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제2장 경제활동


이승만은 하와이한인대표회 이후 1년 동안 동지회 회원인 한인기독교회 교인들과 이 동지회합자회사를 어떻게 설립.운영할지를 의논,준비하였다. 그리고 1925년 12월 13일에 회사의 이름'을' 동지식산회사(Dongji Investment Company Limited)로 바꾸고 창립하였다. 동지회 결성 후 4년 반 만에 드디어 동지회 활동을 위한 재정확보의 방편으로 경제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1926년 1월 28일에 작성되고 2월 15일에 하와이 영토 상업국에 등록된 영문 정관 ‘Articles of Association of Dongji Investment Company, Limited'22)에 의하면(부록 6으로 첨부) 이 회사는 1924년 한인대표회에서 결정한 동지회 分대 정강〉중 하나인 “경제 자유가 민족의 생명이니 자족자급을 함께 도모하자”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설립된 것이다. 즉 이승만은 이 회사를 통하여 한인들의 경제력을 향상시켜 장래 활동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승만은 동지회 회원들의 회비나 특별후원금으로는 동지회의 정치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였다. 당시 이승만이 얼마나 활동자금 확보에 골몰하였는가는 1925년 4월 15일에 김구에게 보낸 그의 서한23)에서 알 수 있다. 이승만은 김구가 먼저 보내 온 편지에서 지적한 “심모원려(深謀遠位)는 우리가 마땅히 실행해야 할 대계가 아닌 것이 없소이다. 그러나 적수공권으로는 절대로 능히 공적을 이루지 못하오이다. 반드시 먼저 기금을 확보한 뒤에야 진행할 수 있는데, 자금이 어디에서 나오겠소이까. 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한가지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승만이 동지식산회사를 통하여 한인들의 경제력올 발전시키고,나아가서 동지회 활동을 위한 재정확보를 기하는데 설립 취지를 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영문 정관에 사장 신성일,부사장 김경낙,서기 차신호,회계 안영찬,감사 민찬호가 명시되어 있으며, 현재는 자본금을 7만 달러로 정하였지만 앞으로 최고 20만달러로 확장할 것이라는 단서도 달려 있다. 이 영문 정관은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한 개발회사 정관 형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1924년에 국문으로 제정되었던〈동지희합자회사규칙〉24)이나 1925년 9월에 국문으로 제정되었던(동지회합자회사규칙)25)과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영문 정관에는 국문 保지회합자회사규칙〉의 목적’ 에 포함된 ‘본국 물산을 장려하며 한족의 경제력을 발전할지니 본국 물산을 수출.수입.산출.교환 둥 모든 영업에 가급적으로 종사할지며’라는 본국과의 관계 문구가포함되어 있지 않다. 특기할 것은 1924년 규칙에는 “주주회의에서 임원과 이사원을 선거하며"라는 조직 설명과 함께 본회의 임시 임원은 총재(1인) 이승만,서기(1인) 허성,회계(2인) 윤치영과 박성균으로 기록되어 있고,1925년 규칙에는 조직 인원수는 같은 숫자로 명기되었으나 인명은 기록되지 않았다.


한편,1926년의 영문 정관에는 사장(President),부사장(Vice-President),서기(Secretary),회계(treasure)와 감사(auditor) 둥 5명의 임원(officers)이 있음을 밝혔으나 인명은 기록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공표된 1924년의〈동지회합자회사규칙〉에 이승만이 대표임을 표명하였으나 1925년 규칙과 1926년의 영문 정관에는 이승만의 이름이 빠졌다. 이승만은 독단적으로 회사를 운영한다는 반대자들의 관여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계획적으로자신의 이름을 뺀 것이다. 


이승만의 이런 의도는그가 1927년 3월 20일에 윤치영에게 보낸 답장에서 볼 수 있다. 동지식산회사 설립준비 때 회계였던 윤치영이 1927년 1월 7일에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 “그런데 어찌하여서 각하의 독재명의(獨裁名義)로 동지식산회사의 허가를 아니 맡으시고 공유적(公有的)으로 하셨나요? 물론 이리 하셔야 하겠지요.  만은 그저 독재적으로하셔야 합니다”라고 썼다. 이에 대하여 이승만이 “회사 주권을 명의로는 독단이아니라 사실로는 독단이며 차(此)에 대하여는 혹 반대자의 승간(乘間)할 여(慮)가 무(無)하외26) 때라고 답하였다.


투자자들은 공표되었던 국문〈동지회합자회사규칙〉을 근거로 투자하였을 것이며, 법적 효력을 가진 등록된 영문 정관의 내용을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회사는 1주에 100달러씩 700주를 모집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영문 정관이 작성되었을 때까지 700주 중 75%가 약정되었고,그 중 약 10%의 기금이 입금되었다. 신성일이 주식 50주,차신호가 2주,안영찬이 1주를 사기로 약정했고,그리고 민찬호와 김경낙이 수탁자(trustee)로 관리하는 주가 647주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7,100달러만이 Chinese-American Bank에 입금되어 있었다. 


한 달 후에는 목표액의 43%인 약 3만 달러가 모금되었다.27) 주를 산 사람들 중에는 하와이섬 의 코나(Kona) 지역과 힐로(Hilo)에 사는 한인들 이외에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인들이 포함되어 총 98명의 주주가 있었다.28) 이승만은 모금된 3만 달러 중 1만 3,662달러29)로 힐로 남쪽 18마일 떨어진 올라아(Olaa) 지 역에 약 960에이커30)의 오히아(Ohia)나무의 임야를구입하고 이곳을 ‘동지촌’이라불렀다.31) 동지촌의 960에이커 땅은 서울 여의도 광장의 10배의 크기이며,미식 축구장의 1,160개가 넘는 크기의 땅으로 한인들의 경제발전을 위한 첫 단계 사업이었다.




