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부터는 휴교령이 내려서 재학이를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단속했는데, 21일에는 친구집에 간다면서 나갔다. 다음날 하룻밤을 밖에서 자고 돌아온 재학이는 전날 시민군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고 하였는데 목이 쉬어 있었다."김대중 씨가 구속되었대요.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전두환이 보고 물러가라고 외치고 다녀요" (문재학, 김길자 1988).1

이날 전씨의 집 앞에는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군의 어머니 김길자씨도 왔다.김길자씨는 "자꾸 전두환이 '광주에서 총을 안 쐈다'라고 주장하는데 그럼 그 수많은 사람들은 누가 쏴 죽인 것이냐"라면서 "나는 내 아들의 목이 덜렁덜렁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전두환은 5월 영령 앞에 진심으로 사죄하고 석고대죄하라"라고 울분을 토해냈다 (오마이뉴스 2019.12.11).
5·18 당시 사망한 고교 1학년 문재학 군의 어머니 김길자(75)씨는 “전두환이 자신을 피해자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 피가 끓었다”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전두환 얼굴을 못보고 가서 너무 안타깝다”고 분기탱천했다 (박귀성 2017).
그런데 앞에 인용된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문재학 군이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하였다고 보도한 것은 오보요 가짜뉴스이다. 5월 27일 새벽 광주시민의 총에 맞은 다른 희생자들처럼 문재학 군 역시 광주시민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문 군은 11공수여단 특공대가 전남도청 후문 쪽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그 반대 방향인 정문 앞 분수대에서 도청시민군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통계 숫자로 보면 5∙18 유공자들은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 10만 발의 총탄을 쏘았다. 그 많은 총탄을 누구에게 대고 쏘았는가? 5월 27일 새벽에 도청시민군들은 오로지 광주시민들에게 대고 총을 쏘았다.
김길자씨의 질문 "자꾸 전두환이 '광주에서 총을 안 쐈다'라고 주장하는데 그럼 그 수많은 사람들은 누가 쏴 죽인 것이냐"에 대한 답변은 “5월 27일 새벽 도청 구간에서의 총 사망자 12명 모두가 5∙18 유공자들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이다. 여기서는 당시 광주상고 1학년이었으며 군복 차림이었던 문재학 군이 시민군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군은 중흥동 무장청소년이었다. 5월 21일에 자기 아들 문재학이 무장난동자들의 차를 타고 다닌 사실을 김길자씨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19일부터는 휴교령이 내려서 재학이를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단속했는데, 21일에는 친구집에 간다면서 나갔다. 다음날 하룻밤을 밖에서 자고 돌아온 재학이는 전날 시민군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고 하였는데 목이 쉬어 있었다 (문재학, 김길자 1988).
그 때 당시 저희 자체내에서 비상이 걸려서 모든 사람들이 당시 정비가 됩니다. 그때 제가 경비를 담당했는 데 그 때 총 한 자루와 실탄 20발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실탄을 소지한 사람은 일부였지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앞을 배치시켰는 데 배치시키기 전에 시민군의 안전을 위해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정문을 앞으로 해서 10명씩 배치시켰습니다 (제145회 국회 1989, 4:2).
위성삼은 도청시민군들이 청소년 문재학 등 ‘도청 경비 시민들’을 향해서 총을 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 장석화 위원: 그 때가 몇시경입니까?
○ 증인 위성삼: 새벽 3시경입니다. 그런데 그 때 옥상에서 M16 으로 우리들을 향해서 총을 쏘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 무엇 때문에 쏘느냐 우리편 아니냐!” 총을 쏘지 말라고......(제145회 국회 1989, 4:2).
총을 가진 광주시민들이 총을 가진 광주시민들에게 쏜 총탄은 비스듬히 위쪽에서 날라왔다. 그래서 위성삼은 옥상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실제로는 도청 2층 복도에서 30도 내지 45도 아래 방향인 도청광장 쪽으로 쏜 총탄이었다. 상황실장으로서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박남선은 위성삼이 본 M16 총탄, 즉 도청 방향에서 ‘도청 경비 시민들’을 향해서 날아왔던 총탄은 자기가 쏜 것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분수대 건너편 어둠의 도시에다 총을 그어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고 분노에 대한 절규였으며 이 학살극에 뛰어든 나의 역할이었다.나는 총알을 다 쏜 다음 탄창을 갈아끼우고 2층으로 올라갔다. 많은 동지들이 나를 따랐다. 2층으로 올라서자 복도의 유리창을 모두 깨라고 고함을 질렀다.『챙그랑-탁!』유리창은 파열음을 쏟으면서 조각들을 사방으로 튕겨냈다.나는 총구를 유리가 없어져 텅 빈 창턱에 올려놓고 금남로를 내려다 보았다. 분수대 근처와 정문앞 곳곳에 시체가 널려있었다. 몇 걸음 안되는 곳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아득한 죽음의 땅에 쓰러져 있었다. 거리에는 노란 섬광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면서 날아다니고 비명소리, 총소리가 범벅이 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계속 긁어대기 시작했다. 총의 약실에서는 탄피가 낙엽이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졌다 (박남선 1988, 380).2

광주시민은 시민군을 조직한 적이 없으므로 시민군이란 것은 실제로는 없었고, 따라서 시민군 대장도 없었다. “광주시민은 왜 총을 들었나”라는 제목의 위의 박남선의 5∙18 수기가 『신동아』 1988년 5월호에 게재되자 그때부터 박남선이 자기가 시민군 대장이었다고 자처하기 시작하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 1995년에 5∙18 재판이 시작된 것도 그 발단은 1994년에 박남선이 전두환 광주사태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사태를 야기했다고 주장하며 고소고발을 하였기 때문이다.
채동욱과 최환과 문무일 등 5∙18 재판 담당 검사들은 전두환 피고인에게 내란목적으로 5월 27일 새벽에 문재학, 안종필, 박성용 등을 살해한 혐의로 엮었으며, 그래서 그때부터 문재학 군의 어머니 김길자씨가 전두환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주장을 하며 종종 광주단체들과 더불어 상경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시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채동욱과 최환과 문무일 검사는 그 재판 고발인 박남선의 5∙18 수기조차 안 읽어 보았는가? 그의 수기를 조금만 읽어보아도 광주사태 가해자는 피고 전두환이 아니라, 원고 박남선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드러난다.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과 안종필 등 5월 27일 새벽 도청광장에서, 즉 분수대 근처와 도청 정문앞 곳곳에서 사망한 10인의 도청 경비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자는 바로 박남선이었다.
5월 21일 괴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함락하였을 때 철수한 계엄군이 5월 27일 아침에 재진입하였다. 이 날 아침 무장난동자들 편에서만 일방적인 발포를 하였다. 무장난동자들을 시민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지만 설사 그들을 시민군이라고 호칭한다고 하더라도 시민군 쪽에서만 일방적인 발포를 하였다. 시민군이 국군을 향하여 총을 쏘았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시민군이 시민군에게,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에게 총을 쏘았다.
박남선이 왜 총을 들었는가? 광주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들었는가? 군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광주해방구에서 폭력전과자들이 총을 들면 광주시민이 보호되는가? 그러면 왜 아직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하기 전에 분수대 쪽으로, 금남로 쪽으로 자기편 무장시민들이 배치되어 있는 쪽으로 총을 쏘았는가?
1) 간첩단 사건 관련자들을 제외하고는 5.18 유공자들 중에 전두환이 누군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역사로서의 5.18 (제1권):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Google Play) 혹은 역사로서의 5.18 (제1권):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Google 도서) 37~68면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는 자들의 소동"을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