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맹을 한마디로 말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소련이 지상낙원이라고 믿었던 집단이었다. 사노맹 조국이 1989년에 그의 서울법대 석사논문 논제를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형법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정하였던 이유도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가 지상낙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도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거짓말에 현혹되는 종북주의자들이 있다면 1980년대에는 그런 주장에 현혹되기가 훨씬 더 쉬웠던 시절이었다. 그런 종북주의자들에게는 북한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으뜸 지상낙원이었다. 그들은 지구에서 지상낙원이 하루라도 빨리 실현되게 하기 위해서는 남한도 빨리 미제국주의에서 해방시켜 사회주의 국가가 되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었다. 게다가 민청학련과 광주사태와 사노맹을 원격조종하였던 박현채는 1990년이 되기 전에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진영 국가들은 모두 몰락하고, 소련과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는 점점 더 날로 발전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사노맹이 몰락한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국가들의 붕괴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건설된 사회주의 국가들이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모두 붕괴하자 김대중은 박현채와 결별하였고, 박현채는 자기 예언과 정반대 결과가 나타난 것에 대한 답변을 사노맹 등 자신의 추종세력에 내놓지 못하였고, 1994년에 그의 주군 김일성이 사망하자 자신도 지병으로 곧 사망하였다. 이렇게 이론의 축이 무너지자 사노맹의 근간이 흔들렸다.
일찍이 서용순은 사노맹을 5‧18의 후사건적 주체들 중 하나로서, 대표적인 후사건적 주체로서 보았다. 분명히 광주사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으로서 발발한 것이었음에도 왜 여기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이 붙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5∙18 진영 학자인 서용순이 보기에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5∙18의 최초 주체들도 무너지고 5‧18의 후사건적 주체로서의 사노맹도 사라져가게 된 원인을 서용순은 이렇게 서술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5‧18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제도적 민주주의의 안착화 속에서 그 부분적인 의미만이 인정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고정되기 시작했다. 그 ‘절대공동체’가 보여준 정의와 평화, 자유와 해방이라는 중요한 의미는 ‘민주화’라는 제도적 정상화의 기표 속에 무작위로 흡수되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5‧18의 최초 주체들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점점 무너져갔다. 이러한 몰락에 가속도를 붙인 것은 그들이 신념으로 삼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사회주의 정치의 전면적인 침몰이었다. 1989년에 개시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이들을 당혹시켰고, 그제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과 대안의 모색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개량으로의 후퇴였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들 안에서 앞 다투어 폐기되었고, 결국 가장 완강한 것처럼 보였던 주체들의 고해 성사가 이루어지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사노맹의 해체와 박노해의 행보를 보라). 마침내 이 주체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일부는 자신의 불안한 신념을 유지한 채 다른 대안적 길을 위태롭게 열어갔고(시민사회론과 여타의 변종들), 일부는 국가적 제도 안으로 진입함으로써 개량화된 국가의 품에 안겼으며(이른바 ‘386세대’와 민노당), 일부는 완전한 배신을 행하며 보수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뉴라이트에 합류한 인사들). 그렇게 5‧18의 후사건적 주체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서용순 2007, 111-112).
전남대학교 5.18연구소가 펴낸 『민주주의와 인권』 제7권 2호에 “5∙ 18의 주체성과 후사건적 주체의 미래에 대한 소고”란 제목으로 실린 논문에서 서용순은 광주사태와 사노맹의 공통분모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이며 그래서 양자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이렇게 기술한다:
파리 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반성은 그대로 5‧18에 대한 반성과 연결되었고, 그 결과 전위에 의한 통일적인 지도 노선의 확립, 민중에 대한 (외부에서의) 의식의 주입 등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노선들이 채택되었고, 그것을 강령으로 삼아 비합법/반합법 투쟁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서용순 2007, 110).