CCF12012019_00017.jpg

김성률의 동지식산회사 주식(1928, Richard Kim 소장)




이승만의 일지에 의하면,이승만이 1925년 11월 20일에 김성기32)와 힐로를 방문하고 12월 11일에 마우이 섬의 라하이나(Lahaina)를 거쳐 호놀룰루로 돌아왔는데,아마도 이 여행 때에 올라와 부지를 구입한 것 같다.33) 힐로 항은 호놀룰루 항에서 배로 14시간 걸리는 거리로 오후 5시에 출발하여 다음 날 오전 7시에 도착하였다. 힐로 항에서 8마일 떨어진 올라와 사탕수수농장 기차역까지는 기차로 갔고,34) 그곳에서 6〜7마일 떨어진 동지촌까지는 자동차로 왕래한 것 같다. 


이승만은 1926년 1월 5일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 18일 동안 머물면서 동지촌 입주 준비를 하였다. 1월 7일자 일지에 김경낙35)과 그의 식구들이 동지촌을 총괄하기 위하여 이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지금까지는 동지촌이 처음부터 오히아 목재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지역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동지촌은 1903~1905년까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민 와서 20년이 지난 후 노년으로 더 이상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경제력을 잃은 한인들을 입주시켜 임야를 개간하면서 자작농장 (Homestead)을 운영하여 그들의 경제력을 일구어 주려고 마련한 농장이었다. 


이승만은 그의 일지에 동지촌을 ‘농장(farm)’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농장에서 한인들은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였고 또 소(牛)목장도 운영하였다.36) 노인 노동자들의 수가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그들이 자작농의 기회를 통하여 경제 력을 키워 사회로 복귀함으로써 하와이 지역사회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37)  동지회 활동을 위한 재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등록된 동지식산회사 영문 정관에 의하면 회사의 목적이 부동산과 동산(real estate and personal property) 사업으로 매매활동,건설활동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부동산과 동산에 관련된 활동 목적이 자세하게 나열되어 있다. 즉 “이 회사의 목적은 부동산과 동산을 매매.저당.교환.전당잡으며,또는 부동산과 동산을 거래하며 수로관개를 건설하고 관리하며 모든 종류의 도로를 건설하고 관리하며.상수도.가스.오일 시스템 등의 파이프를 건설하고 보존하며 승객이나 화물을 수송할 차랑을 매매하며 건물이나 다른 건축물을 건립하고,매매하고,저당융자를 받고,세를 준다” 고 명기 되어 있다.


위의 각주37에서 설명한 해군참모총장이 동지식산회사의 목적이라고 한 것은 목적 이라기보다는 회사 설 립의 동기 혹은 원칙을 설명한 것이라 하겠다. 해군참모총장의 보고서는 동지식산회사가 진주만해군성과의 계약 불이행에 따르는 벌금을 내지 않도록하기 위해 미 국회에 상정한 법안을 보충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동지촌 사업이 인도주의 에 입각하여 시작된 것임을 강조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설명문은 단순히 미국인의 ‘동정’ 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이미 1929년 4월 20일의 석간지 Star-Bulletin에 기고한 글에도 노령화해가는 한인 노동자들을 위하여 한인기독교회 교인들과 의논한 끝에 동지 산회사를 설립하였다고 서술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50세였던 이승만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동자들을 한 곳에 모아 자작농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마을38)을 설립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승만이 동지촌을 설립한 시기는 그가 임정의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마찰을 빚어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 의해 탄핵당하고 (1925년 3월 18일) 대통령직에서 면직된 때였다. 대통령직 해임은 이승만을 동지촌 일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1925년 11월 20일〜1931년 4월 7일까지의 이승만의 일지를 통해 그가 1925년 말〜1931 년 4월 초까지 5년 반 동안 동지식산회사에 전력을 기울인 것을 알수 있다(이승만 일지에 1924년 11월 1일 이후〜1925년 11월 20일까지 기록은 없다). 매해 4〜6번 씩 동지촌을 방문하여 짧게는 하루, 길게는 두 달 이상을 머물렀다. 특히 동지촌을 설립한 첫 해(1926년)에는 7개월 반을 동지촌에서 보냈으며,동지촌에 있는 동안에 이승만은 말을 타고 다녔다.39) 기존의 집 두 채에 일곱 채의 집을 더 짓고 다섯 가족들을 포함하여 30여 명의 한인들이 벌목을 하고 임야를 개간해 가면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들은 재배한 채소와 과일(포하 poha)을 힐로에 있는 그들이 운영하는 상점40)에서 팔았다. 힐로 상점은 Ponahawaii Street에 위치한 4,612 평방 피트(128평) 부지의 상점으로 1926년 7월 24일에 남순명,김순남 부부에게서 4,200달러에 구입한 것이었다.41) 이 상점은 편용식(Pyun Yong-sik)이 1928년까지 그곳에 살면서 운영하였다.42) 이승만은 동지촌 운영 이외에 수년 내에 ‘우리(한인)의 은행’을 설립할 것과 15만 달러 상당의 기지와 건물을 새로 매입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43) 은행 설립에 관한 생각은 1925년〈동지회합자회사규칙〉에 포함된 ‘동지희합자회사저금부조’에 기록되어 있다.





CCF12012019_00021.jpg

힐로의 김성률부부와 이승만(1930년경)

김성률의 아들 Richard Kim(1924년생)은 이승만이 자기부모 집에 자주방문하였다고 기억하였다.

이승만은 1931년 4월 8일 일지에서, 새벽 7시에 힐로에 도착하였을 때 김종현, 김성률, 최다애가

마중나왔다고 기록하였다.



