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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민회


많은 사람들이 동지회와 국민끼를 미주 사회에 있어서 쌍벽적인 존재 로 알고 있다. 처음부터 국민회는 동지회에 맞선 단체로 생긴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선입감이다.


국민회가 조직된 배후에는 리 승만 박사의 영향이 컸었다. 1908년 3월 23일 상오 9시 30분 장 인환 의사가 상항에서 스티본스를 쏘아 죽인 변호를 위해 상항에 왔었던 리 승만 박사에 의해서 창단이 가능 하게 되었다. 리 박사는 상항의 교포사회에「대동보국회」와「공립협회」 가 둘로 나누어져 있어 교포 사회에 미덕이 되지 못 하는 것을 통감하고 하루종일 이 병억씨와 이 학현씨를 불러 놓고 두 단체합작의 묘안을 강구했었다.


여기서 리 박사는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상기 두 단체에 각각 한 사람씩 보내어서 중재 역필을하게 하였다. 이미 이글을 처옴부터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해서 이 두 단체가 생겼는가를 알 것이다. 안창호 선생이 본국에서 보내온 지진 구호금을 가로팬 이야기를 읽고 잘 알줄 안다.


이 두 단체가 순전히 안 창호 선생의 독선과 지방색 때문에 생겨 났던고로 그 감정을 대동 보국회 측에서 풀어야 했었다. 즉 리 박사는 대동 보국회측으로 하여금 넓은 용서의 도량을 촉구하여 하나의 동포 사회를 추구했던 것이다.


대동보국회측에서는 리 승만 박사의 간절하고도 애국적인 호소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단 미주 특히 하와이의 교포 사회가 안 창호 선생의공립협회와 합동한다는 조건 아래 수락했다. 주지(周知)의 사실과 같이 하와이 교포들은 전적으로 리 박사를 적극 호응했던고로 이 대동보국회의 요구 조건은 어렵지 않았다. 공립협회 또한 몇몇 소수의 홍사단 충성자를 매 놓고는 모두 대동보국회로 몰려갔으므로 그 고독함을 피하기 위해서도 선뜻 그 요구 조건을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청하여 앞장을 설 정도였다.


1908년 11월 30일 하와이 한인 합성시보에 나타난 합동 발기문 초록 에서 국민회 발족과 그 성격을 대강 살필 수 있다. 그 기사에 「우리의 국권이 쇠퇴한 원인을 살피어 보면 정부는 당파와 알력이 심하여 국가에 충성치 못하였고 백성은 전제 정 치에 눌리어서 규합되 지 못한 까닭이며 이것을 뉘우치는 오늘에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마 음을 합하고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조국의 운명이 위태한 이 때를 당하여 해외 동포가 사방에서 부르 짖는 것이 단체 합동과 역량 집중이며 미주와 하와이 단체들의 합동 추진이 우리의 급선무이다.


미주 한인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천마일 대양으로 떨어져 있으나 그 목적과 부담된 재임이 같으며 애국 애족의 순결한 정신과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헌신하는 성충이 같으니 정신상 합동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앞으로 남은 것은 다만 합동의 절차 뿐이다.


이제 시대의 요구와 공중 여론에 순응하여 한인 합성 협회와 한인 공립 협회를 합동하고 이름을 같이하며 서로 손을 이끌고 일을 같이 하기 위하여 좌기 7항목 합동조례를 기조한바 두 단체에서 이 조례를 통과하면 즉시 합동할 것을 의결하고 이를 발표하노라. 


         

 1. 미주 한인 공립협회와 하와이 한인 합성협회가 각기 자체를 해소하고 합동 후에 그 명칭을 국민회라 할 것.

2. 합동의 일자는 서력 1909년 2월 1일로 정할 것.

3.두 단체에서 규칙 기초 위원 3인식을 선출하여 합석 토의로 국민회 규칙을 제정할 것.

4. 규칙 기초 위원회의 회집 처소는 두 단체가 협의하여 지정할 것.

5. 국민회 규칙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준할 것.

6.새 규칙을 실시하기 전에는 종전에 쓰던 규칙을 사용할 것.

7. 합동된 단체의 임원이 취임될 때까지는 전임 당국이 회무를 진행할 것.


서력 1908년 11월 30일

하와이 한인 합성 협회 대표: 고 석주, 김 성권, 민 찬호,이 내수, 강 영소, 한 재명, 안 원규.

미주 한인 공립 협회 대표: 최 정익, 이 대위, 강 영대, 안 석준,황 사용, 이 경의」

라 하였다.


하와이 한인 합성협회 대표의 한 사람인 민 찬호는 하와이에서 목사 로 일했는데 자녀들은 하와이에서 사업하고 있으며 그 부인은 LA 동지희에서 많은 일을 했다.


또 한 사람의 대표인 김 성권은 국민회 회원으로 그 아들은 치과의사였다. 한편 공립협회 대표였던 안석준은 아들이 동지회 회원이였는데 양로원에서 죽었으며 공립협회의 황사용 대표는 한때 상항에서 목사로 있었다.


