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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족연합회의 비극


김 호 일파가 국민회를 다시 시작하기 전에 역대 북미 대한인 국민회 총회장을 보면,


정 재관씨가 초대 총회장으로서 1909년에 선출되었고,

문 향목씨가 1911년

강 명화씨가 1912년

강 영소씨가 1918년

최 진하씨가 1921년, 1923년, 1924년에 3선 되었고 그는 나의 신흥중학교 시절 나의 은사이자 동료교사이기도 하며 그의 성품은 온화하여 항상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파였다. 최 진하씨 후에는 전술한대로 그 기능이 한동안 마비되었다가 박 용만계의 백 일규씨가 총회장 행세를 하였다.


백 일균씨는 1926녀에서 1933년까지 활동없는 총회장직만 갖고 있었다. 백씨는 1879년 3월 11일 평남 증산군 태생으로 1905년 하와이를 거쳐 미 본토에 건너온 사람이다. 1907녀 3월에 발족했던 대동보국회의 회원으로 문 양목씨와 같이 일을 하기도 했다. 1907년 7월 네브라스카주에서 바용만의 한인 소년병 학교를 돕던 중 박 용만과 말접한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박 용만과 함께 리 승만 박사를 극구 찬양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후에 박 용만이 이승만 박사의 평화적 외교활동과 독립운동에 맞서서 테러적 폭력 행동을 주장하니 그에게 동조하여 리 승만 박사를 공격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졌다.


그 후 박용만이 1928년 북경에서 암살되자 흥사단걔로 편승하여 국민회 회지인 신함민보를 통해 이 승만 박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것이 너무 지나치니 흥사단원이 아닌 김호, 한 시대,김 형순, 김 원용 등 제씨는 반발을 하여 임시회원이 되었으나 이것을 이유로 해서 뛰쳐 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백 일규는 1935년 중도파인 전(전) 총회장 최진하씨네게 그 직을 넘겨 주었다. 도무지 재정적으로 더 이상 버티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야무야하여 국민회를 존속시키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호응을 하지 않아 계속 할수가 없었다.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김호 일파는 새로운 회를 만들려다가 이미 그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고 사람들이 없는 국민회를 언더 1936년 5월 17일 다시 발기대회를 열었다.


그 이듬해 1937년 1월 김호 자신이 총회장이 되고 말았다. 이후부터 1950년도까지 김호 일파의 송 헌주, 한 시대, 이 옥형, 김 용성, 김 형순 등의 제씨가 북미 지역 국민회를 끌고 나갔다. 1950년 이후부터는 김 호 일파가 흥사단에 의해서 밀려 나가고 오늘날까지 국민회는 흥사단의 부속 단체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김 호씨는 1889년 5월 25일 서울 출생으로 1914년 7월 25일 미주에 이주했다. 1920년 5월까지 정처없이 여러 잡노동에 종사하다가 중가주 리들리에서 김 형순씨와 함께[김형제 상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사업은 성공하여 5백 에이커의 농장, 40만불 상당의 팩킹시설,10만불 상당의 묘목장 시설이 있어서 연 1백만 불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데까지 번창했다.


그로 인하여 많은 한인들이 그의 사업에 관계를 갖게되어「김 호일파」라는 소위 자기 세력을 구축할 수가 있었다. 김 원용씨 같은 사람도 김 호씨의 식객으로써 평생을 그를 도와 일하다가 그의 도움으로「재미 50년사」를 리 승만 박사의 혹평 목적으로 편찬하였던 것이다.


김 호씨는 뒤에 기술하겠지만 해방될때까지 글로써는 형용할 수 없는 자기도취에 빠져 수없는 민족 독립운동에 역행을 저지르다가 해방 후 때마침 리 승만 박사가 하지 중장과의 압력으로 관계가 불편할 때 하지 중장에 힘입어 관선 제헌 국회의원이 되었다. 하지와 힘을 합해 리 승만 박사를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해 1945년 10월 자칭「재미 한족]의 국내 파견 대표단원이 라하여 한국으로 건너 갔다. 그는 하지 중장의 특별선심으로 일본인의 재산을 처분하는 중요한 적산분과 위원장직을 국회에서 차지했다.


하지가 미국으로 소환되고 리 승만 박사 중심으로 남한 정부단독 수립이 굳혀지자 미국으로 다시 건너오고 말았다. 건너와서는 남한 정부 불신임 운동을 전개시켰다. 나와 그 사이는 서로 사업차 자주 만나야 했던 고로 그가 내 앞에서 남북 분열을 리 승만 박사가 조장해서 만들어 졌고,분열된 남북 그 어느 하나도 자기는 인정할 수 없는 정부 라고 했다. 


그 말을 받은 나는


                                                                       

 「하지 장군 밑에서 국회의원으로 녹을 먹고 있을 때는 반쪽 한국이 아니어서 국회 감투까지 썼소? 하지 밑에서 한 자리 할 때는 언제이 고 지금 이 말을 할 때는 무슨 낯으로 이야기하는 거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다가는 김 호씨 자신만 망신을 당하니 조용히 하십시오. 그런 말을 하려면 처음부터 하지 장군 휘하에서 아무 직위도 갖지 않았어야 그런 말을 할수 있읍니다.


조국이 두 쪽이 난 것은 리 승만 박사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얄타 회담에 의해 미.소 양대 진영의 정치적 흥정에 의해서 된 것이라는 것을 양식있는 사람은 다 아는데 어쩌자고 그렇게 거짓말만 합니까? 그러지 말고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이상 미국 정부가 중심이 되어 자유 민주 진영이 적극 지원하는 남한 정부를 같이 밀어서 통일을 앞당기도록 합시다. 우리는 정부도 있으니 없는 것 보다는 얼마나 좋은거요 지난 과거 왜놈들의 학정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하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미주 동포들이 분열되지 말고 남한 정부를 지지하여 통일을 가져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데 서슴지 맙시다. 이것만이 해방된 조국에 독립과 통일을 위하는 첩경입니다. 남북한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지 않 고 모두 부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가름길이 있을 뿐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양극화하여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물며 대한 민족이야 중립올 지킬 수가 없읍니다. 이 둘을 부정한다는 것은 무국적자의 처사입니다. 그것은 그 이상의 불행이 없읍니다. 분명히 그것은 후회할 날을 만들 것이니 마음을 고쳐먹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지하시기 바랍니다. 반쪽 군정치하에서 벼슬을 해 먹었으니 반쪽 한국이라고 부정은 못할 줄로 믿읍니다. 차후로는 여러 소리를 더 이상하지 마시고 남한 정부만이 유엔에서 합법적으로 인정됐다는 것과 그정부가 우리 민족의 참다운 나라임을 솔직히 인정하셔서 민족의 치부를 드러 내지 마시 기를 충심으로 바라 마지 않습니다」


라고 직언을 하였다.