이 저금부조는 하와이 정부에 등록된 영문 정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정관에 동지식산회사 자본금의 한계를 최고 20만 달러로 정한 것으로 미루어 동지촌은 이승만의 경제발전 계획의 첫 단계였고,그가 그 다음의 장기계획으로 은행까지도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동지식산회사 자본금으로 7만 달러 모금을 예상했으나 약 3만 달러밖에 모금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의 반을 부지매입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임야개간에 필요한 자금 충당은 대단히 어려웠다. 동지식산회사 자본금 모금이 잘 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며 그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한인들의 재정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1919년 9월〜1922년 4월까지 구미위원부가 모금한 금액은 8만 1,000달러의 독립공채 매입금과 그리고 예납금 또는 의연금둥의 명목으로 모금한 6만 7,300달러였다.44) 구미위원부가 모금한 기금 이외에 미주 본토에 흩어져 살던 한인들과 하와이에 있던 한인들은 국민회,동지회 그리고 부인구제회에도 기금을 내야 했다. 1920년에 하와이의 한인 인구가 4,950명이었고,1950년에는 6,461명이었으며,미주 본토에 산재해 있던 한인의 수는 하와이 한인 인구의 1/4밖에 되지 않았다.45)


한인 1세의 인구수를 고려할 때 구미위원부가 모금한 액수만으로도 한인들에게서 더 이상의 경제적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민 온 지 20년이 지나 2세들이 중.고둥학교와 대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필요한 경비도 늘어가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지촌이 한인들의 경제력 중가를 목표로 한 사업이었지만 한인들은 쉽사리 이 사업 에 투자할 수 없었다.



동지촌은 자구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벌목한 오히아 나무를 숯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재래식 내지는 가내용 숯가마를 만들었으나 실패하였다.46) 그래서 이승만은 제조업 전문 에이전트인 D.A. Tumer Company의 사장 Tumer의 자문을 받고 호놀룰루직업학교(Honolulu Vocational School)의 강사인 George Winter와 많은 실험을 거쳐 과학적인 새 방법인 중류 혹은 가열방식의 숯가마를 1928년 8월에 설치하는데 성공하여 드디어 24시간 마다 4톤의 숯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47) 그리고 우선 시험적으로 300자(bag, 이 bag이 얼마나 큰규모인지는 밝히지 않음) 의 숯가루를 미국 서해안지역에 보냈다.48) 이승만은 숯은 오히아 나무 벌목의 부산물인데, 숯 제조라는 것이 아주 흥미로운 사업이라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여러 숯 제조업자들이 하와이 군도에 산재하여,오히아(Ohia),과바(guava),알가로바(algaroba) 둥의 나무로 숯을 만들지만 이들의 제조방법이 낙후하여 2주일에 100자루 정도의 숯을 만들어 지역시장의 수요에 응할 정도의 양조차 생산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어서 1928년 9월에 Perine Machinery회사 호올룰루 지점장 Orivlle H. Tompkins의 도움으로 제재소를 설치하였다.50) 본격적으로 가동된 제재와 숯 제조 사업을 위해 서양인, 하와이 원주민, 필리핀 사람도 몇 명 초함하여 40여명이 일했다.51)  마침 이승만은 진주만해군성의 조선(造船) 용골대(龍骨臺, keel blocks) 납품 입찰 소식을 접하고,52) 제재소를 설치해준 Tompkins로부터 기일 내에 납품할수 있다는 확언을 받은 후 입찰하였다. 단독 입찰이었다.53)  동지식산회사는 1929년 3월 18일에 진주만 해군성에 69,813 board feet (1 board foot = 12inch X 12inch X 1inch = 30 평방cm X 2.54cm)의 목재를 계약기간에 목재를 납품할수 없었고, 납품한 아주 적은 양의 목재마저 벌량품으로 판정받았다. 


동지식회사가 목재납품 계약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정부는 C.Q. Yee Hop & Co.에서 동지식산회사의 입찰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목재을 구입하였다. 그결과 동지식회사는 계약을 위반한 벌금으로 입찰가격과 구입가격의 차액 6,016 달러 16센트를 지불해야했다. 한편 동지식산회사는 호놀롤루의 Hotel Street에 가구점을 차리고, 목재가구를 팔았으나, 이가구점도 자금부족으로 1년만에 문을 닫았다.54)


동지촌은 비가 많이 오는 장소였기 때문에 포장이 안된 도로를 이용하여 제재소와 숯가마에서 나오는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제재소로부터 철로를 넣아 6~7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Hawaiian Consolidated Railway의 Olaa 역55)까지 접속시켜 수송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앞으로 12년 내지 15년 동안 벌목할수 있다는 계산으로 투자를 더하려고 한 것이다. 철도가 완성되면, 그 주변과 힐로의 주민들을 초청하여 제재소와 숯가마를 견학시킬 계획도 갖고 있었다.56) 이승만은 동지촌의 토지 가격이 10만 달러 증가했다고 홍보하면서 희망에 차 있었다.57) 그리고 1930년 5월 19일~20일까지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린 동지식산회사 주주대회에서 550달러의 주를 더 팔았으며, 각 지방 동지들이 협조하여 "거액의 고본(자본금)이 응모될 가능이 많아 보인다."고 믿었다.58)


이승만은 또한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본토로 여행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공황 등 여러 사정으로 기금 모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59) 결국 동지촌 사업은 자금이 부족하고 빚이 늘어나 계산이 맞지 않는 사업인 것이 드러났다. 1930년 5월 19일과 20일 이틀 동안 있었던 주주대회의 보고에 의하면 자본금 7만 달러의 목표액에 반액도 모금이 안되었으며, 부채가 토지가격 미납금 5,800달러를 포함하여 2만 9,000여 달러였다.60) 그러나 주주대회 보고서에서 밝힌 것과 같이 "농업과 재목 사업에는 아직 이익을 보지 못하였을지라도 토지로는 벌써 몇 갑절의 이익을 보고 앉았으니 이것은 실수 없는 이익” 이었다. 그러나 상승된 토지가격은 팔기 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서류상의 금액일 뿐이었다. 6개월 후에 작성된 1925년 11월〜1930년 10월까지의〈동지식산회사재정보고)에 의하면 약 5년 동안 목재 판매로 2,939달러,목장 수입으로 192달러,농장이 익으로 20달러와 집세로 400달러 둥 총수입 이 약 6,200달러인 반면 지출 총액은 약 2만 7,000달러로 부채가 2만 달러 조금 넘는 것으로 되어 있다.61)


1930년 10월 22일자〈동지별보)에 동지식산회사 사장 신성일이 "동지식산회사 소관” 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62) 신성일은 “식산회사 사업은 재목과 목탄을 내어 자본을 만들어 토지를 크게 개척하려든 계획이 자본 부족으로 실패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하였다. 그리하여 재목과 숯 제조사업은 중단하였지만,한 서양인의 회사가 벌목하고 매당 천자(1천 board feet)에 15달러를 준다고 하는 계약을 교섭 중에 있다고 서술하였다.