약속대로 대동보국회는 이상 두 단체가 결연하여 완전한 궤도에 오른 1910년 5월 10일에 엑시코의 동포 단체와 함께 국민회에 귀속 병합되었다. 그 이름은 국민호에서 대한인 국민회라 개칭 변경 하였다. 1912년 11월 18일에는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 중앙 총회 산하에 4개의 지방 총회가 있었는데, 즉 북미 지방총회,하와이 지방총회, 시베리아 지방총회,만주 지방총회가 있었다. 중앙 총회는 나성에서 목사를 하던 윤 병구, 박 상하,안 창호,박 용만, 강 영소, 김병종 등 제씨명으로 이렇게 성명 발표했다.



         

 1.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를 설립하여서 각지의 지방 총회를 관리하며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 규모를 중앙 총회 지도에 의하여 행사하기로 함.

2.중앙총회 헌장을 기초하여 규모일치를 도모함.

3.국민회 회표를 만들어 일반 회원에게 분급함.

4. 국민회 회기를 제정하되 각 지방 총회마다 그 모형을 달리하여 각기 지방을 대표하게 함.

5. 중앙 총회에 대한 지방 총회의 의무금은 매년 2백불로 정함.


이렇게 발기 걸의된 국민회는 한 . 일합방 후 해외의 범교포적인 통일 단체로 잠시나마 발전하였다. 창립 총회에서는 결의하기를 다음과 같이하였다.


1.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자치제도를 실시할 것.

2. 각지에 있는 해외 동포는 대한인 국민회의 지도를 받을 의무가 있 으며 대한인 국민회는 일반 동포에게 의무이행을 장려할 책임을 가질 것.

3,금후에는 대한인 국민회에 입회금이나 회비가 없을 것이고 해외 동포는 어느 곳에 있든지 그 지방 경제 형편에 의하여 지정되는 의무금을 대한인 국민회로 보낼 것.


서기 1912년 11월 20일

대한민국 국민회 중앙총회 대표일동



이와 같은 거족적인 민족의 유일무이한 통일단체로 거보를 앞으로 내딛자 국민회에서는 위대한 영도자가 필요했다. 중앙 총회의 산하 4개 지방 총회와 그 관할 지희와 116개처에 산재하고 있는 해외 동포들을 효과적으로 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굵직한 민족의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 되었다.


박 용만은 이 때에 명망 높은 리 승만 박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서신 으로 리 박사를 하와이 국민회 중앙 총회에 초청했다. 박 용만씨는 당 시 북미주 네부라스카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1912년 12월 6일에 하와이로 와서 머물고 있었다.


리 승만 박사는 이 무렵 즉 1912년 3월 26일 부친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일본경유, 미국으로 와서 1912년 4월 미니아 폴리스에서 개최하는 감리교대회에 참석하고 미주 각처를 다니면서 우리 독립을 미국인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박 용만씨 뿐만 아니라 전하와이 동포가 미국의 명문대학교의 박사이며, 황족이며, 언론인이며, 애국자이신 리 박사를 미국 신문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그와 함께 조국독립운 동을 하는 것을 일생 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박 용만씨가 동포들의 심정에 동의를 하니 그는 리 승만 박사로 인하여 많은 인기를 모았다.


리 승만 박사는 동포들의 열열한 숙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민족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직접하기 위해서 1913년 1월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동포들의 대환영 속에 리 박사의 민족광복을 위한 대사업은 시작되었다. 완전 독립이 그의 지상목적이었던고로 하와이동포 교회를 미 감리교 선교부에서 완전히 독립시켜「한인 기독교회」를 세웠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수학(修學)과 도미 과정에 있어 미 감리교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관계로 거기에는 인정(人情)이 라는 정실 관계가 개재되고 있었다. 그러나 리 박사는 독립을 위해서는 그와 같은 인지상정(人之常情)도 단호히 흑백을 구별하듯 가차없이 결단을 내려 우리 한인교회를 미 감리교 선교부에서 독립시켰다. 이 밖에도 선교부주관 아래 있던 학교도 전술의「한인 기독여자 학원」으로 1915년 3월에 독립시켰다. 그리고 전술의「태평양잡지」도 1913년 요월에 발간하는 둥 해외 동포를 통한 민족 독립운동에 불철주야 노력을 했었다.



그는 수만 리 태평양 고도인 하와이 섬들을 백의종군 하면서 동포들 이 있는 농장과 일터를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격려를 했다. 그러나 그가 다니면서 비참하게 발견하고 목격했던 것은 사진 결혼하여 이민 온 한국의 젊은 여인들이었다. 이 여인들은 사진 결혼하여 미국에 와서 그들의 남편 될 배우자를 만나 보았더니 아버지와 할아버지격이 되는 연령차와 이상에 맞지 않는 성격차로 남편들을 피해 하와이 각처에서 비참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리 박사는 이들을 자비로 스 잔나. 웨슬리 홈에 기숙시켜 마음과 생활의 안전을 도모해 주고 한인 여자학원에서 직접 그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교포들을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고 있을 때 대한인 국민회에서는 박 용만과 안 창호계의 흥사단이 분란와 부정에 싸여 정신을 잃고 있었다. 리 박사는 이들의 작당과 부패에 대해 너무 실망한 나머지 국민회의 제 일선에서 물러앉아 그들의 민족적 양심의 맹성을 기다리며 자기 일에 충실했다. 그러나 박 용만은 리 승만 박사를 멀리하고 거룩한 조국독립 의 사명을 띠고 활동하는 국민회를 흥사단 인사들과 더불어 아주 못 쓰도록 더럽히고 있었다. 참다 못해 리 박사는 박 용만씨에게 편지를 냈다.


