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경상도 군인만 내려왔다」는 유언비어가 전 광주지역에 퍼져 나가고 있으며 그 외에 「공수부대가 유부녀를 겁탈한다」느니「술을 먹거나 환각제를 맞았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사복경찰로부터 접수되기 시작했다. 이런 유언비어는 결국 상대방의 감정을 극한 상황으로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전라도 출신인 대대장은 지역감정을 악용한 유언비어를 보고 받고 『경상도 출신 군인은 대열 후미에 배치시켜 광주시민을 자극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가까운 시위진압 현장에 투입되지 않은 나는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들으면서 코웃음 쳤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우리가 유부녀를 겁탈한다? 전시와 똑같은 상황에서 대열을 이탈해 그런 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인데 어느 정신 나간 친구가 대열을 이탈할까. 특히 일개 중대가 장교 2명 사병 10명으로 구성된 12명의 최소 인원 단위에서 그러한 행위가 가능할까. 더구나 그날 가장 과격한 시위가 벌어질 무렵 우리 부대원 대부분은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급식차량이 시위대에 밀려 부대원에게 공급되지 못하고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대원들에게 환각제나 술이 공급될 리 만무했다 (김치년 1996, 428).
2017년 5월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래 5∙18 유공자들의 수가 부쩍 늘었는데, 2018년에 새로 5∙18 유공자가 된 자들 중에는 김상회도 있었다. 김상회는 광주시민군도 광주시민도 아니었으며, 광주사태 때 전라남도 광주에 간 적도 없었다.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근무하던 전경이었다. 전주에서 전경으로 근무하였던 그가 무슨 공적으로 5∙18 유공자가 되었는가? 그는 1980년 5월 22일 광주사태 유언비어를 프로파간다하는 북한의 대남 방송을 들은 후 폭동을 선동하는 유언비어를 받아써서 가족에게 편지로 보내면서 북한의 광주인민봉기 중계방송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북한의 광주인민봉기 중계방송을 가족도 듣고 알리라고 했던 것을 근거로 5∙18 유공자가 되었다.
그런데 5∙18 유공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북한방송을 들었던 자는 5·18기념재단 설립자 윤한봉이다. 2006년 1월 24일자의 “윤한봉 구술녹취문”에서 윤한봉은 자신이 1976년에 북한방송을 듣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북한은 대남방송을 통한 원격교육으로 남한 운동권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2020년 현재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특보인 김현장도 그가 5∙18 유공자가 된 공적의 으뜸 근거는 김상회처럼 전북 전주에서 북괴방송을 청취하고 북괴방송이 퍼뜨리는 광주사태 유언비어를 받아써서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하여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이란 제목을 붙여 전국에 유포한 것이었다. 즉, 북한의 대남심리전 부역을 한 것이 나중에 5∙18 유공자가 될 공적의 근거가 되었다. 김현장 본인의 말로는 광주사태 당시 그는 김대중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나중에 좀 완화되기는 했지만 원래 1980년대의 김현장의 정치이념은 테러 행동으로 표현될 만큼 극단적인 반미주의였다. 줄곧 북괴방송을 들으며 반미주의에 의식화되고 타인을 의식화하였던 김현장은 1982년 3월에는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문부식 등을 의식화시키고 선동하여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현장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재판 변호를 광주운동권 박형선으로부터 의뢰받은 변호사가 바로 문재인이었다.
물론 김현장이 1982년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주동자였다는 사실도 그가 5∙18 유공자가 될 공적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광주사태와 관련된 공적은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을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한 것이었다.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은 현장 목격자의 기록이 아니었다. 5∙18 기록물 중에서 가장 긴 분량이지만 여기에 김현장이 현장 목격하고 쓴 내용은 단 1%도 없었다. 김현장은 광주사태 때 전남 광주가 아닌 전북 전주에 있었다. 그의 유인물은 현장 목격의 기록도 사실의 기록도 아닌 소문의 집대성이다. 그의 유인물에 굉장히 많은 소문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 한 건도 그가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본 것은 없었으며, 모두가 거짓말들이요, 악성 유언비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그가 직접 들었든 간접적으로 들었든--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은 북한 대남방송이 퍼뜨렸던 광주사태 유언비어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가장 대표적인 5∙18 기록물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은 광주사태 악성 유언비어의 기록이요,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의 증거물이다. 김현장이 전남 광주시민들에게서 들은 유언비어를 전북 전주에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전북 전주에서 작성한 유언비어 유인물이 전남 광주로 전달되어 퍼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가 그 유언비어들이 김현장의 순수 창작이냐 아니면 표절이냐를 따진다면 그 유언비어들은 사실 북한의 대남방송 표절이었다.
북한방송 유언비어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쓰나미 위력을 발휘하는데는 문정현 신부와 박창신 신부 등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역할도 컸다. 불교신자 김현장이 5월 20일에 전주성당 문정현 신부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위해 가톨릭농민회와 김현장간에 동지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가톨릭농민회 운동권이 김현장과 천주교 운동권 신부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어기 때문이었다. 전주 정의구현사제단은 김현장이 광주사태 유언비어 유인물을 작성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고, 원고가 완성되자 전주성당 고속복사기로 유언비어 전단을 수만 장 복사하여 천주교 조직을 이용해 광주와 서울과 부산 등 전국에 배포하였다.
바로 이런 내용의 북한방송을 듣고 김현장은 그의 유인물 제목을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이라고 붙였다. 김현장이 초안 제목을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이라고 붙인 날은 5월 21일이었는데, 사실 그 날 북한의 대남 유언비어 방송에 선동된 무장시민들이 광주에 대거 출현하기 전에는 단 한 명의 총상으로 인한 광주사태 사망자도 없었다. 5천 여정의 총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출현한 것이 먼저였고, 함부로 여기저기 총을 쏘는 시민들의 총기사고로 인한 희생자가 생긴 것이 사건 전개상 나중이었다. 김현장은 전두환에게 과도한 누명을 씌운 용어 ‘광주살륙작전’에 대하여 사과한 적이 있었는가? 최소한 어째서 국어의 올바른 표기 ‘살육’을 놔두고 북한식 표기로 ‘살륙’이라고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해명은 있어야 할 것이다.봉기군중을 《무쇠주먹으로 진압하라.》는 미제의 살인지령에 따라 괴뢰군부악당들은 《폭도들의 종자를 멸종》시키겠다고 고아대면서 악질특전대원들을 이틀이나 굶긴 뒤에 흥분제를 탄 술을 먹여 내몰고는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고 한 전두환살인마의 《특별 명령》대로 광주를 인간도살장으로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