그러나 김 호씨는 조금도 개전의 빛을 보이지 않고 남한 정부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리 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그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가 아니라고도 했다. 우리의 해군이나 우리 정부 인사들이 도미해도 한 번도 환영이나 기념식에 참석을 안했다. 오히려 비난과 방해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에게 더 이상 표면적으로는 내 쓰린 심정을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언제고 그가 참으로 회개할 날을 간곡히 기다리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그러한 기회가 찾아 들었다.


6.25 사변이 끝나고 전화의 참상이 내 조국을 휩쓸고 있을 무렵이었다. 김 호씨는 자기 부인을 해방 후 하지 장군의 호의로 미국으로 데리고 왔는데 사랑하는 딸 김한숙은 한국에 두고 왔었다. 딸은 안 모씨라는 영특한 청년과 결혼, 슬하에 아들과 딸 자식들까지 두었으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인민군에 의해 납피되어 혼자서 살고 있었다. 김 호씨 내외는 그 딸을 잊을 수가 없어 미국으로 불러 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리 승만 박사가 한국의 대통령으로 옛날 리박사의 비서였던 임병직씨가 외무부 잔관으로 있는 이상 딸을 데려올수가 없었다. 너무 자기의 저지른 일이 컸기 때문에, 그리고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딸을 감히 미국으로 보내 달라고 청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두 부부가 남 몰래 걱정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이 때 대한인 동지회 북미 총회의 총회장으로 있었다. 김호씨는 자기의 부모. 자식간의 그 눈물겨운 애소를 나에게 털어 놓았다. 그의 요구 사항은 동지회 총회장 자격 으로 자기 딸을 미국으로 불러 들이는데 추천서를 하나 나에 게 써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허락을 했다. 그의 사과나 변명도,어떠한 요구 조건이나 다짐도 없이 무조건 들어주기로 했다. 나의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해 그는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동지회원이나 리승만 박사의 측근 사람들이 안다면 나에대한 공격이 어느 정도인가를 그가 알기 때문이다.


사실 이 추천서의 서명으로 인해 우리 동지회원 중 허 성,유 개성씨 둥이 주동이 되어 나를 동지회의 배신자로 낙인 찍었다. 또한 일부 동지희원들은 연서로 한국의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현 청와대)로 진정서 를 보내 김 호에 대한 호의는 결코 베풀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김 호 씨는 바로 매국노이며 반국가적인 역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혜택은 결코 줄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동지회원에게 내 진정을 성의껏 전하여 평온을 찾도록 하는 한편 리 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 박 찬일 대통령 비서,임 병직 외무 장관 둥 제씨에게 편지와 전화를 하여 내 심정을 적극적으로 전했다.


즉 내 의도는


첫 째 김 호씨가 용서할 수 없는 미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딸과 어머니는 무죄하고 선량한 우리 대한의 동포이기에 그들의 행복올 짓밟아서는 안되며

둘 째 우리 동지회가 민족을 사랑하는 천하공당임을 나타낸 이상 그 실천을 이 기회에라도 하여 동지회의 민족 사랑을 만천하에 한번 더 실증하고

세 째 김 호씨 자신이 진정으로 뉘우쳐 민족의 품에 안기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과거 네가 우리에게 이러하였으니 너는 이번 기회에 호되게 한 번 맛을 보아야 한다는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 동지회가 김 호씨 일파의 소행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 큰 그릇의 대인이라 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소인배적인 행동을 하는 그들을 관대히 대하여 대우쳐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내 심정을 한국에 피력하였더니 프란체스카 여사는 우리 동지회 앞으로 서신을 보냈다. 그 내용은 이번 김 호씨의 딸 김 한숙씨를 미국으로 출국시키는 문제는 송 철씨 개인의 의사라기보담 우리 대한민국의 일민주의에 입각한 지역타파 당파타파 정책의 한 소관이라 하였다.


내 편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모두 공감공명하여 김 호씨의 딸과 외손자녀들을 미국으로 출국시키는데 협조를 아끼지 않아 쉽게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지금 김 한숙씨는 이 곳 나성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재미있게 살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수십년 동안 그렇게 리 승만 박사와 동지회를 매섭고 모질게 공격하며 욕설하던 김 호씨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10여 년전 그가 죽을 때까지 그는 지난 과거를 진정으로 뉘우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탕자의 돌아옴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목적하는 소망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우리 민족 최고의 기쁨 중의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한때 김 호씨의 농장에서 소출되는 농산물을 위탁 판매해 주고 또 그의 농장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은행으로부터 끌어 내 적지않은 지원을 해 준 연고로 김 호씨와는 상당히 친밀한 인간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리 박사와의 불화를 둘러싸고 얼마나 몹쓸 짓을 하였기에 김호씨 일파는 나의 연합회 비극 서술에 그토록 기나긴 지면을 차지하도록 하였던가? 이제 나는 본절의 제목에 대한 본론을 이야기함으로서 상기 질문에 답변을 하려고 한다.


누누이 강조하면서 기술했던 동지회 동포들의 성원은 절대적이었다.동지회가 하와이에서 세워진 그 이듬해에 교민단이라는 것이 1922년 3 월 22일 창립되었다. 교민단이 그 목적을 구미위원부의 예속된 정치 기 관으로 두어 리 승만 박사의 외교활동올 돕는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 교민단은 우리 동지회원과 같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어서 기회주의자와 자기 명예를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리 승만 박사 이름으로 해외 동포들로부터 호응을 받아 애국금올 징수할수 있었던고로 리 박사의 이름을 한약방의 감초처럼 이용했던 것이다.