                                  

 「나의 마음 속 깊이는 당신에 대한 우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나는 그 옛날 옥중에서 고락을 같이한 동지들 보다도 더 당신을 친한 벗으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음올 고백합니다. 당신이 아직 이 같은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을 원한다면 언젠가는 그것을 후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끝까지 싸워서 그들이 자업자득하는 국민회가 멸한다는 것을 확신하겠읍니다. 양자의 선택은 당신 마음대로 가장 현명한 길을 취하십시오. 그럼 이만 줄입니다.


변함없는 당신의 친구인 리 승만」


박 용만씨는 리 승만 박사의 간곡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 과 회신도 없었다. 리 박사는 할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1915년 태평양 잡지 제2권 5호,6호에 서 국민회 부정 을 폭로하였다. 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장 김 종학씨가 박 용만씨와 안 창호씨계와 합작을 하여 엄청난 부정을 했던 것을 기사화하였다. 이 기사로 하와이 동포들은 벌떼처럼 일어나서 따졌다. 그 결과 1915년 1월 15일 지방 총회의 문부조사에서 아래와 같이 그 부정사실이 들어나고 말았다.


수전의원 박 상하가 8백31불15전을,재무 홍 인표가 1천5백48불17전을 횡령하였다. 홍 인표는 그밖에도 허락없이 공금을 9백84불을 은행에 예금치 않고 임의로 갖고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출면도 모호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데가 많았다. 1914년도 전회원의 의무금은 1만불을 상회 했고 국민회 중앙 총회관 건축비가 하와이에서 2천1백55불을 합친 7천4 백4불이 모두 정당하게 사용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건축비로 지출된 4천40불의 내역은 도무지 그 사용방법이 비현실적이었다. 즉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리 박사는 태평양 잡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자기 소견을 천명(關明》하였다.


                         

하와이는 마외 각지에서 희망을 두는 곳이고 이곳 한인의 발전이 각지에 있는 한인의 희망인데 이곳에 일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말하지 않으면 그 책임이 나세게 있다고 할 것이므로 지금 사실을 말하고자 하노라.


내가 이곳에 온 지가 두 해가 되었고 그 동안에 본것을 설명하고자 한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참고 있는 이유가 있다.


첫째로 맡은 일이 중하여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둘째로는 만일에 공리를 밝히면 다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다치는 사람은 응당 말하기를 리 승만이 단체를 반대한다고 할 것이오. 그 걸과는 당파싸움인데 나는 당파싸움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은 까닭 에 조용히 이곳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곳에 있기를 다시 작정할 때에 국민회 당국과 의론하기를 출판 사업은 국민회가 간섭하지 말고 나의 사업으로 할 것과 모든 년조금을 내가 직접으로 받기를 언약하고 교육특연을 청연하는 때에 국민회 당국이 회관건축 의사를 제출하여 건축특연을 거두며 교육특연을 방해하였으니 이것이 교육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대저 국민회관 건축이 우리에게 학식을 주겠는가? 재정을 주겠는가? 일반동포가 이해 득실을 판단하여야 할 것이며 이제 잡지 사업과 학생 기숙사 일이 잘못되거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국민회에 돈을 주어서 시루에 물붓 둣이 없애는 것보다 나세게 주어서 사업하는 것이 한인 전체의 유익이 될 것이다.


국민회 당국이 지나간 양년에 수입된 의무금을 무엇에 썼는가? 사탕밭에서 땀흘려 모은 돈을 받아서 무엇을 하였는가?  그것을 나에게 주었다면 학생기숙사 건축이 완성되었을 것이고,국민회는 잘 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으나 학생 기숙사는 한 번 세우면 영원히 우리의 자녀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국민회 당국이 대의회 입안을 준행하지 않고 몇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데 지나간 2년 동안의 재정 출납을 보면 쓰라는 것은 쓰지 않았고 쓰지 말라는 것을 쓴 것이 많았고,문부가 분명치 못하석 대의회에 문제가 일어나면「묵허니」「용서니」하는 언사로 흐지부지하여 타협하니 일을 이렇게 할진데 각 지방에서 대의원을 파송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국민회 임원들이 이같이 공의를 무시하는데 이러한 행동이 국민회를 망하게 하는 것이요,이러한 사람들을 그대로 두면 국민회가 위태하게 될 것이다.


각 지방 회원들의 회망을 살펴보면 국민회 일만 하라는 것이 아니고 누가 무엇을 하든지 한인전체에 유익될 것을 원하는데 다만 호항에 있는 몇 사람으로 인하여 충돌이 생기는 것이며 그들이 교육기관을 방해하여 기숙사가 준공되지 못한 것이다. 사세가 이러하므로 내가 공을 위하여 사분을 불게하고 국민회 당국자에게 불합한 언론을 발표하는 동시에 일반 동포에게 몇 가지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1. 국민회 회원다수의 공의를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인즉 무슨 관계로든지 우리의 일을 반대하는 개인은 국민회를 반대히는 것으로 인정할 것. 