소년 시절부터 일평생 김일성을 주군으로 받들며, 1960년대 중후반부터 김대중의 연설문 담당 비서였던 박현채는 남한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위장명칭인 ‘남한사회주의과학’이라고 불렀다. 조국은 사노맹의 선전선동 기관인 남한사회주의과학원(약칭, 사과원) 운영위원겸 강령연구실장이었는데, 남한사회주의과학원이 바로 남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위장명칭을 붙인 기관이다. 조국의 서울법대 석사논문 주제도 마르크스-레닌주의 형법이었고, 사노맹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선동하는 기관 운영위원 겸 강령연구실장이었다.
사노맹 강령의 골격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의 강령이었다. 문재인은 자생간첩단 남민전 강령을 본떠 사노맹 강령으로 사용하던 조국을 북한의 2019년 구구절에 대한민국 법무장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지금 왜 유독 북한과 북한세력 및 종북세력이 조국을 적극 지지하는가? 그 이유는 만약 적화통일이 목적이라면 적화통일세력 남민전의 강령을 이어받는 역할을 하던 조국처럼 법무부 수장으로서 적화통일에 기여할 만한 다른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사과원 운영위원 겸 강령연구실장으로서의 조국의 역할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연방제 적화통일론을 선전하는 사노맹 기관지 『우리사상』을 발행하고, 류선종 등 여러 가명으로 기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석사논문도 단 한 줄도 자기 문장을 쓰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표절하였던 조국이 자기 실력으로 자신의 글을 기고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아래 사진에서 『우리사상』 1991년 창간호 표지를 보면 조국이 류선종이란 가명으로 창간특집 기사로 "PDR론-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좌편향 사회주의혁명에서의 우편향"을 기고하였다. 그러나 조국은 자신의 가명만 빌려준 것이었을 뿐 실제로는 김대중의 연설문 담당 비서 박현채가 대필해 준 것이었다. 현재 조국게이트의 본질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각종 사칭 혹은 명의 도용에 의한 편법이다. 그런데 조국이 남한사회주의과학원 운영위원 겸 강령연구실장으로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발행에 주 역할을 하였던 사노맹 기관지 『우리사상』 자체가 이미 명의 사기 수법으로 발행되었던 것이다.

광주사태 배후세력 중에도 박현채와 이태복이, 사노맹 배후에도 박현채와 이태복이 있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조국이 겨우 25세였던 1990년 11월 중순경 열린 사과원 운영위원회에서 『우리사상』 창간호 기획안 및 집필담당자를 결정했는데, 창간특집 ▶ “PDR론—민주주의혁명에서의 좌편향, 사회주의혁명에서의 우편향”은 조국이 집필하도록 결정되었다. 이 기고문은 200자 원고지 300매 분량의 논문이었다. NDR(민족민주혁명론) 관점에서 PDR(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비판한 무려 50매의 이 긴 기고문 서론과 본론과 결론 중에서 한 문장 혹은 한 단락씩만 인용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레닌의 플레하노프적 한계라는 PD파의 발상은 당시 러시아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의 현실성을 고민한 레닌의 뒤통수를 치는 훈고학적 이론주의적 사고이며, 따라서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우리사상 1호, 66면)
“우리는 권력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틀어쥘 수 있다면 민주주의적 과제가 다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바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야 하고 미완의 과제는 그 과정에서 완수되어야 한다”(우리사상1호, 77면)
“현 시기에 있어서 우리의 임무는 페레스트로이카와의 투쟁 속에서 맑스-레닌주의의 혼을 수호하고 이 위기를 남한변혁의 수행을 통하여 타개하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후퇴 현상과 대조적으로 남한 노동해방변혁운동은 성장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중략]… 동지들! ‘사상이 인민을 장악할 때 그것은 힘으로 전화한다’라는 레닌의 말을 명심하자. 진군하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혁명사상, 즉 혁명적 노동해방주의로 물들어야 한다 …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맑스)” (우리사상 1호, 105-107면).1)
글자 수로 따지면 조국의 석사논문과 맞먹는 논문급 기고문이지만, 문체가 조국의 석사논문 문체와 확연히 다르다. 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끼리. 같은 주사파끼리 민족민주혁명론 관점에서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비판하는 것은 25세 청년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더구나 훨씬 오랜 기간 훨씬 정성을 들여 작성한 석사논문에서는 자기 문장이 단 한 줄도 없이 엉터리 문장으로 횡설수설하였던 조국이 훨씬 더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이토록 논리정연하게 기고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니다. 이 내용은 민족민주진영의 거물 박현채의 주장이요, 이 문장은 노련한 좌파 이론가 박현채의 문장이다.