리 승만 박사의 지시와 감독이 싫고 또 모아지는 애국금이 탐나 그들 의 마음든: 환절기의 날씨처럼 변하곤 했다. 앞서 기술한 리 승만 박사 탄핵사건이 있을 때 이들은 상해 임사 의정원측에 붙어 리 승만 박사를 축출하고 그들 마음대로 미주 한인 동포들의 애국금과 감투를 가져 보려고 했었다.


그중에 가장 노골적인 위인이 김 현구와 김 원용이언는데 드디어 들로 인해 교민단에 유혈극이 또 일어나고 말았다. 이것은 법정 문제로 번져 1931 년 4월 16임 순회 판사 크리스티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교민단의 회관 사용권이 제일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사용권은 정당하게 선츨된 이 승만 박사 지지자들로 선출된 임원에게 있다고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교민단에서 쫓겨난 반대파들은 1933년 1월 3일 이미 하와이에서도 없어진 국민회를 다시 일으켜 회원을 모집했다. 그러나 동포들이 리 승만 박사를 반대하는 김 현구와 김 원용이 있는 한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고 냉대를 했다. 그러자 이상의 두 사람은 19않년 4월 5일자로 해임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동년 4월 26일 전임원이 총 사직하고 동년 6월 15일 김 윤배가 겨우 6개월의 총회장직에 머물러 있다가 그 역시 도중하차해 버렸다. 그 후 리 승만 박사와 그다지 모나지 않은 인사들 중에서 임 성우, 조 병요,안 원규와 같은 제씨가 나와 그 명맥을 간신히 이었다.


우리 동지회와 리 승만 박사를 떠나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으며 단체 하나의 명맥도 이어나가기 힘든 것을 자각한 반대파들은 그들 회 원의 온건파를 움직여 연합회 운동을 벌였다. 그들 온건파들도 동지회 를 중심하여 일을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도 독자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끝에 연합회를 촉진하는 제안을 냈었다.


「미령과 중령에 있는 독립운동단체 대표자들을 소집, 해외 한족 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의 새 방략을 확정하며 그 대회 공결에 따라 사업을 진행하기로 제의함」


이 제안에 대해 우리 동지회는 어떠한 연합 사업을 위해서 공동 전선을 벌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먼저 독립운동을 위한 대행 기관으로 선행 되어져야 하고 따라서 모든 단체는 이 연합회에 정치,외교,재정,교육 둥 일체를 일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종전 예로 임시정부 가 조직되어도 그 임시정부의 지도자가 자기파나 단체의 사람이 아니라고 파쟁을 일으키고 개별운동의 난립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모든 단체를 모두 해산, 새로운 단체를 만들자고 하였으나 나는 이를 극구 반대했다. 지금까지 그런 경험을 과거에 가진 바 있었어도 그것은 성공하지를 못했다. 이미 있는 기존 단체를 없이할 것이 아니라 그 단 체를 그냥 존속시키고 연합회에서 해야 할 공동 목표만을 각 단체가 연합하여 완수하도록 하자고 나는 주장했다. 내 주장은 모든 동지회원의 뜻과도 부합'하여 동지회의 정책으로 설정이 되었다.


연합회 때 임 병직,임 영신과 나는 동지회 대표로 모였는데 김 호, 한 시대 둥이 리 박사를 욕하게 되자 젊은 임 병직은 웃옷을 벗어부치고 「어디 한번 해 볼테 면 해 봐라」면서 분개 하기도 했다. 만약 동포들이 연합해야 할 그 어떤 사항의 뜻이 있으면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연합 전선을 각 단체가 총망라하여 하면 되는 것이다. 목적은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하는데 있다. 결코 단체를 만드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우리 동지회는 같은 독립운동의 정치관을 갖고 굳게 뭉쳐 독립운동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단체를 해산하고 과거의 쓰린 전철을 다시 거듭 되풀이할 필요는 없었다. 그 쓰라린 경험에서 조직된 것이 우리의 동지회였다. 


그리하여 우리 동지회는


「재미 한족의 연합 기관을 설립하고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 행사를 연합 기관 지시에 따라서 이행하게 제의함」


이라 공포하였다.


그러자 북미 대한인 국민회의 김 호,송 종익,한 시대와 같은 이들은 즉각 반대 성명을 내고 나왔다.


「각 단체의 의사가 일치되면 모든 기성 단체들을 해체하고 미주와 하와이를 통하여 단일당을 결성하기로 하되 이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의 당직자들이 합석 회의를 열기로 함」


이와 같은 성명은 우리 동지회가 비대한데 비해 그들의 회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빈약한 것을 시기한 성명이기도 했다.처음 그들이 동지회가 없이는 무 일도 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발의한 제의라 그들의 주장은 끝까지 몰고가지를 못했다. 환언하면 우리 동지회의 제의 그대로 성취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1941년 4월 20일 오후 2시에 하와이 호놀룰루 밀러가 1306번지 건물에서 연합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무렵, 리 승만 박사를 도와 일하던 김 현구를 문제가 생긴 하와이로 파송하여 문제의 수습과 해결을 부탁했는데 그는 오히려 리 박사 반대파에 매수되어 유감스러운 일을 저질렀다.


재미 한족 연합회 결의안


1. 독립 전선 통일에 관한 문제

(1) 대한 민족은 주의와 이론을 초월하고 온갖 역량을 항일 전선에 집중함

(2) 우리 기관들의 신문과 잡지와 모든 출판물은 독립운동에 대한 논조를 일치하게 함

(3) 표어를 만들어서 정신집중과 행동통일을 민활하게 함


2.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문제

(1) 대한 민족과 각 단체는 임시정부를 절대 신뢰하며 물질과 정신을 다하여 회생적으로 봉대함

(2) 대한 민족과 각 단체는 임시정부의 온갖 법령을 준행하기로 함

(3) 정부의 위신과 규율의 신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현 정체는 민족의 총의적 요구가 아니면 변경하지 못하도록 임시 의정원에 법안 통과를 요청하기로 함.