이 계약이 결성되면 매달 3만자를 벌목하여 회사 수입이 450달러가 될 것으로 계산하였다. 한편 부지를 10만 달러에 팔려고 하였으나 토지매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경제상황이었기 때문에 후에 경기가 좋아지면 팔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1930년 12월 22일에는 동지식산회사 주주회의가 열리기로 되어 있어 재정보고서가 주주들에게 분배되었으나,주주회의가 실제로 열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동지식산회사주식 11주를 산63) 부인구제회가 12월 초에 주주총회에 참가 할 대표를 선정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음을〈태평양주보〉64)에서 알 수 있다. 결국,동지식산회사는 2만 달러가 넘는 부채를 지고 1931년 4월경에 파산하였다.65) 동지식산회사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물론 한인 동포들의 실망과 원망이 컸음은 물론이다. 

실의에 빠진 이승만은 1931년 11월 21일에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은 로스앤젤레스,뉴욕,워싱턴을 거쳐,제네바에 도착한 다음,런던,모스크바 둥지를 둘러보고 1933년 8월 16일에 뉴욕으로 돌아온 긴 여행이었다.66)

이 여행을 떠나기 전 이승만은 그의 정치.외교적 능력올 동원하여 하와이 영토 대표(Delegate to Congress) 휴스턴(Victor Stewart Laleoaloha Houston)을 설득하여 1931년 12월 8일에 동지식산회사 구제를 위한 청원안 H.R. 2872, A Bill for the Relief of the Dongji Investment Co. Ltd.를 하원에 제출하도록 하였다.67) 연방하원에서 이 청 원안이 토의 되고 있을 때 해군참모총장 C.F.Adams가 제출한 여러 보고서에는 동지식산회사설립 취지와 동지식 산회사가 납품계약을 이행하지 못함으로써 정부가 본 손해액수(6,016달러 16센트)와 납품계약을 이행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회사의 부채가 3만 2,300달러인 점 그리고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은 1만 5,000달러뿐이라는 사실 둥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특히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미국 정부가 벌금을 실제로 징수한다면,동지식산회사는 파산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인도주의적인 사업을 할 수 없게 된다고 설명하였다.68) 이 청원안은 1933년 2월 8일에 하원에서 통과되었고,2월 16일에는 같은 요지로 상원에 제출된 Senate Bill 3016이 상원에서 통과되어 3월 1일 대통령이 서명.인가함으로 진주만 해군과의 계약에서 발생한 벌금을 탕감받을 수 있었다.

동지식산회사의 올라아 부지 963.35에이커는 1933년 7월 12일에 경매에 붙여졌고,이 땅의 저당권을 가지고 있던,Union Trust Company가 1만 2,500달러에 매입하였다.69) 동지촌이 운영되는 5년 반 동안에 개간된 임야와 숯가마,제재소 그리고 여러 채의 집들이 포함된 부지가 매입 당시의 가격에 조금 못 미치는 가격으로 입찰 판매된 것이다. 더구나 이 가격은 이승만을 비롯하여 동지식산회사 이사들이 믿었던 10만 달러라는 가격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실망스런 금액이었다. 아마도 파산된 회사 일이기 때문에 전 동지식산회사 임원이나 동지회 회원 중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또 토지 경매에 관련하여 일을 볼 사 람이 없었기 때문에 잊혀진 가운데 경매가 이루어진 것 같다. 한편,동지촌 부지가 매각되기 이전 4월 8일에 Henry Lai Hipp에게 200cords의 목재를 매각한70) 것을 미루어 회사가 문을 닫은 후에도 제재된 목재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동지식산회사가 파산(破産)하였을 때의 심경을 1년 후인 1932년 I2월 11일자 일지 끝머리에 “동지식산회사가 실패하였기 때문에 포기하고,조용히 워싱턴으로 떠났다”라고 적었다. 1933년 7월 26일자 일지는 스위스의 츄리히(Zurich)에서 기록한 것으로 호놀룰루에서 온 전보에 김성기 목사가 7월 6일에 사망했고 동지식산회사 땅이 처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쓴 것이다. 이승만은 어려운 시기에 가장 충직했던 친구 김 목사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주 충격적이고,또 회사 처분 소식에 마음이 매우 아프다고 기록하였다.

이승만이 동지촌을 설립한 동기를 임정의 대통령직에서 탄핵된 후 정치에서 실패한 자기의 면목을 새롭게 하려는 계책71)에서 나온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지촌은 이승만이 사탕수수농장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한인들을 한 곳에 모아 자작농으로 경제적 자립을 도모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든 농장촌이 었고,궁극적으로 한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통하여 광복사업을 조직적으로 도울 수 있는 재정을 마련하려고 한 동지회의 첫 사업이었다. 이승만의 계획에 약 100명의 주주가 동참하였고,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3만 달러(2007년도 구매가격은 60만 달러)라는 자본금도 모아졌다.