2. 금년에 일이 중대하여 나의 주견을 버리고 동포들이 세워 주는 공동규모를 준행하고자 하는데 호항에 대의회를 열게할 필요가 없으니 방법을 달리하여 이곳저곳의 지방마다 모여서 문제를 공결하여 나세게 보내면 그것을 받아 가지고 다수의사를 따라 일을 결정할것.

3. 지나간 2년 동안에 국민회가 의무금을 받아서 교육 사업에 쓰지 않고 소모하였으니 금년에는 무슨 재정이나 전부를 교육 사업 책 임자에게 보내어 교육 사업을 성취할 것.

4. 나의 의견을 실행하면 국민회 사무와 국민보 발행을 계속할 수 없 겠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말이라 금년의 의무금과 모든 공금을 교육사업에 쓰라고 나에게 보내더라도 국민 회의 필요한 경비와 임원들의 월급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국민회의 기초를 공고하게 하는 것이니 염려할 것이 아니라」 



이 선언문을 읽은 모든 동포들은 분개하여 총회장 김 종학에게 달려 가서 헌장 제21조에 의거, 특별 대의회소집을 요구하였다. 31개 지방 대표들이 1915년 5월 1일 대 의회를 열어 김 종학을 총회장직에서 파면하고 정 인수를 대신 계승시켰다. 김종학은 동년 5월 14일자로 구속되고 말았다.


김 종학은 3개월 후 잠적해 버리고 없는 재무 홍 인표에게 모든 횡령죄를 다 덮어 쐬우고 석방되어 나왔다.  그러나 동포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김 종학에게 총회장으로서 횡령된 공금을 책임지라고 강력히 요구하자 그는 권총자살 미수극을 꾸였다. 우선 그는 이렇게 유언장을 하나썼다.


                      

 「지나간 국민회 특별 대 의회에서 리 승만의 교사를 받고 풍파를 일으키던 대 의원들이 나를 모해하여 공금을 횡 령하였다고 법정에 무고하여 체포하게 하였다.


나의 억울한 심사는 즉시 생명을 버리고자 하였으나 만일 사실이 판명되기 전에 죽으면 공연한 누명을 쓸 것이므로 법정 판결을 기다린 것이다.


이제 법정에서 무죄 판결하였으니 이로써 나의 누명이 깨끗하여 졌고 리 승만의 불의의 행사가 증명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법강을 파괴하고 동족상쟁을 조장하여 단체를 결단내고 있는 리 승만의 불의의 행사를 용서할 수 없는데 공리를 밝히려면 리 승만의 악독한 음해는 받을 수 있으나 일을 바로 잡을 수 없으니 예배 당의 전도사들까지 리 승만의 행동을 찬양하여 인심을 현혹시키는 까닭이다. 

내가 일찌기 나라를 망치던 역적들을 보았고 또다시 우리 사회를 망치는 리 승만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므로 분함을 참지 못하여 세상을 잊어버린다.


1915년 9월 15일

김 종학



이렇게 유서를 써 놓고 김 종학은 뺨을 약간 스치도록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니 죽을리가 없었다. 

죽을려면 머리에다 권총을 정통으로 겨누어 왔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인데 그는 죽기가 싫어서 그리고 리 승만 박사를 모함하는 수단으로 삼았기에 죽지를 않았다.


국민회는 리 승만 박사를 존경하는 사람과 그의 독립운동 정책을 지 지하는 사람들을 중심해서 대한인 동지회가 설립할 때 까지 운영되었다. 국민회는 상해 임시정부가 서고 동지회의 전술한 필요성에 따라서 처음 국민회의 목적이 상실되어 가고 있어 1919년 이후부터는 그 기능 을 제대로 살리지를 못했다. 그래서 일시 폐지까지 되었던 것이다.


리 승만 박사를 반대하던 박 용만씨와 안 창호씨도 1918년 2월 11일 한바탕 자기들의 앞잡이를 내세워 국민회 사무실을 습격하여 유혈이 낭자(浪籍)하도록 분란을 지어 보았으나 도무지 동포의 인심이나 국민회를 다시 장악할 수 없음을 알고 하와이를 떠나 중국으로 가버렸다. 그 들은 중국에서 리 승만 박사와 대결하여 하와이에서의 패전을 만회하려고 했었다.


그런고로 국민회는 리 승만 박사의 지지자들이 국민회 대신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동지회 둥에 역점을 두고, 국민회를 폐지했을 아무도 그것을 이어나갈 사람이 없었다. 그러하였던 국민회가 오늘날 존속하고 있는 그 배경은 이러하다.


소위 중립을 옹호한다는 몇맺 동포들이 하나의 단체를 만들기를 원하였다. 즉 동지회에도, 흥사단에도, 임시정부에도 관계치 않는 온건한 동포들이 1936년 5월 17일 미국 남가주, 북가주, 중가주의 사람들이 모여 옛날에 이었던 국민회의 명을 따서 만든것이다. 그러나 이 모임은 중가주 지방에서 농장을 경하고 있었던 김호씨가 자기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과 흥사단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서 온건한 중립을 지티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시작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은 것을 알고 동지회로 몰려왔던 이 살음,이 순기씨 둥올 내포시키고 있었다. 동지회로 몰려왔던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당시 동지회 회원은 2백 명에 불과했으나 [이 순기 사건」이후 국민회 소속의 사람들이 탈퇴하여,동지회로 몰려들어 회원이 300명이 넘었다.