3. 군사 운동에 관한 문제

(1) 해외 한족 단체는 전체 동포에게 광복군 군인의 의무가 있는 것을 인식 시키며 전선 출동의 훈련을 장려하기로 함

(2)광복군과 의용대는 무조건으로 합동,임시정부 산하에서 대일 항전을 합작하도록 요청하기로 함


4. 대미 외교 기관 설치 문제

(1) 워싱턴에 외교 위원부를 설치하기로 함

(2) 외교사무는 위원 한 사람을 두어 전담하게 하되 시국의 전개와 사 무 증가에 따라 인원을 증가함

(3) 외교 위원부 사업은 임시정부 외무부 지시를 따라서 진행함

(4) 외교 위원부 경비는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가 부담하기로 함

(5) 리 승만을 대미 외교위원으로 택정함

(6) 이상의 조건은 임시정부세 청원하여 인준을 받은 후에 실시하기로 함


5. 미국 국방 공작 후원 문제

(1) 재미 한족은 이디서든지 직접,간접으로 미국의 국방공작을 원조 하므로 거류민된 의무를 이행하기로 함

(2) 국방공작 봉사원 1명을 선택하여 적 당한 부문에 물사하게 하되 경 비는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가 부담하기로 함

(3) 한 길수를 국방 봉사원으로 택정함


6. 재정방침에 관한 문제

(1) 독립운동에 쓰는 모든 재정을 독립금이라 칭하고 각지에서 일정한 방법으로 독립금 특연을 수봉하여 재미 한족연합 위원회에 납부하기로 함.

(2) 재래에 각 단체가 독립운동올 위해 수봉하던 각종 특연의 명칭을 일체 폐지하고 독립금올 수봉하기로 함

(3) 독립금 수입의 3분지 2는 임시정부로 보내고 3분지 1은 외교 경비 와 국방 공작 후원 경 비에 사용하기로 함(후에는 하와이에서 걷은 것은 임시 정부로, 미 본토에서 걷은 것은 구미 위원부로 바꾸었음)

(4) 재정 출납에 관한 세칙은 따로 정하기로 함


7. 연합 기관 설치 문제

(1)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를 설치함

(2) 재미 위원회 기관은 이사부와 집행부로 조직하며 이사부는 하와이에 두고 집행부는 미주에 두기로 함


8.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 구성

(1) 본 회의 명칭은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라 함

(2) 본 회의 목적은 대한 민족의 독립운동과 항일 전선을 통년하며 항일 승리를 획득하기 우1하여 재미 한인 단체들을 규합,그 역량을 집중하며 일반 운동으로 확대 강화함에 있음

(3) 본 회는 재미 한인의 정치 단체로서 구성함

(4) 본 회의 제도는 위원제를 채용하며 임원은 각 단체 대표들로 조직함 

(5) 궐임된 임원을 보선할 경우에는 전임자 소속 단체에 통지하여 대 표 파송을 요구하며 임원의 직무를 변경할 경우에는 임원회의 결의로 실행함

(6) 본 회의 회원 단체는 사업 진행의 제의권과 투표권이 있고 경비를 분담하는 의무와 독립금을 수봉하여 본 회 재무부에 납부하는 재임이 있음

(7) 본 회의 회원 단체는 해외 한족 대회 결의안과 본 규정을 준수하 며 본 회 목적에 위반되는 일을 행하지 않기를 서약함

(8) 본 회의 임원과 본 회의 임명올 받은 인사들은 반드시 본 회의 지도에 따라서 임무를 수행함

(9) 미국 국방는작 후원의 일체 사무는 본 회의 임원희가 관리함 

(10) 본 회 재정출납의 세측은 시세를 따라서 변경할 수 있으나 반드시 이사부의 인준이 있어야 함

(11) 본 회의 재정 지출은 이사부 지시에 의하여 집행부가 집행함

(12) 본 회에는 상례회가 없고 이사부와 집행부의 공결로 사업을 진행하되 특별한 경우에는 전체 대회나 각 단체 합석 회의를 소집함


9. 독립금 수봉에 관한 문제

(1) 독립금 판납은 하와이에서는 이사부에 납부하고 미주에서는 집행부에 납부하며 각 기관에 재무 2인씩을 두어 관리함 (미주 본토에서는 재무로 나를 선정했음)

(2) 재미 한족은 누구나 매년 매인이 독립금 15불 이상을 부담하되 각 지방의 형편을 따라 수봉 방법을 발표함

(3) 미 령에서는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의 인준없이 독립금을 수봉하지 못함

(4) 집행부는 매월 1차씩 재정 보고를 발표함



본 대표들이 재미 한족 연합위원회에서 의정한 일체 결의안을 이에 거듭 증명하며 실행 효과를 얻도록 충성으로 노력하기를 서약함


동지회 중앙회 대표:  안 현경, 이 원순, 도 진호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대표:  안원규, 김 현구, 김 원용

북미 대한인 국민회 대표:  한 시대, 김 호,송 종익

중앙 민중 동맹단 대표:  차 신호

대조선 독립단 대표:  강 상호

한국 독립당 하와이 지부 대표:  임 성우

의용대 미주 후원회 대표:  권 도인

대한 부인 구제회:   심 연신,민 함나

대한 여자 애국단 대표: 이 성예, 박 경신(나성 한인 침례교회 교인)


이상 재미 한족 연합회를 탄생시키는데 장장 8일간 주야로 회의를 강행군하여 성립되었다. 그 결실은 우리 동지회의 범국민적인 포용성과 능력에 기인되는 바가 컸다. 

회칙에 명시된 바와 같이 내가 있는 4성에는 집행부가 세워졌다.



나는 이 때 이미 나의 사업체가 나성에서 교포로서는 상당한 경제 기반이 잡혀 있을 시기이므로 나의 비중을 크게 다루고 있었다. 조용히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내 신조였지만 동포들이 무슨일을 하든지 나를 관련시킬려고들 하였다. 부득이 동포들의 성원에 못 이겨 특히 동지회 전체의 의사에 순응해야 하는 분위기에 어찌할 수 없게 되어 집행부 위원이자 재무담당 한족 연합회의 임원을 맡았는데 임원들을 소개하면, 


이사부 위원

이 원순, 도 진호, 안 원규, 김 현구, 김 원용,조 병요, 손 승운, 전 경무,차 신호, 강 상호, 임 성우,민 함나, 심 영신, 유 진석, 최 두욱, 정 두옥


하와이 지방 위원

김 재한, 기 예순,김 국경, 현 도명, 인 봉주, 이 봉수, 이 윤호, 김 우옥,이 병준,정 호영


집행부 위원

김 용중,임 병직, 김 용성,  송 철, 한 시대, 김 호, 송 종익, 김 병연, 이 경선, 송 헌주, 박 경신, 김 성낙, 유 일한, 신 두식, 김 혜란


미주 지장 위원

이 순녀, 안 인식,.임 천택, 박 창운 둥의 제씨를 나열할 수 있다.


