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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환_Pointed copy.jpg

1919 3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임시 정부 대표단과 공보국 직원들의 모습 사진

앞줄 왼쪽 번째는 여운형의 동생여운홍, 앞줄 오른쪽 번째가 김규식(金奎植), 바로 뒤가 기환지사이다.





황기환 지사는 1886년 평남 순천에서 태어나, 1904년부터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계약노동자로 종사하셨습니다. 이후 1906년 미본토로 이주하셔다가 1917년 미군에 자진 입대하여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1년 이후 세계대전은 191811월 11 종전을 하였으며, 이후 제대하여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프랑스에 잔류하였다.

 

파리 강화 회의 대표단장으로 이승만이 가기로 하고 일찍부터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당시 동맹국이었던 미국의 여행불허로 인해 급하게 새로 급조된 김규식의 대표단이 3월이 되어서야 파리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무국적자는 미국정부의 여행허가가 있어야 외국 여행을 있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사정과 편의 따라 여러 나라 국적으로 변경하였으나 이승만은 1945년 독립이 때까지 조선국적을 지키고 있었다.)  


1919118일부터 1920121까지 계속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이승만을 기다리던 황기환은 3월에서야 도착한 임시정부 대표단을 즉각 도와줄 있고, 현지인이며, 한국인인 황기환과의 만남은 대표단에게 있어 행운이었다.

 

그는 19196월 임시정부로부터 파리위원회 서기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파리 강화 회의를 준비하게 된다. 동시에 이전부터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파리에서 Korea Review 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조선에 대한 홍보와 독립을 위해 선전활동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파리 강화 회의 이후 김규식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합류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파리에 남아서 조선홍보와 독립을 위해 선전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을 오가며 구미 위원부가 있는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사님은 1923년 뉴욕에서 3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지사님이 돌아가실때에 우남은 중국에서 이미 돌아와 1921년 11월 11일의 워싱턴 군축회의(軍縮會議) 를 참석하신 이후이므로 시기적으로 장례식을 지켜보셨을 거라 사료됩니다.


 

주석*********************************************************************************************************************************

Korea Review에 관하여 더 설명을 드리면, 조선말 Homer Hulbert에 의하여 조선 홍보를 위하여 출판되어 미주와 유럽에 배포되었으며,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추방된 이후 copy right를 이관 받은 이승만에 의하여 Philadelphia에서 서재필과 함께 계속적으로 출판되어 배포되었다. 그리고 황기환에 의해서 파리에서도 출판 배포되었다.


초대 영부인 프란체스코 여사와 이승만의 첫만남이 수월했던 이유 중에 어릴 때 오스트리아에서 당시 Hulbert 박사의 Korea Review를 통하려 조선이라는 나라를 접하였다는 프란체스코 여사의 전언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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