내가 상황에 도착한 것은 1917년 7월 24일인데 하와이에느 그보다 1주일전인 7월17일경이었다. 이때 나는 호널룰루에 상륙하여 리 승만박사를 찾았는데 리 박사는 호미로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리 박사는 점심 시간이라 밥과 배추로 점심을 대접해 주어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점심을 먹으면서 보니까 리 박사의 손엔 잉크가 묻어 있었는데 당시 태평양 잡지를 만들때라 아마 원고를 썼거나 인쇄 때문 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내가 리 박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안 영열씨가 미리 연락과 소개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해동 여관에서 주인한테 리 승만 박사의 거처를 물어 택시를 불러 리 박사가 계신 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여하간 이 국민회는 장 인환 의사가 스티본스를 쏘아 죽인 후에 리 승만 박사가 그를 변호차 상항에 들린 연고로 발화(發火)가 되어 결성되었다가 그 필요성이 없게 되자 폐지되었던 것을 김 호씨 일파와 홍사단 계열 사람들로 다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나는 여기서 장 인환(張 仁換》의사에 관계되는 사건 내용과 리 승만 박사의 변호 내용을 그 당 시 들은 것으로 기억나는 대로 써서 후세에 바른 역사의 줄거리를 전하고자 한다.


장 인환 의사는 이 곳 나성에서도 그리고 상항에서도 종종 만나는 기 회가 있어서 잘 알고 있다. 더우기 나와는 깊은 지면이 있던 문 양목씨 가 자기 손가락을 깊숙히 물어뜯어 혈서로써 리 승만 박사를 초래(招來),변호운동올 하도록 했던 고로 장 인환 의사의 사건 내용은 잘 알게 되었다.


앞에서 기술한 대동 보국회의 총회장 문 양목씨는 창립회원(創立會 1)인 장 인환 의사가 친일파 스티본스를 암살하여 살인죄로 기소되었을 때 구명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을 서야 했었다. 문 양목씨는 회지 대 동공보를 통해 1905년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매앗긴 후부터 맹렬히 일본을 통박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 때에 친일파 스티본스는 일본 천황으로부터 특별휴가를 얻어서 미국 상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1908년 3월 21일자「센프라시스코.크로니클」이라는 신문지상을 통해 일본의 한국 보호는 한국을 위해서 종은 일이라 극구 친동올 하였다. 미국이 필리핀을 보호하는 것 이상 더 좋은 것이 일본의 한국 보호라 떠들었다. 이를 반대하는 한국인이란 극소수의 불평 분자들이고 대부분 농어촌의 평민들을 일본의 보호를 대환영하고 있다고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주작했다.


이 얼토당토않는 거짓 기사에 문 양목 총회장은 즉시 대동 보국회 회원을 긴급 소집하였다. 그리고 공립협회의 최 정익,정 재관씨 둥에게도 연락을 취하여 대책을 의논하였다. 신문기사가 난 다음날인 3월 22일 하오 8시에 문 양목씨는 이 학현,정 재관,최 정익씨 둥과 함께 스티본스가 묵고 있는 페아몬트 호델로 찾아갔다.


여기서 이 일행들은 스티본스의 한국인 모욕기사를 정정할 것을 단호 히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신문기사야말로 한국민은 물론 극동 평화 및 세계 평화를 위해서 아주 훌륭한 기사라 했다. 그 이유는 한국의 황 제가 우매하고 신하들은 그 정절을 잃어버려 타락되고 부폐되었으니 일 본의 한국 보호야말로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다고 서슴지 않고 이야기했다. 어느 대한 민족이 이 이야기를 듣고 울분의 끓는 피로 가만히 손에 잡히는 대로 그를 죽으라고 때렸다.


갑작스런 비명 소리에 호델의 종업원들이 뛰어왔다. 당장 요절을 내 려고 하였으나 분하게도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를 죽이지 못한 우리 애국 동포들은 그 자리를 물러나와서 그를 죽이기 위한 숙의를 하였다. 이 자리에는 장 인환 의사도 끼여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는 전명운(田明雲)에게 스티본스의 얼굴을 누구인지 일러주기만 하면 자기가 쏘아 죽이겠다고 하였다.


혼비백산이 난 스티본스는 그 다음날 아침 일본 영사 고이께(소지)의 비호아래 워싱턴으로 떠나기 위해서 패리역으로 떠나고 있었다. 이 스티본스의 거동을 밤새 살피며 기다리고 있던 장 인환 의사와 전 명운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주도면밀한 가운데 장 인환 으1사는 전 명운 이 가리키는 스티본스에게 권총 세 발을 발사하였다. 두 발은 가슴에 한 발은 빗나가 지목해 주던 전 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총성에 놀란 일본 영사 고이께는 혼이 나서 어디론지 급히 줄행랑을 치고 장 인환 의사는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스티본스와 전 운은 같은 병원으로 급송되었다. 스티본스는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경에 장 인환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지 2일 후인 동년 3월 25일 죽고말았다.