김대중 이름으로 나가는 모든 성명서와 연설문과 논문과 기고문 들을 대필하였던 김대중의 연설문 담당 비서 박현채는 민청학련 사건 및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성명서와 사노맹 간부들의 기고문도 대필해 주었다. 기고문 대필로 좌파 이론을 보급하는 것이 박현채가 원격조종으로 민청학련 사건과 광주사태를 조직하고 사노맹을 양성하는 방법이었다.2)
박현채 본인은 석사학위도 없었고, 단지 서울 상대를 졸업하였을 뿐이지만 학자로 행세하였다. 북한 사상 서적을 운동권에 보급하다 적발되었을 때마다 그는 학자의 보호막을 쓰고, 학자가 학문적 연구를 위해 그런 서적들을 구하여 연구하였을 뿐이라는 논리로 수사를 비켜나가곤 했었다. 박현채가 사노맹의 사상 이론을 보급하기 위해 조국을 사노맹 이론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조국의 가명을 빌려 쓴 이유는 울산대 강사 조국을 이용하면 대학교수의 보호막을 쓰고 조직을 보호하기에 유리하였기 때문이며, 실제로 조국은 나중에 1995년에 그 보호막 덕택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라는 집행유예라는 솜방망이 처벌만 받았다.
『우리사상』 제2호에 게재된 조국의 글 “강령연구 : 강령의 실천적 이해를 위하여”는 사노맹의 관점(NDR론)에서, 남한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의 행동 목표와 지침인 강령 작성의 필요성과 강령 수록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글이다. 여기서 ‘강령’의 속뜻은 공산당 강령이요, ‘남한사회주의를 건설하기’의 속뜻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의 속뜻은 공산당이다. 그런 속뜻을 드러내는 한 예로 381면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러므로 최대강령은 당의 궁극 목표인 사적 소유와 계급의 폐지를 위해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자계급의 권력 획득에 대해 서술한 것이고, 최소강령은 사회주의의 혁명을 위해 요청되는 당면 정치적 경제적 개혁 강령으로 자본주의의 사회적 경제적 기초 위에서 실현 가능한 강령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우리사상 2호, 381면).
조국이 사노맹을 당과 동일시하여 “최대강령은 당의 궁극 목표인 사적 소유와 계급의 폐지”라고 하였다. 만약 이 강령을 조국 본인이 만들었다면 사노맹을 당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북한과 북한세력 및 박현채 등 종북세력만 사노맹 등 반국가단체들을 지하당으로 간주했었다.

위의 『우리사상』 제2호 표지목록 중 첫째 제목 “민중배신으로 점철된 김대중의 정치편력: 야심에 찬 해운업자에서 반동정치의 동반자까지”는 박현채의 글이다. 그때 막 김대중이 박현채와 결별한 것은 국민들은 전혀 모르고 김대중과 박현채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1971년부터 1991년까지 김대중의 경제정책은 대중경제였는데, 그것을 만들어준 인물이 박현채였다. 박현채의 대중경제론은 1990년이 되기 전에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모두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그런데 한국 운동권 경제이론의 골간이었던 박현채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1990~1991년 사이에 붕괴하였기 때문에 김대중이 그의 경제정책 노선을 바꾸기 위해 박현채와 결별하였고, 그래서 박현채가 김대중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이 대단했었다.