동지촌이 실패한 것은 단순히 이승만의 운영상의 미숙72)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부동산개발사업 경력이 없었던 이승만이 비가 많은 임야를 선정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여의도 광장의 10배가 되는 부지를 1만 3,000여 달러로 구매한 것은 부동산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사업의 승산이 보증된 것이었다. 부동산 판매 수수료로 15%를 요구하는 부동산 회사의 판매를 거절한 후에는 경제공황으로 부지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5년 후에 이 부지 가격이 10만 달러로 인상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 이런 규모의 사업을 같이 운영할 인재가 동지회에는, 아마도 하와이 전체에 없었다. 동지식산회사의 사장 신성일, 부사장 김경낙 그리고 서기 차신호,회계 안영찬,감사 민찬호 둥 임원들이 경영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73) 사실상 이름뿐이었다. 인재가 없을 때 사업을 시작한 것을,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려고 한 것을 운영상의 미숙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금조달이었다. 한인들의 경제력은 지난 여러 해 동안 이러저런 명목의 독립기금을 바치면서 한계에 도달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자본금 7만 달러의 반 이외의 자금조달은 기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미국의 경제가 대공황에 들어선 관계로 기금 모집이 불가능 했음은 물론이다. 동지촌 부지를 10만 달러에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았다.74)

동지식산회사의 동지촌 파산이 이승만의 실패한 사업으로 언급되지만,다른 한인들의 주식회사와 비교할 때 단순하게 이승만의 경영 미숙으로 실패한 사업이라고 보는 것은 짧은 견해이다. 하와이에서 1911년 3월 4일에 정원명.안원규.한제명 둥이 동포의 식산흥업을 장려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 농상주식회사가 있었다. 자본금 총액 10만 달러를 위해 10달러의 주식 1만 주를 팔려고 사업을 시작하였으나,75) 얼마 지나지 않아 폐업하였다. 주식 한 주에 50달러씩 200주를 팔아 자본금 1만 달러로 시작하였으나 기술 부족으로 4년 후에 문을 닫았다.

미주 본토에서도 흥업주식회사(캘리포니아 주),한미무역회사(캘리포니아 주),태동실업주식회사(북미),한인농업주식회사(네브라스카 주), 북미실업주식회사(캘리포니아 주),식물건제회사,동양식물주식회사(캘리포니아 주),유한주식회사(미시간 주) 둥 여러 회사가 설립되었다.76)  이들 중 동양식물주식회사(자본금 1만 5,000달러)는 15년을, 북미실업주식회사(자본금 9만 5,000달러)는 10년을 유지하였으나 다른 회사들은 3, 4년 후에 폐사하였다. 특히 북미실업주식회사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흥사단 단우들의 사업이었으나,77) 1920년 벼농사 실패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문을 닫은 경우이다. 이러한 여러 한인들의 주식회사들과 비교할 때,동지식산 회사는 그나마도 오랫동안 지속된 회사라 할 수 있다.

동지촌의 6년 역사는 이승만이 얼마나 재정확보에 골몰하면서 동지회의 장래를 위하여 어떠한 다른 활동을 하였는지 밝혀 준다. 이승만은 이 기간 동안에 태평양잡지사도 계속 운영하였으며,1930년 12월 13일에 월간〈태평양잡지〉를 주간〈태평양주보〉로 바꾸고 꾸준히〈태평양주보〉에 기고하였다.

이승만은 또한 여행을 통하여 미주 본토의 한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와이의 백인 인사들과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숯가 마와 제재소 설립을 위하여 만난 제조관련 엔지니어와 기계설비자들은 물론 하와이 정치계 인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와이 대표 Houston이 동지식산회사 탕감을 위한 청원안을 미 국회에 제출해 줄 리가 없었다.

진주만 해군기지의 납품입찰도 단순히 신문광고에 의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숯 제조에 관한 상당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 기간 동안의 그의 폭넓은 활동과 배움을 일러준다. 이 모든 활동은 이승만 자신뿐만 아니라,동지회의 정치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승만은 꾸준히 준비하고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현재 동지촌 부지는 분할되어 개인 소유지가 되었고,농경지 혹은 개인주택지로 바뀌어 드문드문 주택이 들어서 있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숯가마 터는 개인주택지구 4 1015(택지)에 접해 있다. 필자가 2005년 8월 19일에 그곳을 찾아 갔을 때 아직도 숯가마는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원형이 남아 있었다. 가마 속의 철물은 많이 부식되었지만 높이 약 6.5피트,넓이 6피트 그리고 길이 50피트 정도의 숯가마 속에는 나무를 담는 대형 철제 바구니가 들어갈 수 있도록 놓은 35인치 넓이의 선로(궤도)가 있고 숯가마 밖에는 바퀴가 달린 철제 바구니가 선로 위에 멈추어져 있었다.

이 숯가마 터는 Volcano Highway Route 11에서 mileage maker(이정표,이정표) 16~17번 사이에 North Oshiro길로 우회전하여, 다리 두 개를 지나면 Komo Road가 나오고, Komo Road 를 따라 2블럭 쯤 가서 Kaawale Boulevard 로 우회전하여 Hinuhinu Street의 두 번째 필지에서 들어갈 수 있다(부록 8 동지촌 지도 참조). 이 숯가마터로 가는 길 Komo Road 18-4076번지에 위치한 집은 이승만이 거처했다는 2층 집78)인데,현재 그 자리에 있는 건물은 1936년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다만 이 집 마당에 이승만이 살았을 때 심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아직 자라고 있다.

 


동지촌의 숯가마.jpg
동지촌의 숯가마, 




선로에 멎은 철제 바구니의 바퀴(1993, 이덕희 소장).jpg
선로에 멎은 철제 바구니의 바퀴(1993, 이덕희 소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註釋:

