의 남침으로 인하석 발생된 수다한 경찰 유가족이 곤경에 처하여 있음을 동정하여 각자의 영세한 수입에서 갹출한 미화를 고국 경찰 유가족회에 기증함은 숭고한 애국심의 발로이며 우리의 최고 영도자이신 리 승만 대통령 각하의 애국애족하시는 성지를 봉대한 결정으로써 그 특지를 높이 찬양하며 자에 감사장을 증정하나이다.


단기 4286(1953)년 9월 23일 대한민국 내무장관 백 한 성」 




이와 같은 본국으로부터의 감사장은 허다했다. 여기에 실은 감사장은 우리 동지회원이 미국 시민으로부터 구호금올 기증받은 것을 보낸 것이 아니라 우리 회원들이 직접 호주머니 돈에서 각출하여 보낸 성의금이었다. 우리는 마음. 노동. 재산 등을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을 보냈다. 조국을 위한 우리의 애국활동은 쉴 줄 모르는 부단한 기계와 같았다.


어느 날 미 육군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왜 동지회에서 구호품을 한국으로 보내는 대 미 해군만 상대하고 미 육군은 상대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동지회에서 미 해군만 상대하게 되니 미 육군의 대외적인 체면 과 선전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그것은 어렵지 않읍니다. 언제든지 미 육군에서 우리 동지회에 찾아와 구호품을 싣고 한국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것만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누가 싣고 가던 거기에는 상관하지 않읍니다. 다만 구호품을 한국으로 운송하여 주신다하니 감사할 뿐입니다.」


라 했다. 그 후 미 육군에서는 우리들이 구호품을 수집하여 운송하기에 편리하도록 구호품을 꾸려 놓은 것을 가져가 한국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이토록 우리는 민족의 얼과 피 때문에 죽도록 우리의 사명을 다 하였다.


이제 내 나이도 구순을 넘어서고 옛날 애국 동지들도 거의 이 땅에서 외롭게 숨져 가버 린 요즘 지난 날의 그 애국으로 내 조국을 한없이 염려할 뿐이다. 망명도, 공부도,동지회도 모두 내 조국을 위해서 존재하고 웅직였다면, 아직도 남북이 나뉘어져서 민주 번영의 통일국가로 회복되지 못하고 항상 동포끼리 서로의 가슴을 겨냥하며 둘로 나뉘어진 자기네들끼리 통일을 외치는 나머지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회생시키고 또한 국제 사회로부터 조롱을 받고 사는 내 조국의 동포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도록 메일 뿐이다. 고종의 민비가 왜놈들의 낭인들에 의해서 살육되어 화장(火葬)되더니 최근에는 박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 영수 여사가 암살되고 말았다. 비록 재일 동포의 제2세인 문 세광(文此光》이 암살을 했다 하지만 일본의 수상 다나까(田中)가 도의적인 재임을 지고 국민장에 참석을 해야 했으나, 또 다시 우리 조국이 국모를 왜놈들에 의해서 잃은 셈이 된다.


이러한 국치(國恥)를 당하지 아니하려면 하루속히 조국통일을 이루는 민족의 단합이 절실히 0[쉽다. 애국. 애족이 분파와 분열은 걸코 아니다.


외세에 대처하고 민족 번영을 위해 우리 조국의 조상들과 그리고 무명인으로 평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우리 동지회원의 그 거룩한 애국 - 애족을 한번 진실하게 살펴 조국을 반석 위에 올려 놓기 바란다.


나의 동지회시절은 애국.애족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행동에 옮기는 가를 깨 닫고 배우게하여 실행토록 했었다. 대한의 역사는 결코 미주 한인 동지회원들의 애국 '애족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웃날 역사의 귀감으로 크게 평가할 줄 믿는다. 왜냐하면 대한인 동지회의 정신은 거룩했었고 사업은 민족의 독립과 빈영을 위해서 맡은 바 충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나 자기 선전이 아니다. 민족의 역사는 반드시 우리 동지회의 애국충정의 진하고 뜨거운 피로 역사가 이어지고 민족의 혼이 있는 거기에 언제든지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하리라 확신한다.


수많은 애국. 애족으로 생을 마친 동지회원들의 영령들이 저 하늘나 라에서 그 날을 기다리고 있음올 감안할 때 그와 같은 날이 반드시 올 줄로 안다.


그 민족과 그 나라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서는 우리 동지회원 같은 민 족애와 실천없이는 불가능하다.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우리 동지회와 같은 명실공히 애국활동을 했던 단체는 없었다고 나는 조금도 서슴지 않고 자부하고 싶다.