『우리사상』 제2호에서 필자 실명이 공개된 유일한 인물은 이태복이다. 제2호 표지 하단에 <이 사람에게 듣는다 ▶ 전민노련의 이 태복 "지금은 총체적 혁신이 필요한 때">라는 제목이 있다. 사노맹이 바로 위 전신은 1986년에 결성된 <제헌의회 그룹>이지만,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류는 전민노련이었다. 전민노련의 두 명의 공동위원장이 광주사태 주동자 윤상원과 이태복이었다. 윤상원과 이태복은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사흘 전이 5월 15일에 중앙청과 서울 시내 주요 방송국들과 청와대를 접수할 준비를 미리 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는 이태복으로부터 광주무장봉기는 사전에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고, 이태복과 사노맹은 그런 관계였으므로 이태복이 사노맹 기관지 『우리사상』 필진이 되었던 것이다.3)
2) 박현채가 민청학련 사건 및 광주사태 주동자들 명의의 성명서들을 대필해 준 사실에 대해서는 역사로서의 5.18 (제1권):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Google Play) 209~238 쪽을 참고하라. → 이 책을 Google 도서에서 읽어보기.
3) 1980년 5월 15일에 윤상원과 이태복의 전민노련 조직이 중앙청과 서울 시내 주요 방송국들과 청와대를 접수할 준비를 미리 해놓고 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김대령 저 임을 위한 행진곡 (Google Play) 217~229 쪽에서 Bradley Martin 기자가 기록한 이태복 본인의 증언을 읽어보라. → 이 책을 Google 도서에서 읽어보기.

위의 『우리사상』 제2호 표지목록 중 첫째 제목 “민중배신으로 점철된 김대중의 정치편력: 야심에 찬 해운업자에서 반동정치의 동반자까지”는 박현채의 글이다. 그때 막 김대중이 박현채와 결별한 것은 국민들은 전혀 모르고 김대중과 박현채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1971년부터 1991년까지 김대중의 경제정책은 대중경제였는데, 그것을 만들어준 인물이 박현채였다. 박현채의 대중경제론은 1990년이 되기 전에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모두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그런데 한국 운동권 경제이론의 골간이었던 박현채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1990~1991년 사이에 붕괴하였기 때문에 김대중이 그의 경제정책 노선을 바꾸기 위해 박현채와 결별하였고, 그래서 박현채가 김대중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이 대단했었다.
『우리사상』 제2호에서 필자 실명이 공개된 유일한 인물은 이태복이다. 제2호 표지 하단에 <이 사람에게 듣는다 ▶ 전민노련의 이 태복 "지금은 총체적 혁신이 필요한 때">라는 제목이 있다. 사노맹이 바로 위 전신은 1986년에 결성된 <제헌의회 그룹>이지만,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류는 전민노련이었다. 전민노련의 두 명의 공동위원장이 광주사태 주동자 윤상원과 이태복이었다. 윤상원과 이태복은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사흘 전이 5월 15일에 중앙청과 서울 시내 주요 방송국들과 청와대를 접수할 준비를 미리 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는 이태복으로부터 광주무장봉기는 사전에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고, 이태복과 사노맹은 그런 관계였으므로 이태복이 사노맹 기관지 『우리사상』 필진이 되었던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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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釋:
1) 데스크. 2019. “가명으로 '레닌 혁명' 선동… 조국 사노맹 논문 찾았다: 사노맹 기관지 '우리사상' 1, 2호에 류선종 이름으로 혁명 주창… 판결문서 '조국' 확인.” NewDaily. 2) 박현채가 민청학련 사건 및 광주사태 주동자들 명의의 성명서들을 대필해 준 사실에 대해서는 역사로서의 5.18 (제1권):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Google Play) 209~238 쪽을 참고하라. → 이 책을 Google 도서에서 읽어보기.
3) 1980년 5월 15일에 윤상원과 이태복의 전민노련 조직이 중앙청과 서울 시내 주요 방송국들과 청와대를 접수할 준비를 미리 해놓고 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김대령 저 임을 위한 행진곡 (Google Play) 217~229 쪽에서 Bradley Martin 기자가 기록한 이태복 본인의 증언을 읽어보라. → 이 책을 Google 도서에서 읽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