이사부의 위원장은 우리 동지회의 이 원순씨가 맡아 보았다. 그것은 우리 동지회가 주축이 된고로 자연지사로 되어졌다.


당시는 교회 분란이 일어났을 때라 동지들이 모아둔 4천여불을 김 충수가 현재의 제퍼슨에 있던 장로교 노회에다 주고 말았다.


김 중수는 당시 4백50불을 갖고 오늘날의 홈. 처치인 교회를 열고 거기서 목사로 일했는데 교회에서 쫓겨나자 김 중수는 이민국 문제로 골치아픈 일이 생겨 안 경호,전 진 둥에게 찾아가 자신의 난처한 신분 문제 를 울면서 애소했다.


연합회의 목적을 크게 둘로 대별한다면 미주안의 리 승만 박사 중심의 구미 위원부를 지원하는 것과 미주밖의 상해 임시정부름 돕는 것이다. 임시정부도 리 승만 박사를 탄핵했던 인사들이 물러나가고 친 리 승만편이었던 백범 김 구 선생이 내각을 이끈 이후는 상해와 미주간의 동포들은 격돌이 없었다.


명실공히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동서의 동포가 힘차게 뭉쳐졌었다.


여기에는 리 승만 박사의 세계를 놀라게 한 그의 위대성이 있어서 동포들이 그를 더욱 신뢰하도록 하는 인력(引刀)이 있었다. 리 승만 박사의 명저서 「일본 내막기」(本內幕記 Japan Inside Out)의 예언적 내용이 실제로 적중한데 대해 동포는 물론 전미국인의 경이적 찬탄이 리 박사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였다. 처음 리 박사는 이 저서를 세상에 내놓고 일부 미국인에 의해서 오해도 받았다. 리 박사의 일.미전쟁론의 불가피한 세계 정세를 예언하였다고 그를 주전론자이며 세계평화를 깨뜨리는 폭력주의자라고까지 쏘아 붙였다.


리 박사는 다만 일본을 고립 시키고 미국인의 친일정책을 반일정책으로 돌려 일본의 계속적인 한국 합방과 세계 침략에서 오는 대전 폭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것을 그들이 오해했던 것이다. 이 오해를 풀기 위해 그의 저서에서 변명했어야 했다.


「본인은 이 책의 발간동기가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읍니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 가끔 오해를 받고 있읍니다. 나의 친우들 중 어떤 이는 이따금 동양 문제의 토론 중에 나에게 묻기를 “당신은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는 것을 원하십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평화주의 자입니다. 나의 기질 과 종교면에서 보더라도…. 나는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유교 교육을 받았읍니다. 유교는 힘의 통치가 야만인의 통치이기 때문에 전쟁을 문명권내에 포함시키지를 않읍니다. 한국은 2천년 이상이나 이 높은 유교의 문화를 향유하여 왔읍니다. 바로 한국의 국호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평화)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인은 당신들이 “하우 두 유 두”(How do you do) “굳 바이”(Good-bye) 라고 인사하는 대신 “안녕하십니까”(Are you in peace?) “안녕히 가십시오”(Go in peace) 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선천적으로 평화주의자의 한 사람입니다…」


리 박사는 우리 민족의 평화주의적인 우수한 조상의 정신과 우리의 우아한 민족성을 승산없는 일시적 테러행위 및 전쟁수단에 의해 결단을 내는 그런 어리석은 민족이 아님을 단적으로 드러내어 자기 변명을 삼았다.


폭로적인 저서의 내용은 소위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을 표방했던「다나까 일본 제국주의론」부터 파헤침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다나까(田 中)의 주장의 일부는


「동양에 있어서 영토확장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철혈정책을 취하여야 한다.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동양과 유럽을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며 동양과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 …장차 중국을 지배하고자 하면 먼저 미국을 격멸하는 것이 제1차적인 문제이다. 중국 정복에 성공하면 나머지 동양과 남양 여러 나라는 우리를 무서워하여로 항복할 것이 다」라 하였다.


이 같은 다나까의 계획서는 한 무명의 한국인이 흥쳐 내 복사하여 중국정부에 제공한 바 있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그것의 신빙성을 무시해 버렸다.


허나 리 승만 박사는 그 계획서를 훔쳐내 복사한 것을 아주 중요시했다. 그것을 흉쳐낸 무명의 한국인 독립투사는 일본이 영원한 함구령을 내리기 위해 암살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리 박사는 가볍게 다루지를 아니하고 그의 혜안(奪服)올 밝혀 저서화했다. 


이 저서에 대해 대지(大地)의 저작자인 미국의 펄벅 여사는「아시안. 메거진」에서 서평을 쓰기를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로서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나 너무나도 진실이기에 무서운 것이다. 사실 일본에 정복을 당한 국가의 한 시민으로서의 리 박사는 전반적으로 보아서 놀랄만큼 온건하다. 그는 이 책에서 공포를 쓴 것이 아니며 분명히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지적하고 증거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극동에서 일본이 계피 하고 있는 새 질서에 관해 권위있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 사람일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미국인이 있는 사실, 즉 1905년의 한-미 우 호조약을 폐기하고 일본이 한국을 정복하도록 인정해 준 사실을 비난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외교의 실책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증명해 주는 하나의 표본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를 애기할 때 미국인들이 진심으로 감사해야할 경고룰 해 주고 있다. 거기에는 일본인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는 조금도 없고 다만 일본인의 심리 상태가 전인류에 대해 얼마 만큼 위험한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인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므로 미국 사람은 읽지 않으면 안 될 책이며 지금이야말로 읽어야 할 시기인 것이다. 되풀이하거니와 이 책이 진실하다는 데서 나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낀다」


라고 호평하였다.