미국법정은 동년 3월 27일부터 장 인환 의사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어 그 이듬해 1909년 1월 2일에 25년형의 징역선고를 내렸다.

미국 법에 살인자는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폐레(判例)였다. 그러나 리 승만 박사(그 당시는 학생이었음)를 중심한 동포들의 열렬한 성원과 노력에 의해 25년형의 징역선고를 받았다.

리 승만 박사는 대동 보국회 총회장 문 양목씨의 혈서로 보낸 편지를 읽고서 하바드 대학의 공부를 잠깐 중단하고 상항으로 속히 래도(來倒)했다. 먼저 리 박사는 유명한 변호사들을 물색했다. 그랬더니 카컬린, 파될,에렐 등이 우리 민족의 비운을 동정하고 그리고 장 인환 의사의 애국충정에 동정하여 무료 변호를 자청하고 나왔다.

이에 반해서 일본 대사관과 영사관측에서는 스티본스의 유가족을 충동시켜 미국 법정과 미국 시민을 움직여 어떻게 하든지 장 인환 의사를 사형시키려고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일본의 체통(體統)과 한국인의 대외 독립운동을 완전히 사멸시키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였다.

리 승만 박사는 일본의 악랄한 행동에 대해 자기의 모든 지혜와 지식,그리고 노력을 다 바쳐 승소(勝訴)를 위해 뛰었다. 장 인환 의사가 재판석상에서 답변을 요령있게 하도록 했고 또한 그 답변을 조리있게 자기의 통역으로 열변을 하였다.

                  

「한국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 스티본스를 한국의 외교 고문으로 초빙한 것인데 그는 한국의 국록을 먹으면서도 그 직위를 이용하여 한국의 원수 일본에 협조하여 한국을 모함하니 그 증거는 “새프란시스코.크로니클”지의 기사를 보아서 알 것이다. 이와 같은 배신자를 용납하면 갈수록 우리 나라를 모해하여 망하게 할 것이므로 마음에 분기가 발하여 내 몸을 회생하여서라도 국적을 없애 배신자를 징계하려고 결심, 스티본스의 행동을 살피다가 정거장에서 만나 발사하였다」 


이상의 법정 진술을 그 누가 듣고 읽더라도 한 인간의 개인적인 살인혐의가 아니라 압박받고 있는 한 민족의 대표로서 스티본스를 총살시켰다는 진술이었다. 한 약소민족의 제국주의 침라국에 대항하는 민족의 존속권을 제창한 국제정치 문제로 부각시킨 명진술이었다.

리 승만 박사는 무료 변호를 자청한 변호사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현재 한국의 참상을 설명하고 이것을 세계인의 공명정대한 양심과 여론에 호소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잔학한 침라 근성에 한국이 얼마나 세계 역사의 수난사 중 미증유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변호 중에 삽입시키도록 하였다. 그 걸과 베렐 변호사는

                  

 「오늘 이 재판은 권세를 가진 일본과 망명객 장 인환간에 유죄 무죄를 판결하는 재안이며 고금 역사에 이러한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제 사람다마 자기 몸을 진실되게 하며 하나님과 율법과 모든 옳은 일에 진실되어야 할 것이고 이 재판도 진실되어야 할 것인데 더우기 이 사건은 국제상 관계로 일어난 것이니 우리는 공정한 중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무엇이 죄냐하면 남의 집을 폭탄으로 깨뜨리고 다수 인명을 살해하거나 남의 집에 들어가서다 주인을 죽이고 재물을 탈취하면 제1 급의 살인자가 될 것이고 그보 경하면 2급 혹은 3급의 죄가 될 것이므로 이 재판에 먼저 분별할 것이 죄의 등급이며 죄의 원인을 생각함에는 오늘의 한국의 정황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원고측 변호사가 말하기를 장 인환이 한국에서 이 런 일을 하였으면 곧 사형되었을 것이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합의 되는 점이 많다.

지금 한국의 정권을 일본이 마음대로 가지고 임의로 주물러서 한국의 애국자는 일본의 형벌을 받으니 장 인환도 한국에 있었다면 정의와 인도를 불구하고 사형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장 인환이 미국에 있어서 공정한 재관을 받게 된 것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한국에 미국 사람이 많이 있고 그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데 오직 스티본스가 한인에게 총살을 당하였으니 스티본스의 죄가 있는 것을 알수 있으며 배심관들이 자기의 몸을 장 인환의 처지에 두고 생각하면 판단이 공정할 것이다」

라 하였다.

카컬린 변호사는 리 승만 박사의 한국 역사.특히 현대사를 중심해서 이야기한 것을 소재로 이같이 변호를 하였다.

                    

 「내가 이 재판의 변호를 시작할 때에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적 기록을 많이 보았는데 이를 대강 말하여서 법정에 참고로 제공하려고한다. 한국은 4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이고 그 민족이 단일한 민족이며 애국심이 특이한 민족들인데 일본이 군력으로 그 나라를 강탈한 후에 그 민족이 견디기 어려운 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883년에 미국이 한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양국간에 어느 나라가 침라을 당하면 서로 보호한다고 하였으나 미국이 한국을 참라자의 손에서 구해내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고려할 것의 하나이다.