22) Hawaii State Archives, "Department of Commerce Record" #256*33 (pp, 351~356),355.
23) 〈우남문서〉제16권, 10. 한글 풀이는 손세일, ᅳ이승만과 김구”,〈원간조선〉2005년 11원, pp. 561~562에서 인용.
24) 《우남문서〉제12권, 야). 251-254. 이 규칙에는 작성일자가 기입되지 않았지만,1924년 11월 17일부터 4일 동안 열린 하와이한인대표회선포문과 함께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회의 기간중이거나 회의가 끝난직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5) 〈우남문서〉제권,I平. 262-268, 이 규칙은 1있5년 9월에 동지회 이사부가 임시로 제정한 것이다. 1925년 규칙은 1924년 규칙보다 2관(고본표와 영업의 소제목)이 더 많고 문장에 차이가 조금 있으며, 총재.서기.회계에 지정된 이들의 이름이 없다. 이외에 ‘동지희합자회사 저금부 조리’라는 규정이 있다.
26) 〈우남문서〉제16권, 138.
27) 〈동지식산회사재정보고(1925년 11월부터 1930년 10월까지)〉에 29,220달러 47센트가 모금되었 음이 보고되어 있다. 국가보훈처,〈미주한인 민족운동자료〉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예), 미주편,pp. 308-309, 이 액수에는 대한부인구제회에서 구입한 11주의 1,100달러가 포함되었다.
28) "동지식산회사 주주대회결과”,〈태평양주보〉1930년 5월호, p 2,
29) 앞의〈동지식산회사재정보고〉에 기록되어 있다.
30) 1에이커는 1,224평. 김원용이 앞의 책에(p. 204) 9,900에이커라고 기록한 것은 오류인데, 291 에는 990에이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9,900에이커라고 잘못 인용하고 있다. 정확하게 동지촌 부지는 963.35에이커이다. 이 부지 크기는 동지식산회사가 파산하고 그 부지를 경매입찰에 붙여 낙찰된 기록에 명시되어 있다. Conveyances, Book 1211, pp 11~15
31) 1926년 1월 7일자 일지에 이승만은 "동지촌이라 부르는 우리의 1,000에이커 농장 our new 1000-acre farm called Dongji Chon” 이라고 기록하였다.
32) 김성기는 1925년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의 부목사였으며 동지회 주무원(사무원)이었다. 그 후 1929년 6월부터 193】년 11원까지 힐로 한인기독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는데, 동지촌 일에 이승만을 많이 도왔다.
33) 이승만은 1926년 9원에 이 부지를 구입했다고 그가 신문에 기고한 글에 썼는데 오기인 것 같다. Dr. Syngman Rhee, "Korea Colony at Olaa Shows Increase in Value in Three Years, " Star-Bulletin, April 20, 1929, p.10(이후 '이승만시고문'이라함) 지금까지 State of Hawaii Bureau of Conveyances에서 찾아낸 기록에 의하면 700에이커의 부지를 1926년 2월24일에 구매하고,14개월 후인 1927년 4월 22일에 구매 등기를 하였음올 알 수 있다. Book 878, pp493-494,앞으로,나머지 약 260에이커의 부지 구매 기록을 찾아야 한다.
34) 외부협판(外部協辯: 외무부 차관) 윤치호가 1905년 9월 8일~10월 3일까지 하와이 이민자들의 정상을 살피러 다녔을 때,이 기차로 올라와 농장에 있는 한인 마을에 갔다. (윤치호 일기),한국사료 총서 제 19, 국사편찬위원회, 1976, pp. 160〜161.
35) 앞의〈동지식산회사재정보고〉에 김경낙이 1925년 11월부터 1930년 10월까지 50달러를 받은 것이 기록되어 있다.
36) 1930년경에 소 두 마리만 남아 있었는데,동지촌 한인들이 "하나 잡아 죽이자” 고 해서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이승만이 이 소식올 워싱턴에서 듣고 야단치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Ethan Sungkoo Kiehm이 기억하였다. Ethan Sungkoo Kiehm과 그의 부인 Josephine이 2년 동안(1928-1930) 이승만과 함께 동지촌에 살면서 살림을 맡아 보았다. "Whispers from the past,"   〈미주 한인사회와 독립운동 1〉,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남가주기념사업회,2003, 646. Ethan Sungkoo Kiehm은 1904년 7월 11일에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났고(父 김도삼,母 흥순이) 한인기독학원에 1년간 다녔다. 한인기독학원에서 Josephine을 만나 1927년에 결혼하였다. Kiehm은 자신이 이승만을 도운 유일한 한인 2세라고 2003년 경에 회고하였고, 얼마 후 타계하였다.
37) 1931년 미 국회에 상정한 House Bill (H.R, 2872)과 Senate Bill(S. 3016))을 위하여 해군참모총장 Secretary of the Navy C. F. Adams가 제출한 보충 보고서인  Senate peport 1233 (72nd Congress 2nd Session) #9648; Senate Report 615(73-2) #9772; House Report 1091 (72-1) #9496; House Report 1628 (73-2) #9782, U.S. Congressional Record, Microfiche D50086, Unversity of Hawaii, School of law Library 소장본. 이 내용온 하와이 정부에 등록된 동지식 산회사 정관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38) Henry Cu Kim(김현구)는 그의 회고록에서 동지촌올 ‘socialist-oriented little Korea’ 라고 하면서 이는 사회주의 사상에서 비롯되었으며 "This was patterned after Pak Yong-man's shadow goverment and milita system" 이라고 하였다. Dae-Sook Suh(ed.)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Autobiography with Commentaries on Syngman Rhee, Pak Yong-man, and Chong Sun-man, Unversity of hawaii press, 1987, 207~208. 한편, 방선주는 ''당시의 流行思潮인 사회주의사상의 만연과 그의 온건사회주의자들과의 교제로 보아서 그렇게 보는 시각도 일면은 진리를 가졌다고 보이게 된다”고 했다. “1930〜1940년대 구미에서의 獨立速動과 列强의 反應”, 梅奸 尹奉吉義士 의거 60周年 紀念國際學術會議,〈韓國獨立運動과 尹奉吉務士〉,1992,pp.330.
39) 하와이판,〈한국일보〉1978년 1월 14일.
40) 이승만이 1927년 3월 20일에 동지식산회사 설립준비 중에 회계로 일을 도운 윤치영에게 보낸 편지에 힐로 상점은 작지만 앞으로 잘 될 희망이 있다고 설명하였다.(우남문서)제16권.p. 138.
41) State of Hawaii, Bureau of Conveyances, Record Book 837, P.358, 힐로가 하와이 섬의 중심도시이지만, 4,200달러라는 가격은 상대적으로 비싸 보인다. 이 상점 부지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에 관한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다.
42) 1/11,料매신다、(유경상),"Korean Nationalist Activities in hawaii and the Continential United States, 1900-1945", PartII:1919-1945, Ameriasia 4;2(1977), p.63, 한편 위의〈동지식산회사재정보고〉에 편경실이 210달러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편용식과 동일인인지 알 수 없다.
43) 앞의, 이승만이 윤치영에게 보낸 편지.
44) 고정휴, 앞의 책, p. 123
45) 192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미주 본토 29개 주에 흡어져 살던 한인들의 수는 1,165명이었으며, 그 중 캘리포니아 주에 755명으로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살았다.
46) 초기 숯 제조에 관한 일화는 이상수,〈송철 회고록〉, Keys Ad, & Printing Co., 1985, 200〜2이을 참조.
47) 이승만 기고문과 이승만 일지, 1928년 8월 3일.
48) 이승만 기고문. 한편, 김현구는 이승만이 숯 5,00파운드몸 오레곤 주 Portland의 마살회사(Marshall Company)에 시험적으로 납품하였는데, 품질 미달이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Dae-Sook Suh,앞의 책, p. 208, 물론 이승만은 그가 신문에 기고한 글에 서해안 지역 어느 회사에 납품하였다거나, 또 품질 판정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이승만이 오레곤 주에 있는 Marshall Company에 납품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회사와의 연계는 목재소롤 설립한 Perine Machinery회사 호놀룰루 지점장 Orville H. Tompkins가 주선하였을 것이다. Perine 회사는 시에틀과 포트랜드에 지사가 있었다.
49)이승만 기고문
50)이승만, <일지> 1928년 9월 4일.
51)이승만 기고문.
52)신문광고가 있었는지 지인이 알려 주었는지 확실치 않다. Advertiser 나 Star-Bulletin에서 입찰공고를 찾지 못했다.
53)앞의 Senate Report No. 1233, Microfiche D50086, #9648
54) 김현구는 1929년 진주만에 납품을 하지 못한 후에 가구점운영을 하였으나, 직공들의 월급도 겨우 줄 정도로 실패하였다고 기록했다. Dae-Sook Suh, 앞의 책, p.208. 한편, Kingsley K. Lyu는 앞의 글에서 동지식산주식회사가 1926년 호널룰루의 호텔 스트리트에 가구점을 차리고, 조석진과 이경용이  가구를 만들어 팔았으나, 자본으로 1927년에 문을  닫았다고 기록헸다.(p.64).