참으로 펄벅 여사가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서평해서 지적했둣이 미국인을 중심한 모든 세계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라의 마수와 전쟁도발을 예견하고 면밀주도하게 여기에 대처했어야 했다. 또한 마땅히 리 박사의 선견지명과 예언에 귀를 기울이고 임전태세의 자세로 임했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리 박사의 예언적 주장올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혹평을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공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조용한 일요일 새벽녘 삽시간에 요천여명의 희생자를 내기까지 그들은 깊이 잠들고 있었다. 즉 예수의 말씀같이 도적처럼 대재난이 닥쳐와도 졸고 있는 그러한 정황이었다.


우리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레미아 선지자를 잘 알고 있다. 그는 그의 예언서에서 유대국이 불원 멸망하리라는 것을 예언으로 외쳤다. 이 외침 때문에 그는 미움을 사고 토굴에 갇혔다. 그의 예언대로 유대국은 기원전 5期년 바빌로니아의 느브가데네살에 의해 멸망하고 그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후에야 유대 민족과 이방국은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바로 리 승만 박사가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미래의 정확한 비전과 계획이 없는 현재의 주변에만 고착된 범부들에게는 리 박사의 먼 장래의 청사진을 처음부터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일본의 전격적인 진주만 습격은 리 승만 박사로 하여금 예언적 정치인으로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망명 정치인의 탁월한 식견과 판단력은 재미 동포들로 하여금 그를 무조건 민족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다시 굳게 다짐하였다 리 박사를 반대하는 자들도 당분간 입을 다물어 대세의 분위기에 섞여 호응을' 해 그 흉내를 내어야 했다.


이와 같은 리 승만 박사의 놀라운 정치적인 안목은 재미 한족 연합회의 구심점이 되어 주었다. 어느 누가 감히 리 승만 박사를 제쳐 놓고 무엇을 하자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하늘이 특별히 우리 동포들에게 보낸 지도자인 것올 새삼 깨달아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밖에 다른 이설이 있을 수 없도록 그의 정치적 차원은 넓고 높았다.


주지한 바와 같이 나는 이 때 연합회 결성시는 집행부 위원으로, 결성 후에는 연합회 북미 재정 총책으로 봉사했다. 제2차세계대전은 발발 되고 미국과 일본 어느 한쪽은 이기든지 망하든지 해야 했었다. 이런 시국에 내가 맡은 바 소임은 리 박사가 일본의 진주만 폭격이 있은 후 천명한 바와 같이 일본의 멸망과 우리 민족의 자유 독립을 지%^하는 길이었다. 나는 리 승만 박사의 탄생기념을 할 때마다 리 박사의 육성 녹음을 듣도록 하고 있다. 그 녹음 방송은 1942년 6월에 몇 주간에 걸쳐 초단파 방송인「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방송되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 녹음내용은


                               

 「나는 리 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외에 산재한 우리 2천5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디서든지 내 말을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을 하려는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리 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천5백만의 생명의 소식이오.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의 철창에서 백방으로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의 사랑하는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왜적이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이 준비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비율빈을 일시에 침략하여 여러 만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정부와 백성이 잊지 않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대병을 동원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 이 의기양양 대득하여 온세상이 다 저희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안가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또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 열사 김 구,이 시영,조 완구,조 소앙 제씨가 합심해서 행정하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 청천,김 약산, 유 동열 둥 여러 장군의 지휘아래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군 총사령관 장 개석 장군과 그 부인의 원조로 군세를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여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미주와 하와이와 큐바와 엑시코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고진감래가 쉬지 아니하니 35년을 남의 나라 영지에 숨어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국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파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혼들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발포할 것이 이 기회에 있다 합니다.


우리 나라와 일본,만주,중국,시베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비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파상하시오. 적병이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 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 순신, 임 경업,김 경련 둥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횡폭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여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역사상 한두 번이 아니였나니,지금이 또 다시 우리의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때라 할 수 있읍니다.


우리 내지에서는 아직 비밀리 준비하여 숨겨 두었다가 내외에서 준비가 다 되는 날에 우리가 여기서 공포할 터이니 그 때에는 일시에 일어나서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을 일제히 함몰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동포와 미국 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매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와옵니다. 승인을 얻는 대로 군비군무의 후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울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주엘트의 선언과 같이 우리의 목적은 왜적을 파한 후에야 이루고 말것입니다.


우리는 백배 용기를 내어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를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하여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 다시 말할 기회 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은 우리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홀려야 자손만대에 자유의 기초를 회복할 것입니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천5백만 동포여!」라고 하였다.



이 방송 연설 중에서도 리 승만 박사는 예언적 미래지사를 이야기하 였다. 즉, 일본은 리 박사의 말과 같이「벼락불이 쏟아지는」참혹상의 원자탄 세례를 받고 무조건 멸망하고 말았다. 그의 함축된 하나하나의 연설을 우리는 재음미하여 보면 모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자세히 밝힌 지침서 임을 긍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한족 연합 회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고 내맡은 소임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 방송내용이 너무나 귀중하기에 나는 기회있을 때마다 나의 민족들에게 이를 들려주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무적인 그의 선언 발 표는 내 민족애를 발로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귀한 선언이기에 그 선언의 정신에 따라서 한족 연합회에서 내맡은 일을 충실히 한 줄 안다.


연합회는 할인증명서를 발부,미국 시민으로부터 부당하게 일본인과 같은 학대를 받을 우려를 배제시켰다. 진주만 습격 후 미국정부는 재미일본인에게 금족령과 재산동결령을 내리고 그들을 한 곳에 집단수용,전쟁이 끝날때까지 가두어 두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1주임 후이 1941년 12월 15일 부로 우리 한인도 다른 이민민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하여 일본인으로 취급되지 않도록했다. 이것은 리 승만 박사가 미 국무성을 움직여 법령화시키도록 해서 얻어진 결실이었다. 그렇게 안했으면 계속해서 북미주와 중미주의 재미 동포가 잠시나마 일본인으로 간주 되어 수난을 받아야 할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한전「재미한족연합회」는 김 원용 둥이「미주 한인 50년사」를 기록하는데 돈을 다 쓰고 나니 도 진호,이 살음 둥이 이를 들고 일어나 민중대회를 열고 이것이 발이가 되어 국민회가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렇게「재미 한족 연합회」가 구미위원부와 상해 임시정부를 열심히 돕고 있을 때 일부 몰지각한 동포들이 딴전을 벌이고 있었다. 즉 김 호 일파는 1941년 12월 22일 1백9명의 한인 국방경위대를 나성에서 편성시켰다. 김 호는 연합회의 집행위원장이라는 직위를 월권, 소위 맹호군을 창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말일에는 가주정부의 인가를 받고 이내 상해 임시정부에 승인을 요청, 동년 4월 26일 경에는 오나전히 합법적인 군사단체가 되고 말았다.