1895년 중,일 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중국과 조약하기를 한국의 독 립을 보장하며 다시 군대를 보내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10년이 불과하여 다시 한국에 군대를 보내 불의의 행사를 하니 한인된자 누가 분하지 아니할까 생각하여 볼 것이다.

장 인환이 미국에 온 지 3년에 불과하고 한국에서는 일본병이 사람을 짐승같이 죽이는 것을 보고와 아직까지 그 기억이 남아 있으며 나 라가 망한 것을 생각하고 통분한 마음이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아야 공정한 판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905년 노. 일 전쟁 담판시에도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담보한다 하고 돌아가서 보호조약을 성립시켰으며 1907년에 한국을 무력으로 위험하여 7조약을 체결한 후 한국 황제를 폐위하고 군대를 해산하며 점하로 국토를 먹어 들어가는 소식이 신문마다 기재된 것을 장 인환이 알고 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할 것인가 생각해야 공정한 재판올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를 장 인환의 처지에 두면 우리는 미칠 것이다. 우리의 부형과 친척이 일인의 손에 죽어가며 우리의 강산이 일본 군대의 말 먹이는 목장이 되며 세전하여 내려오는 건물들을 일본 통감이 차지하 고 옴모의 소굴을 만들면 우리 중에 미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장 인환도 사람의 마을을 가진 줄 알아야 공정한 판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재원을 일본인이 채굴하고 양전옥토를 일인이 경작하며 한 국 사람을 굶어죽게 하는데 분한 음이 없으면 한국 사람이 아니오, 혈기있는 사람으로 그러한 일을 당하고 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이 일본을 협조하는 것을 보고 심상히 여길 수 없는 것을 생각하여야 공정한 판단이 있을 것이다.

배심관 여러분! 이 재판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만일에 우리가 장 인환을 죽이면 그 사람은 공리를 주장한 애국자이 기 때문에 죽는 것이니 그것이 옳은 일인가 애국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의로운 일인가 생각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카컬린 변호사의 변호를 읽고 독자들은 충분히 이 변혼의 내용에 담긴 한국의 역사와 형편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점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 변호사는 한국인도 아닌 미국 법조인으로서 한국사와 실정 을 잘 파악하고 그렇게 변호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리 승만 박사의 숨은 노력이 있은 까닭에 가능했었다. 이때만 해도 전 혀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거의 없었던 때라 리 승만 박사의 역할은 아주 컸었다.

이렇게 리 승만 박사는 한여름을 고스란히 장 인환 의사 구명 운동을 하면서 또 한편에는 전술한 한인 동포들의 통일 단체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 쏟았다. 아직도 재판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리 승만 박사는 다음 9월 학기 공부를 위해서 상항에서 하바드 대학으로 향해 떠나야 했었다. 그러기 위해서 리 박사는 자기가 상항에 없어도 조금도 장 인환의사 재편에 나쁜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모든 준비를 해 두었다. 
오직 자기 대신 누가 통역만 하면 되도록 주선을 해둔 것이다. 그 통역은 나성 남가주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신 흫우씨에게 부탁을 했다. 신 홍우씨는 일찌기 구한말에 리 승만 박사와 옥중 동지로 안면이 있었던 고로 아주 친숙한 사이였다.

리 승만 박사는 처음 미국 방문 때인 즉,년 11월 4일 고종 황제와 민 영환 의사의 극비 문서를 갖고 한국을 떠나 하워드. 리(이 청혁)와 더불어 나성에 동년 12월 17일에 들렀을 때 신흥우씨를 만난 일이 있다. 이때 신 홍우씨는 두 사람올 반갑게 마중하여 나성 매그놀리아가에 위치한 한국인 감리교회로 안내하여 친절히 그들을 보살펴 주었다. 리 승만 박사가 동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철도편으로 워싱턴을 형해 떠날 때까지 모든 편리를 제공해 준 신 홍우씨라 리 박사는 안심하고 그 통역을 대신 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는 사이였다. 나성과 상항 사이는 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 홍우씨의 공부에 지장은 있을지언정 통역은 맡을 수가 있었다.

