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은 광주사태가 끝난 지 8년 후인 노태우 정부 시절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광주사태’가 광주사태의 공식 명칭이었다. 지금은 5∙18과 광주민주화운동, 즉 광주사태는 한국에서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5∙18이 광주사태를 상징하는 숫자가 될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만약 광주사태가 1980년 5월 18일 발생하였다는 주장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한승헌, 이해찬, 한화갑, 민병두, 유기홍, 김대중, 김홍업 등 광주사태 발생 사흘 전에 서울에서 국가 전복을 시도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주동하였던 자들이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고 보상금을 받을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광주사태를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5∙18이 광주사태의 상징적 숫자가 되게 하는 것에는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진행된 김대중의 내란을 감추는 효과가 있다. 한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세력이 조국이 연루된 1980년대 후반의 사노맹 사건 때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미 1970년대 초부터 굵직한 시국사건은 그 배후 및 주동자들이 사회주의 혁명 세력이었다. 광주사태에는 제2의 민청학련 사건 성격이 아주 강하게 있다.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중 여러 명이 2년 후인 1976년경부터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에 흡수되었고, 1979년에는 민청협으로 명칭을 바꾼 민청학련이 <남민전> 세력과 결탁하여 부마사태를 일으켰고, 부마사태의 한 결과로서 10.26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그 틈을 타서 김대중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시도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부터 줄곧 계속되었다. 민청학련 사건 등 1970년대의 시국사건 관련자들이 최규하 대통령의 1980년 삼일절 사면 복권 조치로 복학하자마자 김대중의 사조직에 흡수되어 전국규모의 민중봉기를 기획한 것이 광주에서만 발발한 사건이 바로 광주사태였다.
문재인의 애창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황석영이 광주 친구 박형선의 요청으로 그의 여동생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바친 노래였고, 함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를 공모하였던 박형선의 매부 윤한봉 등 여러 명은 광주사태 당시에는 아무런 역할을 한 것이 없었지만 광주사태 발생 6년 전인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들이었다는 것 덕택에 5∙18 유공자로 인정받고 보상을 받았다. 조국의 사노맹의 사회주의 모델은 소비에트 사회주의이고, 소비에트는 프랑스어 꼬뮌(Commune)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단어이다. 사노맹 등 남한 꼬뮌주의의 원조 김남주는 1976년부터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전사로서 ‘꼬뮌주의 지하 혁명활동가 그룹’ 원조였다는 것 외에는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5∙18 묘지 구묘역에 안장되었다.
민청학련 사건 때 검찰관의 유인태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 제371~ 372면에 보면 의도적으로 유혈사태를 유발시키려는 민중봉기 음모가 1980년의 광주사태 때 처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보다 6년 전인 1974년 봄에 그런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가 막 시도되기 직전 발각되었다.
문: 피의자는 현 정부를 어떠한 방법으로 타도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가요?
답: 학생 데모를 선도로 하여 민중봉기를 일으켜 현정권을 타도함에 있어 우선 유신체제와 정부의 시책을 비민주적인 독재정권으로 단정하고 자원파동에 따른 국내경제에 곤란 등을 전부 현정부에 실책으로 선전하여 “민주회복” “민생고 해결” 매판자본 배격 등의 명분을 내세워 학생과 일반대중을 선동하여서 반정부적 세력을 규합하여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봉기, 시위를 전개하고 이를 저지하는 대항세력인 경찰들에게 준비된 화염병, 돌멩이, 각목 등으로 대항함으로써 유혈사태를 유발시키면 폭도화된 시위군중으로 하여금 파출소, 경찰서 등을 위시한 중앙청 청와대 등의 주요한 정부기관을 강점하여 정부를 타도시킨 다음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학생과 사회일부 불순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지도부를 결성하여 노동자 농민을 위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므로 결국 폭력혁명 수단의 방법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데모대는 향후 행동방침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차를 보였다.이태복의 그룹은 방송국 등 서울 중심부의 핵심 거점 점거를 바랬다. 그러나 다수파는 5월 16일에는 데모를 중지하고 정부의 반응을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윤상원은 이 말을 듣고 서울에서의 패배를 격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이태복이 전해준 말이다.이태복과 윤상원의 조직은 광주사태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주요 사건들에 깊이 이처럼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Martin 2000, 98; 블레들리 마틴 1997, 149).(The demonstrators differed on what to do next. Lee Tae Bok's group wanted to occupy key points in the central area such as broadcasting offices. ¬The majority, however, decided to call off the demonstrations on May 16 and wait to see the government’s response. “Mr. Yun, when he heard of this, vehemently criticized the defeat in Seoul,” Lee Tak Bok told me.Lee and Yun’s organization thus was deeply involved in key events leading up to the Kwangju incident itself (Martin 2000, 98).1
위에 인용된 이태복의 증언에서 서울역 철군을 반대했던 <전민노련> 노동자들이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지원하는 간첩들이 시위대에 많이 섞여 차량 테러 등 폭력시위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 중에 학생이 아닌 불순세력이 끼어 있어 보인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전민노련> 자체가 학생 단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자 단체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결성된 <전민노련>이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순방을 기회삼아 청와대와 정부청사를 점령하려는 어마어마한 음모를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광주가 아닌—부산, 마산, 그리고 서울 등지에서 열렬한 대중적 저항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우리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대중적 저항이 전개되면 최후까지 투쟁하여 80년대를 이끌어갈 운동역량을 키우자고 다짐했습니다 (블레들리 마틴 1997, 149). We expected that Pusan, Masan, and Seoul would be the hot spots for popular resistance—not Kwangju. We agreed that when the coup happened and massive resistance developed, we would fight to the end so the movement could grow up through the 1980’s (Martin 2000, 98).
1) 본 아티클에 약식으로 표시된 출처의 자세한 출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 (Google Play) 혹은 임을 위한 행진곡 (Google 도서) 422쪽 이하 참고문헌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2) 이태복 등 당시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했던 자들을 운동권이 과격파 혹은 매파로 분류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이태복 등 전민노련 소속 노동자들을 학생 신분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학생 운동권 분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는가? 더구나 전민노련은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청와대와 정부청사를 점거하려 하였던 것이므로 온건파 대 과격파 식 분류 대상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