임시정부가 허락을 해 준 것은 미국정부에게 우리의 독립전선에 대한 부끄러운 추태를 보여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먼저 이것을 창설하기 전에 사전허락을 받고 했어야 했던 것을 김 호 일파는 순서를 무시해 버리고 계통을 밟지 안했다. 임시정부는 대외적인 민족의 추태를 피하고 대내적으로 민족분열을 막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인준을 해 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에 큰 시 련을 안겨 주는 처사가 되고 말았다. 우리 재미 동포들의 경제는 한정이 있고 이 교포들의 지원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연합회가 이미 맡은 자금조달의 책임도 벅찬데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맹호군의 군사비 일체까지 맡게 되었으니 그 짐이 너무 과중하여 파선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워싱턴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리 승만 박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민족 독립운동의 치명적인 차질과 분열이 목전에 쇄도하였기 때문이다. 이 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리 박사는 하나의 강구책을 마련해 내었다.


즉 리 박사는 미 국무성 군사담당 프레스튼.굳팬러 (Preston Goodfellow) 대령을 만났다. 그에게 대한 청년들도 유럽민족처럼 미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아 연합군에 참전토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우리 대한청년들이 미군시설에서 즉 육 . 해 . 공의 3군에 각각 50명 씩 1백50명을 훈련, 정예부대화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정예부대가 장차 한국 상륙의 선발대가 되어 참전토록 곁들여 동의를 얻었다.


굳팬러대령은 자기 부하인 위관급 장교 한 사람을 지명, 한인의 입대 모병을 위해 나성으로 보냈다. 물론 이 상문 박사는 나성에 있는 한족연합회 집행부에 연락을 미리해 두었다. 1백50명의 군대니까 김 호가 지명한 김 용성 사령관 휘하의 1백9명의 군인에다 조금이더 모집하면 1백50명이 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숫자모집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한인들의 입대절차를 위해 나성에 도착했던 미 장교가 라성연합회 집행부를 찾았을때 그 소임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 장교는 나성에 오기만 하면 한인지도자 리 승만 박사의 지시대로 순조롭게 한인을 입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양상에 봉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 호, 한 시대, 송 종익은 미 장교의 심방 목적을 듣고 그를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중화요리집 데리고 갔다. 거기서 공금으로 푸짐하게 대접을 하면서 리 승만 박사를 힐난하였다. 리 승만은 대한 민족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행하는 독선가이자 독재자라고 욕설을 털어 놓았다. 만약 미 국무성이 리 승만의 말만 듣고 그대로 행하게 되면 그 것은 그 이상 대한 민족의 불행이 없다고 하였다. 리 승만은 민족의 이름을 팔아 자기 명예만 높이는 민족의 배신자이니 그의 말을 듣고 미 국무성이 움직이면 우리 한인의 실망이 크다고 했다. 그러니 리승만과 는 일체 협의된 사항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 좋다고 종용하였다.


이 젊은 미 장교는 너무 천진난만 하였던지,아니면 그 화려한 접대에 감쪽같이 넘어 갔는지, 하여간 자기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워싱턴 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무도 위 세사람 이외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쳤다.


그런데 이것은 드디어 탄로나고 말았다.  오래 전부터 이상의 김 호 일파가 구미위원부에서 자기들도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리 승만 박사에게 누누이 졸라대어 리 박사는 견디다 못해 「그러면 한번 올라와서 우리들의 외교활동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기나 해서 결정을 다시 하라」고 했다. 이 허락에 그들은 공금올 이용, 워싱턴에 올라왔다.


때마침 그들이 도착하기 바로 하루 전에 미 국무성의 굳. 팬러 대령으로부터 리 승만 박사에 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리 박사에게 「내 부하인 장교 한 사람이 한인입대절차 문제로 나성에 갔다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읍니다. 나성주재 한족 연합회 집행부에서 리 승만은 우리 한족을 대표할 수 없으니 일체의 모든 미 국무성과의 협의는 무효라고 해서 그냥 돌아오고 말았읍니다」라는 내용을 전화로 이야기하여 알려 주었다.


이 내용을 모르리라 하고 그 다음날 김 호, 한 시대, 송 종익 둥 일행이 워싱턴 구미위원부 사무실에 들렀다. 리 승만 박사는 그들을 사무 실에서 접하자 마자


「이제 자네들은 필요없네. 나 혼자 이 일을 할 터이니 당장 빨리 이 사무실을 떠나 주게. 조국의 독립운동을 생각한다는 자네들이 그렇게 터무니없이 미 육군전략처 (Office of stragegic service 혹은, 약어로 O.S.S.라고도 함)의 장교에게 거짓말을 해? 이제 더 이 상 자네들이 필요없으니 당장 나가 주게」라고 하여 노기띤 음성 으로 야단을 쳤다. 그들 일행은 선 채로 한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


리 승만 박사는 민족 독립운동의 거룩한 과업을 성취하는데 이같은 김호 일파의 고의적 방해에 대해 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정부가 인정을 받고 그 임시정부의 우리 독립군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싸워서 독립으로 향하는 영예의 길을 망쳤으니 화가 머리털 끝까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민족을 배신하는 일중 이 이상 더 큰 배신이 없으며 이 이상 더 용서할 수 없는 간악죄를 저질렀으니 화 가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리 박사는 미국 정치인들의 우리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 아주 고심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세계로부터 공인받는 임시정부가 되어야 일본멸망 후의 조국의 독립이 빠를 줄 알았던 고로 리 박사의 임시정부 인정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열국으로부터 받으려는 노력은 문자 그대로 필사적이었다.