55)Hawaii Consolidated Railway는 1899년 3월에 Hilo Railroad Company로 시작된 철도회사인데, 첫노선으로 힐로에서부터 8마일 떨어진 Olaa 사탕수수 공장(Sugar Mill)을 연결하였다.

56)이승만 기고문

57)이승만 기고문. 이 10만 달러라는 가격은 호눌룰루의 한 백인 토지회사가 팔아주겠다는 가격이었는데, 팔아주는 수수료로 판매액의 15%를 내라고 하였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58)<주주대회결과>,p.2.

59)김현구는 앞의 책에서 자신이 동지촌 홍보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1929년에 이승만이 미주본토로 여행하여 동지촌을 위해 약 6만달러를 모금햇다고 기록하였다.(p.210) 그러나 이승만이 1929년 10월 5일에 호놀룰루를 떠나 캘리포니아, 시카고, 워싱턴, 뉴욕, 필라델피아, 디트로이트, 캔사스시티, 솔트레이크시티 등지를 여행하고 1930년 1월 8일에 돌아오는 동안에 그의 일지에 가는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지만, 동지식산회사를 위한 기금을 보았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더우기 김현구가 말한 6만 달러가 앞의 <동지식산회사재정보고서>에 기입되어 있지 않다. 당시 6만 달러(2007년도 구매액은 120만 달러)의 금액이 모금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우며, 더우기 6만 달러가 있었다면 동지촌이 파산되지 않았다.

60)2만 9,000여 달러의 부채에 이승만의 사비는 포함되지 않음이 앞의 <주주대회결과>에 밝혀있다.(p.3). 토지를 구입할때 이승만 개인의 돈이들어간 것이 있음을 설명하였으나 액수는 밝히지 않았다. 한편, 앞의 <동지식산회사재정보고서>에 이승만의 3,986달러가 수입으로 보고 되어 잇는 것으로 보아, 이 액수가 이승만이 토지 구입 때 선불한 사비인것 같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50주(5,000달러)를 산 신성일 다음으로 많은 액수를 동지식산회사에 투자한 것이다.


61) 김원용은 앞의 책에서 “1931년 1월에 발표한 보고를 보면 동포들의 고본금이 4만 달러이고 부채가 5만 5,000달러인데,전부를 손실하여서 파산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p.291),앞의〈동지식산회사재정보고〉가 1930년 10월까지의 재정상황올 보고한 것으로 보아, 1931 년 1월에 발 표했다는 보고서롤 인용한 것인데,김원용이 기록한 부채 액수는 오기다.

62) 국가보훈처 , 앞의 책,pp. 181〜 182. 1930년 5월 주주대회 에서 차신호가 새 사장으로 선출되었는데, 10월에 다시 사장 신성일의 이롬으로 이 글이 발표되었다.

63) 1931년 부인구제회 대표회의록〉,〈우남문서〉제 12권, 416.