신 홍우씨는 쾌히 리 승만 박사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간 리 박사의 무료 변호사 물색과 전교포들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하도록 해준 노고에 대해서 다 같은 동포의 한사람으로써 무한한 감사까지 드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리 승만 박사를 터무니 없이 모함하는 자들은 리 박사가 이 때에 기독교인의 양심상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하여 그냥 동부로 가 버렸다고 했다. 만약 그랬다면 외국인 변호사는 물론 특히 헐서까지 써서 리 승만 박사를 부른 문 양목씨와 같은 이가 평생을 통 해서 친우관계를 지속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대동보국회 총회장 문 양 목씨는 후에 리 승만 박사의 외교활동을 돕기 위해 열렬한 동지회원까지 된 사람이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때 리 승만 박사를 무조건 모함 하는 이들의 거짓이 같은 민족으로써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이미 장 인환 의사 사건으로 전미주의 동포가 하나로 뭉쳐지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만큼 재미 동포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장 인환의사의 행동올 애국적인 처사로 믿고 있었는데 만약 리 승만 박사가 기독교인의 양심상 변호를 기피했다면 그 때 우리 동포들의 손에 맞아 죽었 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재미 동포들은 리 승만 박사가 하자는 대로,그리고 가리키는 방향대로 따라갔고 움직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함은 리 승만 박사가 위대한 민족적 거사를 완성할 때마다 반 대자들의 거짓 조작이 따랐다. 하기야 예수의 부활도 조작이라는 그 당시의 유태인 특수충의 거짓 증언이 있었으니 하물며 인간 리 승만 박사 에게야 그러한 거짓 조작이 없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재판결과 장인환의사는 제 2급살인죄에 해당하는 25년형의 금고선고형을 받았다. 옥중생활 중 다른 죄수에게 본이 되는 모범수가 되어 15년 형을 감면받고 감옥생활 10년 만인 1919년 1월 7일 출옥의 특사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

출옥한 장 인환 의사는 재미 동포들의 환대와 격려에서 돈을 조금 마 련하여 자기 고향인 한국 선천으로 1927년 귀국했다. 이 곳에서 장 의사는 가정을 이루고 불쌍한 고아들을 모아 사회 봉사 사업에 투신했다. 그러나 왜놈들의 심한 감시와 학대에 견디지 못해 요행히 다시 미국으로 건너왔다. 와서는 세탁업을 경영하다가 너무 통분했던 마음을 달릴 길이 없어 지중한 병을 얻고 말았다. 안식교 병원으로 옮겨져 우리 동 포들의 극진한 간호와 염려에도 불구하고 병은 차도가 없었다. 조급한 장 의사는 더 이상 동포들에게 괴로운 피해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향년 55세의 나이로 1930년 5월 22일 자살하고 말았다.

동포들은 그의 죽음올 충심으로 애도한 나머지 동년 호월 26일 하오 2시 30분 상항 사이푸레스 묘지에 정중히 교포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언젠가는 장 인환 선생의 무덤을 영원히 민족이 함께 기념할 수 있는 그러한 때와 행동이 취해지기를 원하는 중 7~8년 전엔가 상항 한인회장을 지낸 이 민휘씨가 중심이 되어 장 인환 의사의 유해를 본국 정부의 국립묘지에 안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뻤다.

한 개인의 위대한 업적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장 인환 의사 주위의 모든 인물들의 애국심과 그 거룩한 행동들을 함께 상세히 남기어 후세 인들에게 애국은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하는 것이라는 것을 유시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후술에서 나의 견해를 밝혀 보겠다. 결코 한 인간의 애국을 기록함에 있어서 그 애국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것이 불가피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의 모든 동포들의 애국을 완전무시하여 모든 영광을 송두리째 가로채서는 안될 줄 안다. 애국은 민족 수난 때에는 결코 한 사람만이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인의 민족의식에서 모두 갖는 공통적인 민족 본능이기에 어느 민족인도 가질 수 있는 공유물이다.

그래서 우리 동지회원은 애국을 같이 하는 동지들끼리 하나가 되어서 민족의 본능적 자기 존립을 위해 뻗는 배달 민족의 민족 의식 속에서 민족의 자기 본분을 위해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마음올 다해 사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즉 누가 내 애국은 너보다 뛰어나니 내 이름은 백두산 상봉에 길이길이 기념해야 하는 돌비석,동비석,철비석을 세운다고 말하지를 못한다. 그와 같은 후세에 자기 이름올 영원히 빛내 고 영광을 갖기 위해 애국을 한 것은 아니다. 자식을 위해 사는 부모가 그 지식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거두기 위해서 검은 머리 백발이 되도록 고생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애국은 호리(毫釐)라도 욕기(慾氣)같은 것이 없었다.

장 인환의사의 유해를 본국 봉안과 함께 생각나는 것은 미국에서 돌아가신 윤 병구 목사의 유해를 리 승만 박사가 한국으로 옮겼는데 지금이 무덤이 길가에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윤 목사의 아들 폴 . 윤은 죽고 따님인 에스터 가 부친의 묘지를 국립묘지로 옮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 윤 병구 목사는 하와이에서 오랫동안 목회 활동올 해오신 분으로 리 박사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45_미국방문.jpg

윤 목사의 무덤은 한국일보사 사주인 고 백상 장기영씨가 무덤의 소재를 알아 낸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민족관에서 발하는 때묻지 않은 애국운동을 하기 위해서 동지회를 창립하였고 국민회를 폐회시켰다. 불순한 분자들이 끼어있는 곳에 민족은 분열되고,그 상처는 커지기 때문에, 따라서 독립운동에 진전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우리 동지 회원들은 국민회를 떠났다. 그 떠난 빈 집에 민족 독립운동을 표방하고 자기 명예와 영광을 바라는 슬픈 소수의 민족인이 다시 국민회를 시작했던 것이 오늘의 국민회다. 내가 오늘의 국민회라 한 것은 지금의 국민회가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존속한 국민회가 그러한 지난 과거를 갖고 있는 국민회였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이제 그 국민회가 어떻게 우리 조국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다음 절에서 개술(槪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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