필사의 노력 끝에 미 육군 전라처 장인 빌,도노반(Bill Donvovan) 소장과 실무참모 굳-팬러를 움직여 성공시킨 한국인 특수부대 조직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군사시설이 잘 되어있는 훈련소에서 무료로 우리 청년들을 양군할 수 있었으니,


첫 째는 우리 조국을 우리 힘으로 찾게 되었고

둘 째는 막중한 경비부담이 없어서 독립운동올 더욱 폭넓게 할 수 있었고

셋 째는 재정궁핍으로 일어날 민족분열을 막을 수 있었으니 아주 행운의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 호 일파의 배신적 체방에 의해서 그 행운은 산산조각이 나 고 그 자리에 민족의 불명예와 화근(禍根)만이 도사리게 되었다. 그들의 졸열한 근시안적 명예와 영화욕때문에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다시 한번 된서리를 맞아야 했다. 리 박사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은 그들은 피를 토하며 회개치는 않고 공금올 남용하면서 뉴욕, 시카고,중가주 지방을 거쳐 오면서 리 박사에 대한 입에 담을 수 없는 험담만 늘어 놓았다. 그들은 동포들에게 14 개 조항의 중상모라을 선동하고 있었는데 그 주요내용은


1. 리 승만의 실패 사항

2. 새로운 외교 위원부 창설

3. 리 승만의 구미 위원부 축출


둥으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그들이 리 승만 박사를 무고히 송사하여 떠들어대니 조용하게 있던 동포들이 사실여부를 알기 위해 나성으로 각처에서 모여 들었다. 이 날이 1943년 1월 17일이었다. 구름떼처럼 모여든 동포들은 나성의 Vermont Ave와 24가 근처에 위치한 화란인들의 공회당건물(후에 한인 문화회관이 되었음) 윗층을 빌려 민중대회를 열렀다. 김 호와 가깝게 지내던 이 살음씨가 민중대회를 주관하여 회를 이끌어 나갔다. 회가 차츰 진행하여 나감에 따라 그 흑백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연합회의 집행부가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 김 호를 중심한 몇 사람의 용서할 수 없는 독단적 행위에 대해 민중은 분개하기를 여실히 얼굴표정과 온몸에 나타내었다. 더욱 분개한 것은 김 호와 관계가 밀접했던 중가주 지방의 다뉴바, 팔레, 센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월로그로우 등 5개처의 동포들이 격앙되어 노호처럼 부르짖었다. 이 험악한 분위기를 목격한 김 호는 어디론지 도망치고 말았다.


재정총책인 내가 김 호의 반대와 결재가 나지 않아 구미위원부로 보낼 송금이 2개월분이나 밀려있다고 보고하니 대표들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쳤다. 앞에서 조용히 앉아 김 호의 만행을 자초지종 듣고 있던 이 순기씨는 [김 호! 이것이 사실이냐? 네가 그렇게 악한 줄 몰랐다]하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숨통이 막혀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1943년 1월 17일)


그래서 민중대회는 더 계속하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초상집으로 변하 고 말았다. 이 순기씨는 그의 아들이 한때 올림피 수영종목의 하나인 미국 다이빙 챔피언이었던 새미 리의 부친이기도 하다. 지금 새미 리는 나성근교에서 치과의사로 병원에 종사하며 잘 살고 있다.


이 민중대회로 김 호와 함께 국민회를 하고 있었던 이 살음, 박 호근, 신 종호, 정 홍성, 임 일씨 등 여러사람들이 김 호의 국민회에서 탈회, 우리 동지회로 모여들고 말았다. 그로 인하려 상기 5개처에 동지회지부가 갑자기 창설되어고 따라서 동지회원은 급증돼 유래 없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한족 연합회의 비극은 전민족이 뽑아 놓고 전세계가 지목하며 존경을 표했던 리 승만 박사를 무시해 버린데서 발단하였다.


시대마다 특히 민족의 수난을 당하는 시대에 민족이 선출한 지도자는 그 맡은 바 임무가 아주 크다. 총칼을 잡아 민족의 지도자가 된 것도 아닌 지도자가 막중하게 수행해야 할 독립운동이 몇몇 소수의 간악배들에 의해 일시적이나마 중지되었으니 조국을 염려하는 자들은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기씨는 바로 그러한 비분강개로 해서 순국한 애국지사였다. 연합회가 조국을 위하지 않고 어떤 몇몇 개 인에 의해 농락될 때 애국지사들의 마음은 아니 전대한의 민족은 피가 끓고 비통하여 죽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애국하는 이들의 자연적인 생리현상이었다.


김 호라는 사람은 전술한 바와 같이 반 리 박사 라인의 선봉이었다. 자기가 살고 있던 잘 지은 집을 가옥세가 많이 나왔다고 모두 허물어 없애 버리고 농장까지 팔아 버린 다음 취직생활로 전향한 일도 있다.


그런 김 호가 말년의 어느 날 오후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부인이 깨 워보니 심장마비로 죽은 것올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김 호의 아들은 독일에 건너가 건축학을 공부해 와서 김 형순씨의 집을 아주 멋있게 지었다. 그의 딸 김 환숙도 도미 이후 잘 살고있다. 김 호의 아들은 김 형순의 둘째딸과 결혼했다.


김 호는 민족애를 자기 명예욕 때문에 상실한 사람이었다. 1942년 8월 29일 나성시청에서 대한민국의 국기를1게양한 현기식(懸旗式)은 바로 국가와 민족을 빙자한 자기 발표였다. 이 날이 일본에게 합방 당하던 국치일이더니, 또한 김 호의 개인 행동으로 민족전체의 단결을 대뜨 리는 수치일이기도 하였다. 

애국은 민족의 전체 정당한 호응에 따라 행동해야 미덕이 되고 충성이 되는 것이지 민족을 저버리면서 자기 혼자서 충성은 못하는 것이다.


연합회는 바로 이러한 견지의 뜻에서 세워지고 받들어졌건만, 그 연합의 뜻을 망각해버린채 개인 영달을 꿈꾸고 행동했던 김 호 일파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연합회를 깨뜨린 김 호 일파는 양식을 갖고 있는 동포는 한 사람도 붙어 있지 않고 떠나고 말았다. 새로운 민족 독립운동의 기풍이 서서히 진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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