64) 〈사실셔〉,1931년 1원 10일,따 6〜11. 종래에는 부인구제회 중앙(총)부장이 주주총회에 참석하였는데 1930년도 중앙부장인 김노되가 한인기독학원의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모임에시 다른 대표를 선춤해야 했다. 대표 후보로 그날 회의를 이끌어간 대의장 백인숙과 호항 지방 회장 곽마리아와 중앙부 임원 심영신이 있었는데, 김노듸가 백인숙을 대표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발표하였다. 이에 심영신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언쟁이 있었다. 그리고 동지식산회사의 재정보고몸 심사하는 과정에서 보고서에 이의가 제기되면서, 다시 대표자 선출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동지합자회사규칙〉제2조는 매주에 투표권이 있다고 하였으나,이 조항은 영문 정관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대한부인구제회 회원 중에는〈동지합자회사규칙〉제2조에 의하여 대한부인구제회가 11개의 투표권이 있는데 1930년 12윌 22일에 있올 주주회의에 대표 한 명만 보낸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노되는 주주총회에 대표는 여러 명이 참석할 수 있으나 투표권은 한 사람에게만 있다는 동지식산회사의 통지이기 때문에 한 명만 대표로 보낸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언쟁은 급기야 몸싸움으로까지 이어졌고, 이것을 계기로 대한부인구제회가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이덕희,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들의 활동, 1903〜1945",〈近代의 移民관 仁川〉,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4, pp. 85-86),부인구제회가 1930년에 동지회와 교민단의 충돌로 인하여 동지회파와 교민단파(나중에는 국민회파)로 나누어졌다는 것과그후동지회파 부인구제회에 관한 고징휴의 글(앞의 책, pp. 192〜 193)은 오류다.


65) 이승만이 일지에 1931년 4원 8일에 힘로에 간 것을 마지막으로 기록하였고, 그 후에는 일지에 공백이 있다가 윌 21일에 호놀룰루를 떠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동지촌이 4월 8일 이후에 파산(破産)하여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행정적으로 동지식산회사의 등록이 말소된것온 1935년 3월 21일로 Hawaii State Archives에 보존되이 있는 ‘Articles of Association of Dongji Investment Company, Limited’ 에 기입되어 있다.

66) 이 여행 중 제네바에서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이숭만은 프란체스카를 Fanny라는 애칭으로 일지에 기록하였다)롤 만났고, Francesca가 1934년 10월 4일에 뉴욕에 도착하여 10월 8일에 결혼하였다. 넉달 후인 1935년 1월 와일에 부부가 같이 호놀룰루로 왔다. 유영익,앞의〈이승만의 삶과 꿈〉, pp. 182〜88 참조.

67) 앞의 각주 37) 참조. 이승만의 일지에 의하면 그는 캘리포니아의 여러 곳과 시카고, 오하이오 주의 오벌린을 거쳐 12월 7일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워싱턴에서 9(X15100 대표와 연락을 하였는지, 또 그의 청원안이 8일에 상정된다는 사실읍 알았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일지는 12원 7일에서 15일로 건너뛰고, 이 상정안에 관하여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68) 앞의 Senate Report 1233과 Senate Report 615. Adams의 보고서는 1932년 3월 I2일에 작성된 것이며 이때는 동지식산회사가 이미 파산된 후였다. 정병준,앞의 책,p.340,

69) State of Hawaii, Bureau of Conveyance, Book 1211, pp.11~15.

70) State of Hawaii, Bureau of Conveyance, Book 1193,p.496. 1 cord는 4 X 4 X 8 피트임을 미루어 동지촌 제재소에서 얼마나 큰 나무들을 다루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71) 김원용, 앞의 책, p.204.

72) 고정휴,앞의 책, p. 183.

73) 〈국민보〉,〈태평양잡지〉,〈태평양주보〉에서 신성일에 관한 기사는 찾을 수 없다. 안영찬과 차 신호는 한인기독교회 평신도 지도자였으나 그들에게 사업 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민찬호는 한인기독교회 목사이자 한인사회의 지도자였으나 그의 사업능력은 중명되지 않았다. 

1930 년 5월에 열린 동지식산회사 주주대회에서 9명의 이사가 선출되었는데, 이사장 이승만을 비롯 하여,차신호,신성일,이천봉,김정현,이만기,남순명,최성대,이용직(한인기독교회 목사〉이었다. 

이 주주대회에서 차신호가사장에, 재무에 김유실, 서기에 최성대가 선춤되었다.

74) 동지식산회사 사장 신성일의 이름으로 1930년 10월 22일에 발표한 "동지식산회사소관",〈동지별보〉,국가보훈처,앞의 책, 따. 181〜182. 

1930년 5월 주주대회에서 차신호가 새 사장으로 선출되었는데,10월에 다시 사장 신성일의 이름으로 이 글이 발표된 것이다. 앞의 각주60).

75) 〈신한민보〉1911년 3월 1일,p.3, 한편 김원용은 앞의 책에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동포의 산업장려륜 위하여 한인농장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수익금을 사관 양성에 쓰려고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김원용은 또한 이 회사가 이승만이 하와이에 와서 일으킨 당과 싸움의 영향으로 인하여 사업이 실패하였고, 재산을 정산하여 대조선 국민군단에 기부하였다고 기록하였다.(p. 288),앞으로의 연구 과제다.

76) 김원용, 앞의 책, pp. 285-293.

77) 북미실업주식회사에 관하여는 이상수, 앞의〈송철 회고록〉,pp. 105-114 참조.

78) 이승만이 거처하였을 때에도 이 집이 2충 집으로, 아래층에 부엌이 있었다. 이 집에 Ethan SungKoo Kiehm과 그의 부인 Josephine이 2년 동안(1928~1930) 이승만과 함께 살면서 살림을 맡아 보았다. 이승만이 식사 때가 되면 Josephine에게 됐는가? 아니면 “먹게 됐는가?" 라고 묻곤 하였다고 Kiehm은 기억했다. 앞의 "Whispers from the past." p.646.


  1. [하와이 대한인동지회_연재]_______차례

    Date2019.12.13 By종이비행기 Views89
    read more
  2. [하와이 대한인동지회_연재]_제2장 경제활동

    Date 2020.07.30 / 단기: 4353.07.30 By종이비행기 Views254
    Read More
  3. [하와이 대한인동지회_연재]_제1장 대한인동지회 조직과 활동 준비

    Date 2019.12.18 / 단기: 4352.12.18 By종이비행기 Views311
    Read More
  4. [하와이 대한인동지회_연재]_______차례

    Date 2019.12.13 / 단기: 4352.12.13 By종이비행기 Views89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위로