전민족이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 핵심적 활동은 우리 동지회가 했었다. 동심동력하여 민족의 지도자 리 승만 박사로 하여금 외교활동을 눈 부시게 하게 하여 만국 정치지도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모든 측면 지원을 다 하였다. 끝내 대한민국 독립을,그리고 대통령을 낳는 산모 역할을 하였다. 그러기에 동지회원들은 조국을 진정 사랑하고 모 든 것을 바쳤다.


요건대 동지회의 사업은 잃어버린 조국을 다시 찾는 주축 역할을 하 였고 독립의 산파 역할을 훌륭히 해낸 사업이었다고 하겠다. 이제 이 것은 엄연히 우리 역사에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 누구도 부정하고, 지울 수 없는 우리의 찬란한 독립운동사가 되었다. 그러기에 나는 내 동지들이 하나하나 이 세상을 떠나고 나 혼자 외롭게 있어도, 그리고 동지회 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해도, 동지회와 동지회원이 된 것을 항상 자랑하면서 자부하며 살고 있다



  1. [연재: 송철회고록] 송철 회고록________차례

    Date2019.12.12 By종이비행기 Views137
    read more
  2. [연재: 송철회고록] 7. 굳건한 애국 정로

    Date 2020.12.01 / 단기: 4353.12.01 By종이비행기 Views9
    Read More
  3. [연재: 송철회고록] 6. 한족연합회의 비극

    Date 2020.11.15 / 단기: 4353.11.15 By종이비행기 Views53
    Read More
  4. [연재: 송철회고록] 5. 국민회

    Date 2020.11.06 / 단기: 4353.11.06 By종이비행기 Views76
    Read More
  5. [연재: 송철회고록] 4. 동지회의 사업

    Date 2020.11.01 / 단기: 4353.11.01 By종이비행기 Views103
    Read More
  6. [연재: 송철회고록] 3.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Date 2020.10.20 / 단기: 4353.10.20 By종이비행기 Views93
    Read More
  7. [연재: 송철회고록] 2. 동지회의 창건

    Date 2020.08.20 / 단기: 4353.08.20 By종이비행기 Views67
    Read More
  8. [연재: 송철회고록] 제 6장 대한인 동지회 시절

    Date 2020.07.17 / 단기: 4353.07.17 By종이비행기 Views123
    Read More
  9. [연재: 송철회고록] 7. 7백 의사(義士)의 충혼

    Date 2020.07.05 / 단기: 4353.07.05 By종이비행기 Views84
    Read More
  10. [연재: 송철회고록] 6. 다시 망명으로

    Date 2020.06.23 / 단기: 4353.06.23 By종이비행기 Views50
    Read More
  11. [연재: 송철회고록] 5. 나는 어디로

    Date 2020.06.23 / 단기: 4353.06.23 By종이비행기 Views31
    Read More
  12. [연재: 송철회고록] 4. 나무를 심는 마음

    Date 2020.06.23 / 단기: 4353.06.23 By종이비행기 Views35
    Read More
  13. [연재: 송철회고록] 3. 일본 형사의 미행

    Date 2020.06.23 / 단기: 4353.06.23 By종이비행기 Views40
    Read More
  14. [연재: 송철회고록] 2. 15년 만의 고국산천

    Date 2020.06.13 / 단기: 4353.06.13 By종이비행기 Views50
    Read More
  15. [연재: 송철회고록] 제 5 장 비참한 조국방문

    Date 2020.06.12 / 단기: 4353.06.12 By종이비행기 Views45
    Read More
  16. [연재: 송철회고록] 7. 10년 학업의 총결산

    Date 2020.05.31 / 단기: 4353.05.31 By종이비행기 Views45
    Read More
  17. [연재: 송철회고록] 6. 민립 대학은 해서 뭐해?

    Date 2020.05.31 / 단기: 4353.05.31 By종이비행기 Views52
    Read More
  18. [연재: 송철회고록] 5. 고학도의 사업

    Date 2020.05.22 / 단기: 4353.05.22 By종이비행기 Views25
    Read More
  19. [연재: 송철회고록] 4. 가주 대학교 시절

    Date 2020.03.16 / 단기: 4353.03.16 By종이비행기 Views51
    Read More
  20. [연재: 송철회고록] 3. 나라 없는 슬픔

    Date 2020.03.15 / 단기: 4353.03.15 By종이비행기 Views52
    Read More
  21. [연재: 송철회고록] 2, 전기 공학도

    Date 2020.02.15 / 단기: 4353.02.15 By종이비행기 Views60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